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오래된 정원> 갈뫼 현장 [2]
2006-04-19
글 : 이종도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오래된 정원 바깥에서 - 강원도 정선, 기차, 현우

지진희와 염정아가 스탭에게 고기를 산 저녁은 훈훈했다. 스탭들은 다음날 20시간 연속 촬영이 있으니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 심산이었다. 봄날의 폭설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길을 가까스로 달려 자정 무렵 도착하니 한숨이 먼저 나왔다. 촬영이 없으면 기삿거리도 없는 것이니까. 일찍 잘 거라던 감독과 스탭들은 노래방에서 광란이었다. 저 폭설에서 어떻게 봄날을 찍을 수 있단 말인가. 과묵하던 촬영감독의 저 즐거운 광란은 혹시 촬영이 취소됐다는 절망에서 비롯된 것일까.

촬영 취소 통고를 받고 아침에 여관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김우형 촬영감독과 조희진 조감독 등 스탭들은 현장에 나가 희망을 타진했다. 눈이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는데 촬영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도착했다. “3월 막바지라고 해도 강원도에서 봄날장면을 찍는 계획은 위험하지 않았느냐”고 지청구를 넣으니 임 감독 왈, “얼마나 고르고 고른 덴데”라며 웃는다. 오후에 젊은 현우가 갈뫼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외출하는 장면 촬영이 잡혔다. “그렇게 (장면의 이음새가) 팍팍 튀면 어떻게 하냐는 거야. 기차 타는 여정이라도 넣으라는 거지.” 이은수 편집기사의 주문에 급히 넣은 인서트 장면이다.

제정주 제작실장이 정선역장을 급히 찾아 관광열차 안에서의 촬영을 허가받았다. 정선에서 아우라지까지 왕복하며 기차 끝머리에 서 있는 현우를 찍는다. 현우는 갈뫼 바깥의 정치적 풍향을 알아보느라 윤희에게 말도 안 하고 서울에 다녀온다. 현우의 어두운 눈빛에 두 연인의 파국이 어른거린다. 임상수, 김우형, 고낙선은 촬영을 마치고 다음날 촬영 스토리보드를 확정하기 위해 찻집으로 들어갔다. 두 연인의 만남과 이별을 찍는 중요한 촬영이다.

함께 찾는 봄날의 정원 - 강원도 정선, 버스 안∼버스 하차, 현우 & 윤희

미뤄둔 20시간 연속 촬영이 이른 아침부터 재개된다. 현우가 윤희의 아지트로 함께 들어가는 중요한 장면 이전에, 윤희가 현우 면회 가는 장면을 찍는다. 시인 지망생을 악질 정치범으로 만든 저 짐승의 시대가 윤희의 간절한 눈빛을 읽을 수 있을까. 면회는 거절당하지 않을까 싶다. 조희진 조감독이 시골 중년 승객을 맡아달라고 한다. 염정아 뒷자리에서 조는 승객이다. 차창 바깥에 조명을 매달고 80년대식 낡은 버스가 굽이굽이 동강 계곡을 올라간다.

래커차가 버스를 끌고 좁은 시골길을 올라가다 보니 촬영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진다. 조명이 나뭇가지에 걸려 떨어질 뻔했다. 더 낡은 70년대식 버스로 바꿔 더 깊은 산골로 간다. 젊은 현우와 윤희가 서로 탐색전도 벌이고 시대에 대한 생각도 나누는 장면이다. 카메라를 왼쪽 차창에 달았다 오른쪽 차창에 달았다 하느라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간다. 마지막 풀숏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정리한다. 안내양 복장을 한 연출부 김선화가 소형 딱딱이를 치고는 의자 뒤에 숨기고 조는 연기를 한다.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요, 저 운동권 아니에요.” 윤희 말에 현우가 뚱하게 대꾸한다. “누가 물어봤습니까?” 윤희는 “광주에서 있었던 일, 비디오로 봤어요, <NHK>판이요”라며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네시에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제 막 시작될 연인의 봄날을 찍는다. 동강이 아래로 흐르는 갈뫼 어귀에 버스 정류장 표지판을 세웠다. 두 연인이 버스에서 내린다. 벌써 친해졌는지 대파와 자두 등속을 담은 시장 바구니와 가벼운 짐만 들고 윤희가 앞장서고, 현우가 윤희의 이젤이며 화구와 무거운 짐을 뒤뚱거리며 들고선 동네를 휘 한 바퀴 둘러본다. 이제 저들에게 찬란한 봄볕이 내릴 것이다.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들보다 더 질투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오래된 정원을 떠나며 - 강원도 정선, 비 내리는 버스 정류장, 현우 & 윤희

해가 지자 산속이라 쌀쌀해진다. 온통 사위가 새카맣다.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데 갑자기 달이 사방에서 하나둘 뜨기 시작한다. 조명팀이 산속으로, 강둑으로 올라가 인공 달을 친다. 사위가 밝아지니 다리 밑에서 졸던 박쥐들이 기어나와 동강의 수면 위를 미끄러져 다닌다. 조명을 설치하느라 다섯 시간이 지났다. 김우형 촬영감독이 오한을 느끼는 임 감독의 등에 핫팩을 붙여준다.

찍을 분량은 영화 가운데 가장 간절한 장면이다. 조금 전 질투를 우리는 철회해야 한다. 흩뿌리는 밤비를 맞으며 고무신 차림의 윤희가 현우를 떠나보내는 장면이다. 이제 두 연인은 다시는 살아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발전차 세대를 비롯해 스무대가 넘는 차량이 빼곡하게 동네를 메웠다. 일찌감치 온 살수차가 동강에 호스를 댄다. 인공 강우를 피하기 위해 우비를 뒤집어쓴 카메라가 트랙을 따라 비맞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연인을 잡는다. 노란 우산, 노르스름한 불빛 속에 파르르 떠는 연인의 눈빛이 안쓰럽다. 얇은 카디건과 흰 치마, 맨발에 고무신 차림의 윤희가 간절한 눈빛을 보내지만 현우는 마음이 약해질까봐 그 눈빛을 받지 않는다.

덜덜 떨며 염정아가 모니터를 확인하러 왔다. 임 감독이 염정아 앞에 온풍기와 털깔개가 깔린 의자를 내준다. 고무신을 꼼지락거리며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염정아의 젖은 맨발이 눈부시다. 현우는 봤을까. 애인의 젖은 고무신 속에서 애달파하는 마음을. 현우는 그리고 우리는 그 마음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웠는지 17년이 지난 뒤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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