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강우석 감독은 <한반도>의 편집을 마쳤다. 그는 예의 습관대로 가까운 이들을 불러 이 거친 편집본을 보여줬고, 이런저런 반응을 접수했다. 그렇게 편집본을 본 이들 중에는 “역시 강우석 영화답게 호쾌하다”며 칭찬하는 쪽이 있는 반면, “너무 국수주의적 냄새가 난다”고 우려하는 쪽도 있지만, 10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대작이란 점과 최근 일본의 독도 탐사계획으로 갈등이 불거지고 있는 한·일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 등으로 미뤄볼 때, 7월 이 영화가 개봉되면 뜨거운 화제를 몰고 올 것이란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사실, <한반도>는 지난 2월 중순 영화주간지 3곳에만 은밀히 현장을 공개했다. 강우석 감독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이 두 차례의 현장공개는 불행히도 영화 자체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시나리오를 본 적도, 편집본 ‘시사회’에 참여하지도 못한 터, 잠깐의 방문으로 어찌 <한반도>의 실체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현장 방문에는 다른 소득이 있었다.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던 그의 현장을 지근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 52회의 촬영으로 이 대작을 마무리한 강우석 감독의 능숙한 현장 연출법을 들여다본다.
아주 짧긴 했지만 충무로의 현장 스탭으로 일하던 때의 일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촬영은 엿가락 늘어지듯 지연되고 있었다. 그때 동시녹음팀 스탭이 슬쩍 오더니 말을 꺼냈다. “이거 너무하지 않아요? <공공의 적> 찍을 때는 매일 네다섯시면 끝났는데.” 뭐라고? 설마. “에이, 새벽 네다섯시겠지”라고 묻자, 그는 “아녜요. 그땐 정말 아침 일찍 촬영을 시작해서 그때면 끝났어요. 낮 한두시에 끝날 때도 있었는데요”라고 답했다. 그 친구에 따르면, <공공의 적>팀은 낮촬영은 물론이고 밤촬영 때도 네다섯시간 안에 일을 모두 끝냈다는 거다. 그는 이어서 강우석 감독의 현장은 항상 그렇게 정해진 분량을 빨리 마친다고 했다. 얼마간의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밤촬영이란 곧 해뜰 때까지 촬영한다는 것을 의미했던 이쪽 현장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분위기였다. 그 뒤로 강우석 감독의 현장은 일종의 유토피아로 마음속에 각인됐다. 지난 2월 홍보사에서 <한반도> 현장 취재를 제의했을 때 성큼 응했던 것은 영화 자체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강우석 감독의 현장 진행술을 두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필’ 받았을 때를 놓치지 않는다
지난 2월16일 오전 8시30분 파주 아트서비스 세트장의 C 스튜디오, <한반도>의 41회차 촬영은 이미 시작돼 있었다. ‘스탭들의 낙원’이라는 선입견에 비해 촬영장은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2005년 10월1일 촬영을 시작한 뒤 현장에서 넉달째를 맞는 스탭들의 표정이 밝을 리야 없겠지만, 이상스레 팽팽한 긴장감이 구경꾼의 마음까지 부담을 느끼게 했다. 강우석 감독의 표정은 사석에서와 달리 각이 꽉 잡힌 채 굳어 있다. 현장의 분위기는 대체로 감독 아니면 주연배우가 좌우한다. 감독과 주연배우가 웃으면 스탭들의 마음은 환해지고, 그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 스탭들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죄스런 마음을 갖게 된다. 심각하기까지 한 그의 표정으로 미뤄볼 때 이날 현장의 썰렁한 분위기는 강우석 감독이 만들어낸 게 틀림없었다. “이번만큼 현장이 힘든 적은 없어. 매일같이 시나리오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얘기는 좀 있다가 해.” 예의 속사포처럼 말을 던진 뒤 총총히 배우들 틈으로 사라지는 강우석 감독의 모습은 그런 심증을 확인해준다.
이날 오전 촬영분은 국가정보원의 특수차량에 탄 주인공 민재(조재현)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장면이다. 이런저런 정보를 긁어모아볼 때 <한반도>는 대충 이런 내용이다. 근미래의 어느 시점, 남북관계가 급격히 호전되고 마침내 경의선 철도의 개통을 앞두게 된다. 하지만 갑자기 일본은 경의선이 자기들 소유라는 뜬금없는 주장을 편다. 일본이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고종황제의 국새가 찍혀 있는 문서다. 이로 인해 남북과 일본 사이에 정치적인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대통령(안성기)과 국무총리(문성근)의 입장은 갈린다. 대통령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민족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총리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주의적 태도를 고수한다. 이 와중, 일본이 내세우는 문서에 찍힌 국새가 위조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평생을 조선 국새를 찾아 헤매왔던 민재(조재현)는 이제 자신의 일이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오는 핵심적인 일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도굴꾼 유식(강신일)과 함께 국새 발굴에 힘을 기울이고, 총리의 지시를 받는 요원 상현(차인표)은 그의 일을 방해한다. 그 밖에 지엽적인 정보가 더 있다면 한국 해군과 일본 자위대가 해상에서 일촉즉발의 상황을 연출한다는 점,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의 시해와 고종 암살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는 사실 정도다. 전화통화를 하는 민재의 눈이 이글거리고 말투에 분이 어린 것으로 미뤄볼 때, 그는 아마도 국무총리쪽의 누군가와 국새의 행방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듯했다.
조재현 곁에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던 강우석 감독이 모니터쪽으로 걸어오면서 “슛 테스트!”라고 외친다. 그런데 이상하다. 모니터 앞에 놓여있는 의자가 덜렁 한개뿐이다. 촬영된 장면을 보며 논의하기 위해 모니터 앞에 감독을 비롯해 주연배우, 프로듀서, 촬영감독, 조명감독, 미술감독 등 주요 제작진의 의자가 놓여 있는 대다수의 다른 촬영장과 달리 여긴 강우석 감독의 의자밖에 없다. 그가 현장에서 모니터를 ‘독점’하는 이유는 모니터 앞을 “감독만의 은밀한 공간”으로 간주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집중력있는 연기를 뽑아내기 위해서다. “나는 연기자들이 스스로 어떻게 찍히는지 모른 채 몰두해줘야 좋은 화면이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모니터를 보며 연기를 논하는 순간 긴장이 깨진다고 보거든.” 다시 말해 연기자들이 ‘필’을 받았을 때를 놓치지 않고 몰아치듯 찍는다는 얘기다. 한창 집중이 됐을 때 모니터를 보고 대화를 나누고 하면 호흡이 끊어진다는 게 강우석 감독의 소신이다. 순간순간 죽죽 치고나가다 보니 촬영이 빨리 진행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강 감독 현장에 처음 결합한 조재현은 촬영 초반 자신의 연기를 확인하기 위해 당연한 듯 모니터쪽으로 갔지만, “너 뭐 보려고 하냐”는 강우석 감독의 핀잔만 들었다고 한다.
‘예상대로’ 끝내려면 ‘예정대로’ 시작해야 한다
오후가 되자 국정원 상황실 세트가 만들어져 있는 A 스튜디오로 자리를 옮겨 촬영이 이어졌다. 140평 짜리 세트를 둘러보는 모든 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화려하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상황실의 곳곳에선 정교한 손길이 느껴졌다. 세트 제작비만 2억원, 곳곳에 자리한 70여대의 모니터 등 협찬 물품까지 치면 3억원이 넘는다는 이 세트는, 그러나 이날 촬영만 마치면 산산이 부서져야 한다. 수억원씩 들어간 다른 세트들도 하루 또는 이틀 촬영 뒤엔 사라졌다 하고, 미술에 들어간 제작비만 20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강우석 감독답지 않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동안 그의 영화는 ‘때깔’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줬다. “다들 내 영화는 촌스럽고 때깔이 나쁘다고 말하는데 그렇다고 관객이 영화를 지루해하던가? 내 촬영이 빠른 또 다른 이유는 미술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 덕분이라고.” 하지만 <한반도>에서 강 감독의 노선은 180도 수정됐다. “미술팀은 <공공의 적2> 때 뭔가 성에 차게 만들지 못하게 하는 점 때문에 답답해했다. 그런데 이번에 강 감독님이 먼저 나서서 세트를 좀더 크고, 좀더 정교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오히려 당황하더라”고 정선영 프로듀서는 설명한다. 강 감독은 “그저 때깔 좋게 찍자는 게 아니라 이번 영화의 공간은 일상 공간이 아니라 청와대, 국정원, 구축함 내부, 이런 곳이니 미술에 신경을 안 쓸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 50여회만 촬영했는데도 전체 촬영기간이 6개월에 달한 것은 군 협조를 받는 해상, 공중신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대형 세트를 짓고 부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오후 촬영은 비상회의를 열기 위해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 각료들이 상황실로 들어오는 모습으로 시작됐다. 건물 입구쪽에선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인데 세트장 다른 편이 어수선하다. 알고 보니 조감독이 보조연기자 수십명을 데리고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카메라 한대도 이쪽에서 조명과 함께 세팅 중이었다. 한 세트장 안에서도 촬영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게 하려는 강우석 감독의 ‘수법’임에 분명했다. 오전의 다소 처져 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스탭들은 이곳저곳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날 일찍 끝나서 쉴 수 있으니까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 아닐까?”라고 강우석 감독은 말한다. 그는 오랫동안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정말 집중적으로 일하고 쉬어야 다음날 능률이 있다는 생각이다. 매일 4∼5시면 무조건 끝나니까 심지어 파주에서 촬영하는 동안 스탭들은 일산에 있는 영어학원을 다니겠다고까지 말했다.”
촬영이 일찍 끝나려면 시작부터 예정대로 돼야 한다. “촬영이 8시부터 잡혀 있으면, 나는 7시까지 세트장 내 사무실에 나가서 이것저것 정리를 한다. 그러곤 시간이 돼서 현장으로 내려가면 2∼3분 안에 카메라를 돌리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는 이한위는 감독이 현장에 온 지 1∼2시간 뒤 촬영이 시작되는 전례에 맞춰 한가하게 있다가 현장에 도착한 지 2분 만에 외치는 강 감독의 슛 사인에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쌀쌀한 바깥에 비해 꽉 들어찬 조명으로 따뜻하니 졸음도 솔솔 밀려온다. 달싹거리는 눈꺼풀과 전쟁을 벌일 무렵, 제작진은 이날 촬영을 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