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사생결단> 3인3색 [1] - 김봉석
2006-05-09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바이 준> <후아유>의 최호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사생결단>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보기 드문 힘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마약반 형사 도진광(황정민)과 마약판매상 이상도(류승범)가 서로를 이용하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사생결단>은 친근한 도시 부산을 누아르영화의 낯선 공간으로 옮겨놓았고, 그 비열한 거리에서 살아남으려는 두 남자의 싸움을 집요하게 담아냈다. 이 지독한 이야기를 보고 난 세명의 영화평론가는 자신의 개성과 관심이 드러나는, 세 가지 관점의 평론을 보내왔다. 김봉석은 후카사쿠 긴지를 모범으로 자처한 <사생결단>이 어떤 점에서 후카사쿠 긴지의 <의리없는 전쟁>과 비슷하고 다른지 분석했고, 안시환은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사생결단>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듀나는 자기 세대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두 배우 황정민과 류승범의 연기와 캐릭터를 중심으로 <사생결단>을 관찰했다. 이들의 시선이 <사생결단>의 재미를 더욱 풍성하게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정글이라도 노는 물이 다르다

후카사쿠 긴지의 <의리없는 전쟁>과 비교해 본 <사생결단>

IMF 환란을 알리는 뉴스 화면, 경제 침체와 실업사태 그리고 마약이 창궐한다는 신문 기사, 여전히 흥청거리는 유흥가의 번들거리는 풍경, 암울한 시대와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기록화면을 보여주면서 <사생결단>은 시작한다. 익숙한 광경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한자로 ‘사생결단’이라는 제목이 뜬다. 배우들의 이름은 세로다. 후카사쿠 긴지의 <의리없는 전쟁>의 오프닝이 바로 연상된다. 음악까지도 ‘과거’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맞다. <사생결단>은 <의리없는 전쟁>처럼 끈적한 땀과 비린 피냄새가 진동하는 영화다.

<의리없는 전쟁>은 전후 히로시마에서 벌어지는 야쿠자들의 항쟁을 그린 시리즈물이다. 의협을 중시했던 과거 야쿠자물과는 달리 후카사쿠 긴지는 정글 속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서로 물어뜯는 비열한 야쿠자들의 세계를 그려냈다. 영웅보다는 반영웅, 아니 비참하게 죽어가는 소모품으로서의 야쿠자들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기존과는 다른 표현기법이 필요했다. ‘실록노선’이라는 말처럼, <의리없는 전쟁>은 실제 인물들이 자행했던 피의 역사를 유사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담아낸다. 그 잔혹하고 비정한 세계와 후카사쿠 긴지의 힘차면서도 냉정한 연출은 궁합이 잘 맞았다. 게다가 후카사쿠 긴지는 오락영화를 통해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감독이었다. 미래의 게임처럼 보이는 <배틀로얄>에서도, <의리없는 전쟁>의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사생결단>이 <의리없는 전쟁>에서 영감을 얻었다면, 바로 그런 스타일일 것이다.

형사인 도진광과 마약상인 이상도는 서로를 속고 속이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한다. 그들에게 의리 같은 게 남아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명백한 차이가 있다. <의리없는 전쟁>은 야쿠자들간의 싸움이지만, <사생결단>은 형사와 마약상의 싸움이다. 야쿠자들의 목적은 한결같지만, 형사와 마약상은 다르다. 형사는 그들을 잡아야 하고, 마약상은 빠져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 도진광과 이상도는 애초에 서로 믿을 수 없는 상대방과 협조해야만 한다. 정글에서 살아가는 것은 똑같지만, 힘의 차이가 존재한다. 힘이 조금만 약해지면 물어뜯고, 부상당하거나 발각되면 폐기처분하고, 약점을 잡아 자기가 밟고 올라서려는 것은 정글의 법칙이다. 그러나 형사가 노는 물은, 아무리 담을 타고 다니는 마약수사라 해도, 결국 다른 물이다. 아무리 비정한 척해봐야, 아무리 부패한 척해봐야, 도진광 역시 <공공의 적>의 강철중과 동류의 인간형인 것이다. 이상도 역시 마찬가지다. 도진광이 이상도를 찍은 이유는, 그가 장사꾼이기 때문이다. 약을 팔면서도, 자신은 절대 맞지 않는. 하지만 단지 그것뿐일까? 어머니가 약을 만들다가 폭발해서 죽어간 상처 탓이 아닐까? 약쟁이 외삼촌을 증오하면서, 뽕쟁이들을 모두 혐오했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이상도는,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고 야비해진 인간이다. 그래서 마약중독이 된 지영이를 끌어다가 갱생시키고, 가끔씩 들여다보기도 하는 것이다. 돈을 벌고 싶고, 일인자가 되고 싶다고 해도, 이상도는 절대로 장철이 될 수 없다. 자신의 상처 같은 것은, 과거 같은 것은 말끔히 내버리고 언제나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다니는 것이 정글의 법칙이지만 이상도는 그럴 수 없다. 가족이고 뭐고 다 내버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 끌어안고 빙빙 맴도는 것이 이상도의 내면이다.

<사생결단>은 <의리없는 전쟁>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의리없는 전쟁>이 정글 그 자체라면, <사생결단>은 정글에서 나오고 싶은 이들의 이전투구다. 자신만 빠져나오려다 보니, 배신도 하고 폭력도 쓰는 거다. <사생결단>은 밀려난 막장인생의 처절한 싸움이 아니라, 이미 시작했기 때문에 승부를 봐야 하는 프로페셔널들의 악다구니를 보여준다. 이런저런 이유로 망가지기도 하고, 뒤틀리기도 하지만 결코 자신들의 본분을 잊지 않는. <사생결단>은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도진광과 이상도의 모습을 매끈하게 잡아낸다. 영화 시작에서 말해주듯 <사생결단>은 실제 사건이나 인물을 그리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철저하게 허구인 픽션이다. IMF 환란 직후에 있었을 법한 사건들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사생결단>의 도진광과 이상도는 어쨌거나 멋진 반영웅이다. 아무리 거지 같더라도, 아무리 추잡해도, 그들이 정한 룰과 정의를 지키는 법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비열함의 끝을 보여주기에는, <사생결단>은 너무 멋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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