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적 똥폼을 깨버리다
배우의 이미지와 연기를 중심으로 본 <사생결단>
모든 것들은 <첩혈쌍웅>에서 시작되었다. 이전에 남성 중심의 버디영화나 안티-버디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한국 관객이나 감독들의 머릿속에 고정되어 있는 ‘버디영화’의 이미지는 대부분 <첩혈쌍웅>에서 나온 것이다. 궁금하면 최근에 나온 곽경택의 <태풍>을 보라. 이정재의 ‘어머니, 만약 다음 세상에서 또 그를 만난다면’ 어쩌고 하는 들쩍지근한 대사가 어디에서 왔겠는가.
<첩혈쌍웅>은 하나의 장르를 완성하는 훌륭한 영화였지만 그 영화가 끼친 부작용은 간과하기 어렵다. 과대포장된 남성 가치, 거의 보는 사람의 위장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느끼한 감상주의, 구제불능의 나르시시즘 같은 뻔한 단점들은 아무런 필터를 통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서 모방됐다. <태풍>은 그 뻔한 예들 중 가장 다루기 쉬운 영화일 뿐이다.
<사생결단>이 거둔 가장 흥미로운 성취는 버디영화 또는 비틀린 버디영화라는 설정 속에서 두 남성 스타를 다루는 방법에 있다. 물론 그 전환 과정 자체는 간단하다. <사생결단>은 80년대 홍콩 누아르를 흉내내는 대신 70년대 일본 야쿠자영화를 베꼈다(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영화의 홍보물은 왜 그렇게 목숨 걸고 후카사쿠 긴지의 이름을 들먹이는 건가? 정 걸린다면 감독이 예의상 인터뷰에서 밝히면 된다. 나머지는 다른 영화 제목 들먹이는 게 직업인 평론가들이 할 일이다).
영화가 무엇을 흉내냈건, 영화 속에 나오는 두 남자의 역학 관계는 확실히 신선한 맛이 난다. <사생결단>에는 <태풍>이 가졌던 노골적인 단점들이 부작용없이 거의 완벽하게 제거된다. 미쳐 날뛰는 수컷들의 세계를 그리면서도 미화나 자화자찬이 없고 그들의 관계를 감상주의로 도배하는 구석도 없다. 웃기는 건 그게 가장 당연한 묘사라는 것이다. 여기에 미화가 끼어든다면 그거야말로 웃기는 거짓말이다. 그리고 남성 투톱을 내세운 한국 액션영화에서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게 많았다.
류승범과 황정민이라는 캐스팅부터 영화는 규칙을 위반한다. 일반적인 한국영화에서 남성 중심 투톱 영화를 찍을 때 마초적 폼의 균형은 중요하다. <태풍>에서처럼 장동건과 이정재가 극악의 똥폼을 잡는 건 당연히 허용된다. 그중 한명이 날것이고 작정한 루저라면? 다른 인물이 의무적으로 모자라는 폼을 보완해야 한다. <주먹이 운다>에서처럼 좀더 은밀한 방식으로 그 균형이 통제되는 영화들도 있지만, 이 규칙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
<사생결단>에서는 그 규칙이 거의 완벽하게 깨진다. 류승범과 황정민은 모두 번지르르한 이미지의 배우가 아니고 폼의 대가들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연기는 모두 날것이다. 그들은 천박하고 별 볼일없는 인간들을 천박하고 별 볼일없어 보이게 연기한다. 폼은 물론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폼을 잡는 게 아니라 폼을 잡는 인간들을 연기한다. 배우들의 연기가 관객의 망막까지 전달되는 동안 캐릭터들의 ‘폼’은 그들이 ‘폼’을 내지를 때와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여기서 더 재미있는 것은, <사생결단>이라는 영화가 그 형식적인 폼이 파괴되어 캐릭터들이 보호받을 구석이 없을수록 더 잘 풀린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악질 형사라도 어느 정도 폼이 달라붙는 대의명분을 가진 도 경장 역의 황정민보다 감출 것 없고 얄팍하기 그지없는 마약중개상 상도 역의 류승범쪽이 더 고기가 많은 덩어리를 챙긴다.
그건 왜인가? 폼이란 기본적으로 불필요한 자기변명이고 필터이다. 상도와 같은 날캐릭터는 거의 원초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초적인 쾌락에 지배되는데, 이 캐릭터의 직설적인 쾌락주의는 폼이 제거될수록 더 쉽게 관객에게 와닿는다. <사생결단>의 배우들이 관객에게 어필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건 그들이 무언가 거창한 주제를 위해 봉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직설적인 태도 때문이다. 영화가 하려는 말이 무엇이건, 한마디로 더 후련하고 재미있는 영화가 되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