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출신의 커리어 우먼 케이트(프랑카 포텐테)는 추근대는 남자들로 가득한 파티장을 떠나 튜브(런던의 지하철)를 탄다. 낡고 더러운 지하철을 불평하며 플랫폼에 도착한 그는 깜빡 잠이 들고, 깨어난 그는 마지막 지하철이 이미 떠나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출입구가 모조리 잠겨버린 아무도 없는 지하철역. 이제 케이트는 희멀겋고 인간형 육식 생물체의 눈을 피해 다음날 아침까지 살아남아야만 한다.
<크립>은 폐쇄된 공간에 주인공을 몰아넣고 관객에게 게임을 제안하는 전통적인 공포영화다. 만들어진지 100년이 넘은 런던의 지하철은 근사한 게임의 무대를 제공해 주고, 얽히고 섥힌 무대에서 주인공을 사냥하는 ‘골룸형’ 괴물의 행태는 꽤나 혐오스럽다. 하지만 <크립>이 쓸만한 무대와 설정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최대한의 서스펜스를 일으켜야 할 장면들에서 편집과 연출의 호흡이 종종 엇나가기 때문이다. 공포영화 마니아들이라면 생각만큼 고어 장면들이 강렬하지는 않다는 사실에 불만을 토로할 법도 하다.
주연인 케이트는 <롤라 런>(1998)과 <본 아이덴티티>(2002)로 국제적 스타로 떠오른 독일 여배우 프랭카 포텐테가 연기한다. 영국의 오랜 유럽 혐오증과 유럽의 오랜 영국 혐오증을 떠올려본다면 이는 꽤 흥미진진한 구석이 있는 캐스팅이다. 깔끔떠는 독일인을 지저분하고 낡은 영국의 지하철에 가둬놓고 죽도록 고생시키는 영화이니 말이다. 하지만 각본은 포텐테로 하여금 끊임없이 쇳소리를 내지르며 뛰어다니게 만드는데 만족한다. 참을성 없는 관객들이라면 ‘저 거슬리는 여자 주인공을 얼른 찢어발기라’며 소리를 지르고 싶은 순간을 몇번 참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개봉일은 5월31일.
<크립> 100자평
문명의 이기이면서도,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아내는 지하철의 느낌을 잘 살려냈다. 특히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살인귀와 피해자의 일반적인 공식을 흔들어 놓으면서도, 공포의 느낌을 잘 살려냈다. 저예산의 공포영화가, 어떻게 관객과의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 수작. -김봉석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