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사생결단> 3인3색 [3] - 안시환
2006-05-09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장르와 시대정신의 호흡을 보여주다

IMF의 징후로 살펴본 <사생결단>

<사생결단>은 그 시작과 함께 ‘IMF 직후’를 배경으로 한 허구적 창작물임을 자막으로 제시한다. 이를 징후적으로 읽는다면 두 측면에서 접근 가능한데, 하나는 IMF 전후로 본격화된 현재의 한국영화의 특징과 관련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전자와 관련하여) 장르영화의 힘이 IMF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한국사회의 공기를 담아내는 방식에 대해서이다.

이를 거론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그려볼 필요가 있다. 1987년 무렵 발생한 ‘코리안 뉴웨이브’는 광주항쟁에 의해 촉발된 시대정신을 ‘리얼리즘’의 형식 속에 새기려는 시도였다. 물론 이들 영화에 내재된 한계와 그에 따른 가치판단의 분지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대중오락에 머물던 한국영화를 시대정신과 맞닿게 하려는 야심찬 시도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IMF를 전후로 리얼리즘적 양식은 장르적 상상력을 앞세운 영화들로 본격적으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현실이라는 대전제 앞에서 구속될 수밖에 없는 리얼리즘은 좀더 자유로운 상상력을 추구하려는 현재의 영화 풍토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었고, 장르적 상상력에 의한 표현 범위의 확장은 표면적으로 한국영화의 성장과 동궤를 그리고 있다.

<사생결단>이 IMF를 전후로 형성된 새로운 한국영화의 징후라는 점은 무엇보다 부산이라는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영화 속 부산 곳곳의 풍경(더불어 마약과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에는 발로 뛰며 취재한 땀냄새가 진하게 풍기지만, 그 르포타주와 같은 생생한 현장감은 장르의 스타일 속에 내화되고 있다. 즉, 부산이라는 공간의 리얼리즘(그리고 마약에 얽힌 사건의 사실성)이 돋보인다고 하더라도, 이는 궁극적으로 누아르라는 장르의 특징을 부각하는 데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르적 특징이 리얼리즘을 흡수한 <사생결단>의 이러한 특징은 한국사회의 근대화에 대한 비판 의식을 누아르의 컨벤션 속에서 풀어낸 <초록물고기>와 비교했을 때 더 강화된 것처럼 보인다. <사생결단>은 공간의 리얼리즘이 장르 속에 용해되면서 부산만의 지역적 정서를 구현했는지는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만, IMF 이후의 한국사회의 한 시대와 호흡하려는 태도는 기존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표현할 수 있는 장르영화의 가능성을 내비친다.

<사생결단>은 <야수>가 지나친 직접화법으로 장르영화의 리듬을 잃었던 우를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장르적으로 익숙한 인물을 더 극단적으로 설정하여 IMF가 한국사회에 남긴 흔적을 포착하려 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IMF라는 사건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영화 시작의 자막과 신문 기사의 몽타주 장면 등에 머물며, 인물들은 IMF라는 사건을 직접적으로 의식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비정(非情) 그 자체로 치닫는 도 경장(황정민)과 이상도(류승범)의 일련의 행위들, 즉 상대방의 발목을 향해 놓았던 덫이 이내 자신의 숨통을 조르게 되는 사건의 전개 과정은 부산이라는 공간이 아닌 ‘IMF 직후’라는 시간 속에서야 설명 가능한 것이 된다.

최호 감독은 제3의 주인공이 부산이라 했지만, 내게는 ‘IMF 직후’라는 내러티브의 보이지 않는 누빔점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사생결단>은 그 원인을 충분히 구축한 이후 인물들의 동기화된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행위 자체를 통해 인물을 그려나가는 작품이다. IMF가 남긴 상흔 속에서 살면서 이를 지각하지 못하는 자들과 유사한 도 경장과 이상도는 자신들도 그 이유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행위 속에서 ‘IMF형 한국인’의 욕망의 지형도를 무의식적으로 제시한다. 장르적 인물과 유사하면서도 그 전형성으로 환원되는 것을 막아주는 끔찍한 욕망의 잉여물은 공간의 리얼리즘이 사라진 자리에서 장르영화가 ‘실재적(혹은 욕망의) 리얼리즘’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실재적 리얼리즘에 대해서는 <영화연구 27>의 김소연의 글을 보라). 이러한 면에서 <사생결단>은 장르적 상상력이 한국사회와 어떻게 호흡할 수 있는지를 뚝심있게 보여준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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