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훈훈한 위로를 주고 싶단 생각이….”
봄 하고도 3월 말이지만 임상수 감독이 느끼는 한기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겨우내 찬바람이 뼛속을 휘감고 다녔던 것 같다. 타지를 돌아다니며 촬영한 탓인지 얼굴도 많이 그을려 있다. 점퍼에 가죽 코트까지 입고 감기약을 챙겨먹는 것도 모자랐는지 스웨터를 하나 더 껴입는다. 문제작들로 줄곧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임상수 감독에게 <오래된 정원>은 그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따뜻한 작품이 될 것 같다.
-원작의 장면이 더욱 강렬하게 시각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가령 현우가 출소 뒤에 우는 장면이나 윤희가 교도소에 면회 갔다가 나오는 장면.
=문학적 표현과 영화적 표현이 다르기 때문이다. 원작에선 TV 요리프로그램을 보다가 현우가 눈물을 글썽이는데, 감독으로서 그 장면을 감동적으로 만들 자신이 없어 화장실 유리 앞에서 우는 장면으로 각색을 했다. 소설에서 아무리 좋아도 영화적으로 관념을 찍을 수는 없다. 빛에 반응하는 물질을 찍을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을 찍으면서 어려웠던 점과 노리고자 했던 건 뭔가.
=담담하게 찍고 있다. <그때 그사람들>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담담한 멜로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이 폭풍 같은 격정을 느끼게끔 하는 게 이 작품의 도전이다.
-임상수, 김우형, 고낙선 삼인조는 스토리보드없이 세 작품째 진행을 하고 있다.
=콘티대로 준비를 하면 뻔한 스토리가 나오고 다음 컷도 예상이 가능하다. 짜증이 날 수 있다. 하고 싶지도 않고, 재미도 없고. 보드를 짜면 PD 입장에서는 편하지. 준비만 하면 되고. 돈도 절약되고. 그런데 그러면 미리 작품을 규정하게 된다. 시나리오는 책상에서 쓰기 때문에 현장에 나오면 여러 가지 변수가 있는 건데. 그렇다고 우리가 콘티가 없는 건 아니다. 영상화된 콘티가 없을 뿐이지. 불편한 점은 있어. 스탭들이 잘 모르니까. 미리 촬영 전에 발표하려고 애는 쓰는데. 헌팅이 제일 중요하지. 로케이션 정해진 이후에도 몇번씩 같은 장소엘 간다. 그 신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 촬영감독, 조명감독 등 각부분의 스탭들과 공유한다. 문서와 영상에 의존한다는 건 모호함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거다. 뭘 찍을지 다 안다면 뭐 하러 찍나. 이렇게 찍겠다고 발표하지. 마지막 하나는 모호하게 내버려두는 즐거움이 있다. 그래도 인원을 많이 동원하는 장면은 꼭 문서화한다.
-멜로드라마의 숏 구성은 다른 장르에 비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숏 구성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촬영감독에게 중요할 수는 있겠지. 콘티를 짜고, 장면이 잘 붙어야 한다는 게 1차 목표인 것 같지만 거기에 연연하는 건 학생 수준의 이야기다. 내가 게을러서 그런 건지도 모르고. 인생공부만 하고 영화공부는 게을리하기 때문에.
-황석영 작가의 시나리오 독후감이 무엇이었나.
=시니컬하다고 하던데.
-윤희가 소설보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것 같다.
=어른스럽고 주체적으로 그리려고 했는데. 소설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영화에서 그림과 사진의 의미가 중요하다.
=황석영이라는 거물에 업혀가는 작품인데, 또 한명의 거물에 업혀간다. 시나리오 못지않게 <20세기의 추억>이라는 연작을 그린 조덕현이라는 화가의 그림이 중요하다. 현우와 윤희가 서로 헤어지기 전에 윤희가 그린 현우의 초상에 나중에 나이 든 윤희를 이어 그린 그림인데 이 그림의 의미가 나중에 훨씬 더 크게 증폭된다. 누구에게 이 그림을 그리게 할까 하다가 조덕현 작가에게 부탁했다. 염정아와 지진희를 그려주고 마지막 장면도 장식해줬다. 윤희 직업이 화가니까, 윤희의 모든 작업을 조덕현 작가의 작업으로 설정해서 쓴다. 조 작가가 직접 그리는 장면도 있고. 그분의 <20세기의 추억> 연작과 황석영 선생의 <오래된 정원>은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이 소설이 유럽에서 이해되는 이유도 한국만이 아닌 인류의 지난 한 세기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조덕현 작가는 이 소설의 그런 내용에 공감해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그리고, 소장품도 보내주고, 어느 장면에 어떤 걸 쓰라고 얘기까지 해줬다. 조덕현이라는 의외의 인물이 이 영화에 미적, 질적으로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에로스에 있어서 독보적이었다. 자유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의 섹스를 그려왔는데, 처음으로 사회주의자의 섹스가 나온다.
=15세 관람가로 찍었는데? (웃음) 키스만 하고 프레임 아웃이다.
-두 연인이 머뭇거리며 서로에게 다가가야 하지 않나. 영화적으로만 본다면 자칫 잘못하면 둘이서 첫날밤을 바로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겠다.
=오해해도 된다. 그런데 관객이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않아. 거기까지 가기 전에 현우가 윤희에게 시를 읊어주는 밤도 있고.
-<그때 그사람들> <오래된 정원>을 만들며 임권택의 적자가 되고 있다는 정성일의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박치기!>를 보며 느꼈는데 과연 재일동포가 만든 영화는 한국영화인가? <피와 뼈>는 또 외국영화인가? <피와 뼈>는 2005년 어떤 한국영화보다도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예리하게 고찰하는 위대한 영화다. 영화가 서양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게 너무 당연하다. 그건 한국인만의 문제이며, 한국인만의 정신적, 심리적 특수성을 다루고 있다. 내가 보기엔 그렇게 한국인을 잘 그린 영화는 최근 없었던 듯하다. <박치기!>나 <피와 뼈>를 보면 오히려 한국영화보다 한국에 대해 더 고민하는 것 같다. 한국인이 한국인에 대해 더 고민을 하지 않는 것 같고. 그렇지만 나는 내셔널리즘의 카테고리에 갇히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서 지진희의 연기를 어떻게 생각하나. 염정아, 지진희와 첫 작업인데 서로 의사소통이 잘되는지.
=무리없이 연기했다. 두 사람 다 내 말에 너무 귀를 잘 기울여준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원작보다 시나리오의 인물이 훨씬 더 세속화된 것 같다.
=소설을 읽고 느낀 건 인물들이 왜 이리 숭고하냐 하는 거였다. <바람난 가족>의 비루한 쓰레기 인생들에 비해 말이다. 황석영 선생을 깎아내리려고 하는 의도는 전혀 없고, 다만 내 영화니까 내가 느끼는 대로 찍는 건데, 영화적 표현과 문학적 표현이 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현우와 윤희를 저 높은 곳에서 비루한 땅으로 끌어내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비루하게 끌어내렸음에도 나보다 숭고하고 고상한 사람이라….
-원작의 어슴푸레한 판타지가 영화에선 더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가령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소설은 판타지와 현실을 넘나드는 데 있어 자유롭지만 영화에서 판타지를 쓰면 사건이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황석영 선생이 마지막 장면의 판타지를 두드러지게 묘사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내가 그랬다, 아니 그렇게 묘사하지 않으셨냐고. 황 선생 왈, 어사무사하게 그린 거지 자네 것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았다고 그러는 거야. 나도 그랬지. 나도 그만큼만 할 거라고. 사실 고민스럽다. 어떻게 찍어야 하나.
-현우의 후배 영작을 통해 좌와 우 모두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고 읽어야 하나.
=꼭 비판이라기보다는 살펴본다는 게 옳겠다. 그 시대의 삶의 방식, 생각의 방식을 살펴보게 하는 거고 그 살펴보는 게 비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80년대 운동권을 표상하는 영작을 통해 비판보다는 그때 우리네 삶의 모습을 살펴보는 거고 그러다보면 좋은 점도 나오고 나쁜 점도 나오겠지.
-<그때 그사람들> 개봉 뒤 바로 <오래된 정원> 계획을 발표했다.
=1979년 얘기도 잘 받아들여졌으니까 1980년대도 그러지 않을까 했지.
-이 작품을 통해 화해를 이야기하고 싶은 건가.
=화해. 그렇지. 그전까지 내 작품이 가시 같은 면이 있어서 사람에 따라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번엔 위로랄까, 훈훈한 위로를 주고 싶단 생각이….
-원작을 직접 쓰다가 이번엔 각색이다.
=특별히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다. 원작 각색이 쓰기 쉽다. 빨리 다음 작품을 할 수 있고. 서두른 건 계속 작품을 해야 하니까. 늘 다음 밥벌이를 생각하니까.
-어느덧 촬영 막바지다. 홀가분하지는 않나.
=우린 현장에 나오면 행복하게 찍어요. 캐스팅하고 펀딩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벌써 세번째 (<바람난 가족>부터 <오래된 정원>까지 촬영이 모두) 겨울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