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강우석의 <한반도> 촬영현장 [2]
2006-05-18
글 : 문석
사진 : 오계옥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성에 차지 않는 연기, 갈데까지 몰고간다

2월20일 밤에 찾은 영종도 인근의 건재업체에서는 야간 촬영이 얼추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날 촬영분은 국새를 찾아낸 민재와 유식을 상현이 납치해오는 대목. 상현과 민재의 폭발적인 감정 대립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될 것이다. 이 밤 안에 60컷을 모두 찍어야 한다는 강우석 감독의 표정은 더욱 긴장돼 있었다.

야간 촬영인 탓에 조명세팅에 넉넉한 시간이 필요한 상황. 하지만 강우석 감독은 연신 채찍을 휘둘렀다. 그는 조명팀 스탭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빤히 보면서도 “자, 슛 테스트!”라고 외쳤다. 의자 앞쪽 끝에 엉덩이만 간신히 걸치고 언제든 벌떡 일어날 준비를 한 채 앉아 있는 모습이나 의자까지 가는 몇초가 아까워 걸어가면서 “자, 슛 가자!”라고 외치는 모습만 봐도 그의 성질이 꽤나 급하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성마르기로서니 뭐 빠져라 조명기를 들고 뛰는 스탭들을 보면서 닦달을 하다니.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좋게 보면 몰두하는 거고, 나쁘게 보면 남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거지.” 강 감독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의 성미는 거의 불치 수준이란 얘기 아닐까. 어쨌거나, 그의 독촉은 현장에서 확실히 약발을 발휘하는 듯 보였다. 이 카리스마 넘치는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지면, 스탭들의 뜀박질 속도는 확실히 110% 빨라졌다.

촬영준비가 끝나자 강 감독이 “슈웃”이라고 외친다. 주로 민재와 상현, 그러니까 조재현과 차인표가 격앙된 감정으로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으로 이뤄진 이번 밤촬영은 순조롭게 시작했다. 다양한 앵글로 두 사람의 대립을 잡아가던 강우석 감독은 배우들에게 소소한 주문만 했고, 대개 2∼3테이크 만에 시원시원하게 오케이 사인을 냈다. 충무로에 흔히 나도는 소문, 즉 ‘강우석 감독은 대충대충 영화를 찍어서 편집으로 승부를 본다’는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무렵, 그의 인상이 찌푸려지기 시작한다. 그건 새벽이 되도록 수시로 오가는 비행기의 굉음 때문이 아니었다. “아냐, 아냐. 재현이, 그것보다는 조금 분명한 톤으로 할 수는 없나?”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연기파로 소문난 조재현이 마지막 대사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조재현이 대사를 살짝 씹거나 말이 꼬이거나 대사를 잇지 못한 탓도 있지만, 강 감독은 미묘한 톤과 높낮이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테이크를 반복했다. 조재현의 연기는 결국 13번째 테이크에 가서야 감독을 만족시켰다.

강우석 감독의 집요함은 차인표의 연기 때 더욱 극명히 드러났다. “지금 대한제국의 국새가 나타난다는 게 무슨 의민지, 어떻게 될지, 이 땅이 처한 위기가 뭔지…”라는 대사를 해야 했던 차인표는 여러 차례 실수를 저질렀다. 사실 차인표가 NG를 내게 된 결정적 이유는 강 감독이 제공했다. 이 장면에서 차인표는 애초 코트를 걸치도록 돼 있었으나, 촬영 직전 강 감독이 코트를 벗고 연기하라고 한 것. 처음부터 양복 차림이라고 생각했다면 내복이나 잠수 슈트를 입었을 터지만, 준비가 안 된 상태라 그는 매우 추워 보였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 감독은 연신 그의 연기를 지적하면서 “컷!”을 외쳤다. 10테이크가 넘어가자 그도 미안했는지 “인표, 미안한데 한번만 더 가자”라고 말했지만, 연기에 대한 요구 수위까지 낮아진 것은 아니었다. “톤이 너무 높다”, “‘이 땅이 처한 위기가 뭔지’에서 ‘뭔지’의 톤이 너무 처진다” 등등 주문은 계속됐다. 추위를 억지로 참는 기색이 역력한 차인표는 감독의 지적에 성실하게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를 반복했다. 마침내 20번째 테이크. 좋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감독 입에서 ‘오케이’란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강 감독이 말한다. “음, 거의 오케이야. 근데 대사 시작 부분이 안 좋아.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가자.” 결국 그 다음 테이크에서 오케이가 났지만, 돌아서는 강 감독의 모습은 무척 독해 보였다.

정선영 프로듀서는 “감독님은 설렁설렁 찍는 것 같지만, 드라마 부분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게 나오지 않으면, 나올 때까지 카메라를 돌린다”고 말한다. 최영택 촬영감독도 “마구잡이식으로 빨리만 찍는다는 소문을 들으며 참여했는데, 안 좋은 컷은 50번 이상도 찍는다”고 설명한다. 강우석 감독은 “이번만 그런 게 아니다. 연기 잘한다는 설경구 같은 친구도 열대여섯컷 넘기기가 일쑤였고, 정준호도 ‘빨리 찍는다더니 소소한 잘못에도 다시 가곤 한다’고 말하더라. 차인표가 춥고 떠는 것은 알지만 연기만큼은 내 성에 차지 않는 꼴은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빠른 스피드는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새벽녘 이런저런 사정으로 촬영이 늘어지자 강우석 감독이 최영택 촬영기사에게 한마디 건넨다. “이거 하루 안에 다 찍는 건 약간 무리였나봐. 근데 이창동 감독이 찍었으면 한 20일 나오겠는데.” 그러자 최영택 기사가 맞받아친다. “이창동 감독님이면 20일하고 보충촬영 2번 나오죠.” 사실, 내심 생각했던 이 현장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강우석 감독과 최영택 기사의 호흡이었다. 그동안 강우석 감독은 손발이 잘 맞는 김성복 촬영기사와 작업해왔다. 하지만, 김 기사가 스케줄상 이 영화에 참여할 수 없게 되자, 강 감독은 젊은 감독을 물색했고 결국 자원한 최영택 기사를 낙점했다. 그런데 최영택 기사가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과 <생활의 발견>,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 등을 촬영했다는 점만 생각해봐도 두 사람의 조합은 뜨악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조명을 꼼꼼하게 설계하기로 잘 알려진 최 기사이다 보니 쏜살같이 현장을 진행하는 강우석 감독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주변에서 다 만류했지만, 내가 참여해서 강우석 감독님의 영화가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초반 3회를 찍고 좌절했다. 감독님은 내가 뭔가 세팅할 새도 없이 쉴새없이 몰아쳤다. 그런데 10회 정도 찍고나니 이게 단순히 빨리 찍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집중력있게 일하기 위한 일임을 알게 됐다. 그 뒤로는 내가 맞춰줘야겠다라고 마음을 먹었다.” 최영택 기사가 선택한 방법은 사전준비와 물량공세였다. 그는 촬영 전날 현장을 찾아가 미리 조명을 세팅했다. 그뿐 아니라 앵글이 돌아갈 수 있는 모든 곳에 조명을 꼼꼼히 설치했다. 밤을 새워 조명세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 조명기기가 훨씬 더 많이 필요했다. 최영택 기사는 “그래도 이 상황을 이해해주고 조명장비를 많이 빌리게 해준 정선영 프로듀서가 정말 고맙다”고 말한다. 강우석 감독은 “내심 걱정은 했는데 함께해보니까 너무 잘하더라. 우선 성실하고 머리도 좋다. 이후에도 같이 일하고 싶다”고 평한다.

숙련된 장인의 민족적 상상력, <한반도>다

결국 이날 촬영은 <한반도> 촬영을 시작한 이래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늦게까지 찍은 회차라는 기록을 남긴 채 새벽 4시30분쯤 끝났다. 이틀이라는 짧디짧은 현장 취재도 끝이 난 것이다. 결론? ‘스탭들의 유토피아’까지는 아니더라도 강우석 감독의 현장은 꽤나 합리적이고 조직적이었다는 사실 정도? 정확한 시간 엄수, 집중력있는 현장 진행, 끊임없는 독려 등 그의 촬영현장에서 볼 수 있었던 덕목은, 사실 누구에게나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1988년 <달콤한 신부들>로 데뷔한 이래 16편째 작품을 만들고 있는 그의 경력과 노하우가 없었다면 이런 덕목은 현실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현장에서 그의 모습은 높은 숙련도로 무장된 장인의 그것이었다. 물론, 장인의 영화라고 무조건 좋으리란 법은 없다. 강우석 감독 스스로는 <한반도>에 대해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 욕할 수는 있을지언정, 만듦새를 갖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이 순간, 최소한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욕할 수 있을지언정, 현장의 지휘자로서 강우석 감독을 갖고 왈가왈부할 수 없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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