[스페셜1]
<오래된 정원> 갈뫼 현장 [1]
2006-04-19
글 : 이종도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임상수 감독의 다섯 번째 작품 <오래된 정원>은 황석영 작가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겨울공화국’이 끝나는 줄 알았던 80년 봄, 참혹한 광주의 비극이 일어났다. 이듬해 현우(지진희)는 수배를 피해 잠수를 타다가 자신을 숨겨준 윤희(염정아)와 사랑에 빠지지만 둘 사이의 봄날은 너무나 짧았다. 현우는 붙잡혀 감옥으로 가서 세기말을 맞고, 윤희는 감옥 바깥에서 세기말을 맞는다. 이루어질 수 없어 더 간절했고, 불의의 시대가 가로막아 더 애틋한 열애담.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두 연인의 열애 속으로 들어가 지난 세기를 굽어보며 인류의 이상과 그 도전을 톺아본다. 임상수 감독은 암울한 시대의 벽화 안으로 들어가 두 사람의 열애를 발견한다.

우리 시대를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 ‘살아냈던’ 작가 황석영의 열애담이 카메라에 어떻게 잡히는지 궁금했고, <그때 그사람들>로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적 작가 임상수의 1980년대 독해가 궁금했으며, <바람난 가족> <그때 그사람들>에 이어 내리 세 작품째 같이 손잡고 일하는 임상수, 김우형 촬영감독, 고낙선 조명감독과의 작업방식이 궁금했다. 현우와 윤희가 만나고 헤어졌던 갈뫼를 찾아 나섰다.

전주 외곽의 갈뫼 촬영장 그리고 강원도 정선 하고도 동강을 굽이굽이 따라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갈뫼 입구 촬영장을 2주에 걸쳐 들렀다. 포근해진 3월 마지막 수요일 밤, 정선엔 폭설이 쏟아졌다. 인적도 끊기고 가로등도 없는 눈 쌓이는 59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저 뜨겁고 가혹했던 시대가 미처 고백하지 못한 간절한 사랑 속으로 빠져들기라도 한다는 듯이. 와이퍼 사이로 쉴새없이 눈뭉치가 날아들었다.

17년간 닫혔던 길. 갈 수 없는 길. 현우가 감옥에서 출소해 기력을 차린 뒤 16년8개월 동안 만나지 못했던 연인 윤희를 만나러 간다. 이제 현우는 옛사랑의 희미한 그림자를 찾아 엿새 동안 추억의 마을 갈뫼에서 머물 것이다. 그리고 윤희가 남겨놓은 노트와 그림을 보면서 잃어버린 세월을 만지작거리게 될 것이다. 갈뫼니 갈산이니 하는 지명은 어딜 가도 흔한 이름이지만, 현우와 윤희 그리고 저 ‘불의 연대’인 80년대를 관통했던 이들에게는 언제라도 돌아가고 싶은 유토피아의 이름이다.

다시 찾은 오래된 정원 - 전주 갈뫼, 현우

한식을 앞둔 주말이라 전주 은석골 촬영장 가는 길은 멀고 팍팍하다. 스탭들이 동네 돌담길에 소금을 뿌리느라 바쁘다. 겨울로 치장하기 위해서다. 머리가 허옇게 센 현우(지진희)가 17년 전 이웃이자 열애의 목격자인 순천댁(박혜숙)에게 저간의 사정과 안부를 듣는 장면이다.

“처음 대사할 때 호들갑을 떨어달라”고 임상수 감독이 주문하자 박혜숙이 “쫀쫀하게 해달라는 거죠?”라며 받고는 테이크를 한번 더 간다. 돌담길을 따라 깐 레일 위에서 김우형 촬영감독이 카메라로 현우와 윤희가 놓친 17년 세월을 따라간다. 인근 채석장에서 돌덩이 무너지는 소리와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17년의 공백 사이로 뛰어든다.

은석골에 흐르는 냇물의 상류를 따라 올라가니 넓은 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 위에 폐가를 다시 손본 ‘오래된 정원’인 갈뫼집이 나온다. 윤희가 현우를 숨겨준 윤희의 작업실이자, 연인의 보금자리인 곳이다. 제작진이 후보지 40군데서 고르고 고른 곳이다. 스크립터 박현진이 모니터에서 지난 갈뫼 촬영분량을 찾을 때마다 힐끗 넘겨다보니 널찍한 안마당에서 펌프질한 물에 푸성귀를 씻은 뒤 된장찌개에 쌈밥을 먹는 현우와 윤희의 행복한 나날이 보인다. 그 뒤로는 푸른 호수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늙은 현우가 순천댁에 들렀다가 갈뫼집으로 올라오는 장면을 찍는다. 현우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다가 감옥에 갇혀 17년 동안 갈뫼에 올 수 없었지만, 자신의 싸움이 헛되지 않았으며 사랑도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스탭들이 현우가 선 뒷배경에 소금과 솜으로 눈 흉내를 내느라 바쁘다. 나머지 부분은 CG로 겨울의 흔적을 만들게 될 것이다.

홀로 남은 오래된 정원 - 전주 갈뫼, 윤희

저녁 먹으러 마을 회관 앞에 세워둔 밥차쪽으로 내려오는 길이다. 벌써 어둠이 내려앉았다. 임상수, 김우형, 고낙선 삼인조는 순천댁네 돌담길을 따라 내려가며 다음 돌담길 장면에서 염정아의 연기와 카메라 각도를 상의한다. 임상수 감독이 직접 담벼락에 붙어서 윤희의 아파하는 모습을 흉내낸다. “어, 카메라 각도까지 다 나오네요.”(김우형) 세 사람의 촬영장에서 스토리보드는 최종 촬영의 순간까지 열려 있다. 김우형 촬영감독은 “(<바람난 가족> <그때 그사람들>보다) 클로즈업과 망원렌즈를 많이 썼는데 두 연인의 감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며 “차갑게 찍은 감옥과 달리 갈뫼는 현우가 혼자 있을 때조차 따뜻하게 느껴지게 찍었다”고 말했다. 감독은 홀로 있어도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려 했다고 한다. “필터에 의존하기보다는 부드러운 광선을 많이 쓰고, 조명 광원도 큰 것으로 쓰고 있다.”

전주 은석골 갈뫼 촬영장 마지막 촬영은 현우를 감옥으로 보내고 홀로 남은 윤희가 갈뫼집에서 내려와 순천댁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이다. 조명이 준비되는 동안 차 안에서 쉬고 있던 염정아가 “갈뫼 NTC(찍은 필름을 비디오테이프로 바꾼 것) 볼 수 있느냐”며 스크립터에게 묻는다. 임 감독이 “너무 섹시하게 (갈뫼 NTC에) 나와서 깜짝 놀랐다”며 농담을 건넨다. 고무신 차림에 평상에 앉아 현우에게 먹일 모과주를 뜨고는 있지만 원작의 윤희보다 더 세련되고 도회적인 느낌이다. 담장에 소금을 뿌려 겨울을 만들었던 스탭들이 소금을 치우고 녹이며 계절을 봄으로 돌려놓는다. 마을 어귀부터 갈뫼집 가는 언덕배기까지 조명을 치자 마을의 밤이 환해진다. 조명팀은 불 밝히랴, 동네 개들 입 단속하랴 바쁘다. 간신히 아픈 몸을 이끌며 ‘도와달라’고 윤희가 외치자 순천댁이 ‘뭔일이디야’라며 뛰쳐나온다. 감옥으로 들어간 현우 못지않게 윤희도 감옥 저편에서 진통을 겪는다. 그러나 고통이 클수록 사랑도 풍성해진다는 게 <오래된 정원>이 건네는 위로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