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브라이언 싱어와 <수퍼맨 리턴즈> [1]
2006-07-04
글 : 김혜리

<데일리 플래닛> 기자 로이스 레인은 “왜 우리는 슈퍼맨이 더이상 필요없는가?”라는 기사로 퓰리처상을 수상했지만, 적어도 할리우드는 그녀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2001년 이래 최악의 시황(전미 박스오피스 36억달러)을 지난해 여름 성수기에 경험한 할리우드는,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 스크린으로 돌아오는 철의 사나이와 브라이언 싱어 감독에게 마천루보다 높은 기대를 걸어왔다. 평단과 관객은 <엑스맨> 시리즈를 명품으로 만든 브라이언 싱어가 ‘완전무결해서 진부한’ 미국적 영웅 슈퍼맨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 우려했고, 오리지널 <슈퍼맨>의 열렬한 팬들은 혹시 그들의 우상이 변질될까봐 마음을 졸였다.

6월28일 개봉을 앞두고 공개된 <수퍼맨 리턴즈>는 21세기 대중영화의 고전으로 꼽힐 만한 풍모를 드러냈다. 총명한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인용이나 자조를 일삼으며 포스트 모더니스트의 흉내를 내거나, 실존적 고민에 빠진 배트맨과 엑스맨의 포즈를 슈퍼맨에게 강요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대신, 강하고 고독한 초인이라는 슈퍼맨의 태생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대중영화의 테크놀로지와 미학이 어떻게 현대인의 신화를 쓸 수 있는지 한 방법을 예증한다. 이제 <수퍼맨 리턴즈>가 제기하는 가장 솔깃한 화제는 2억5천만달러를 상회하는 사상 최고의 제작비가 아니라 브라이언 싱어가 지닌 재능의 폭에 대한 토론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여기서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영화세계를 신작 <수퍼맨 리턴즈>의 실체와 더불어 소개하기로 한 까닭이다. 지난 6월9일 LA 하얏트 리젠시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서 워너브러더스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라운드 테이블 인터뷰는 <수퍼맨 리턴즈>의 감독, 작가, 배우의 육성을 함께 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차마 연인에게 작별 인사도 못하고 고난의 여행을 떠났던 남자가 살아 돌아온다. 그러나 다섯살짜리 아들의 엄마로 변한 사랑하는 여자는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는 다른 남자와 한집에 살고 있다. 단란한 가족의 정경을 숨죽여 바라보던 남자는 말없이 발길을 돌린다. 테니슨의 시 <이녹 아든>과 똑같은 이야기지만, 이 경우는 남자가 창밖 허공에 떠올라 벽 너머 대화를 보고 듣는다는 점이 약간 다르다. 뭇사람들이 아는 그의 이름은 슈퍼맨(브랜든 라우스). 일명 클라크 켄트 혹은 칼 엘이다. 브라이언 싱어(40) 감독의 <수퍼맨 리턴즈>는 초인의 멜로드라마다. 클라크가 엘리베이터에 오른 로이스(케이트 보스워스)의 얼굴을 몇초라도 더 보고 싶어할 때 철문은 우리의 시선을 통과시킨다. 돌아온 슈퍼맨의 초능력은 무기일 뿐 아니라 감정의 하인이다. 한때 게이 잡지 <애드버킷>은 게이 감독 브라이언 싱어의 슈퍼맨이- 속눈썹이 예쁘고 이중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게이 아이콘이 되지 않을까 예측했으나, 결과적으로 새로운 슈퍼맨은 여성 관객이 꿈꾸는 남자친구에 가까운 캐릭터로 판명됐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슈퍼맨은 연약한 모습으로 영화에 처음 등장한다. 켄트 농장에 다시 착륙한 그는 늙은 어머니의 품 안에 쓰러진다. 아틀라스처럼 땅덩이를 들어올려 재앙을 막은 그는 탈진하여 한잎의 낙엽처럼 우주의 검은 어둠 속으로 느리게 추락한다. <엑스맨>의 팬이라면 강력한 자기장을 생성한 매그니토가 기진한 몸을 떨어뜨리던 장면을 추억할 것이다. 인간 혹은 초인들이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겪는 고난은 언제나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주요 관심사다. <엑스맨> 연작에서 시각적 특수효과의 다수가 육체의 변형 및 변질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되는 점은 특기할 할만하다. 동시에 <수퍼맨 리턴즈>는 아무리 인간적이라고 해도 슈퍼맨이 영원히 인간과 다른 존재임을 인지한다. 그에게 능력은 저주는 아닐지언정 숙명이다. “세상도 나도 구세주는 필요없다”고 쏘아붙이는 로이스를 데리고 슈퍼맨은 지구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날아오른다. 세계 곳곳 무수한 인간들의 신음이 뒤섞여 먼 시냇물 소리처럼 들려온다. 그는 변명한다. “사람들은 더이상 영웅이 필요없다지만 내겐 매일 영웅을 찾는 절규가 들려요.” 이것은 완전무결하고 모호한 구석이라곤 없는 주류 영웅을 지금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에 대한,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영리한 답이기도 하다.

독창적인 액션과 생동하는 심리, 유창한 시각적 화술로 <엑스맨> 시리즈의 브랜드 가치를 높인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더 큰 물적 지원을 업은 <수퍼맨 리턴즈>에서 원없이 재주를 펼친다. <유주얼 서스펙트>와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의 브라이언 싱어가 만화 원작 여름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의아했던 이들이 <엑스맨> 1, 2편을 본 뒤 설복당했듯, <엑스맨> 시리즈를 브렛 래트너의 현관 앞에 내버리고 싱어가 주류 미국사회의 이상적 영웅 전설에 가담했다는 뉴스에 눈썹을 추켜올렸던 사람들은 <수퍼맨 리턴즈>를 보고 납득할 것이다. 브라이언 싱어의 우주는 야금야금 팽창하고 있다.

루카스나 스필버그가 되고 싶었던 소년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을 통해 한 남자가 마을의 비밀을 들쑤시는 사건을 그린 브라이언 싱어의 장편 데뷔작 <퍼블릭 액세스>는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작을 탔다. ‘선댄스 키드’가 되기 전 싱어는 USC 영화학교 연출 과정에 입학을 거절당하고 영화학 전공으로 편입한 덕택에, 무수한 영화를 볼 수 있었던 학생이었고,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스타트랙> 방영 내내 스피커폰을 켜놓고 친구와 전화로 주석을 다는 고교생이었다. 소년은 가능하다면, 조지 루카스나 스티븐 스필버그가 되고 싶었다. 영화 만드는 일 외에 다른 일은 안 하고 살 방법이 없을까 궁리했다. “(감독이 알아야 할) 모든 비밀은 오리지널 <스타트랙> 시리즈와 <죠스>에 있다. 나는 그 작품들로부터 시각적 스토리텔링, 신화, 윤리적 딜레마, 정의와 사랑, 삶과 죽음을 배웠다”고 싱어는 요즘도 공언한다.

<유주얼 서스펙트>
<엑스맨>

그의 두 번째 장편 <유주얼 서스펙트>(1995)는 기껏 도착해보니 덫이 기다리는 교묘한 미로와 같았다. 사람들은 쾌감의 비명을 질렀고, 싱어는 복잡한 플롯과 앙상블 연기를 건사하는 연출 솜씨를 입증했다. “<저수지의 개들> 이후 가장 완성도 높고 흥분되는 시나리오”라는 중평을 얻은 미스터리스릴러 <유주얼 서스펙트>는 영화팬들 사이에 스포일러 공포증을 만연시키며 아카데미에서 각본상과 조연상(케빈 스페이시)을 획득하는 성과를 올렸다. 세 번째 작품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1998)부터 브라이언 싱어는 사적인 동기와 자신의 정체성이 깊숙이 개입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에서 제2차 세계대전 역사에 사로잡힌 결벽한 우등생 소년(브래드 랜프로)은 가짜 신분으로 숨어 사는 늙은 전범(이안 매켈런)을 협박한다. 그가 원하는 대가는 오직 홀로코스트의 잔인한 세부를 들려달라는 것이다. <유주얼 서스펙트>와 마찬가지로 감독은 ‘이야기’의 가공할 권력을 강조한다. 역습을 꾀하는 노인은 소년의 추락한 성적을 약점으로 잡는다. 그러나 여기서 성적은 은유일 뿐, 소년의 진짜 비밀은 사춘기를 맞아 발견하는 게이의 정체성이다. 이 영화는 미성년자 엑스트라들의 샤워신 때문에 소송을 겪었는데 <뉴욕타임스>의 재닛 매슬린은 “그러나 그 장면은 전체 이야기에서 진정 중요한 은밀한 시퀀스”라고 평했다. 학교 최고의 미녀에게 “난 네가 전교에서 내게 잘 보이려들지 않는 유일한 남자애라 관심이 간다”는 말을 듣는 조숙한 주인공은, 아마도 브라이언 싱어의 자화상일 것이다.

유대계 혈통의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철모르는 어린 시절 비유대계 친구들과 ‘나치 클럽’을 만들어 놀았다. 특이하게도 상대방 가학자의 시점에서 출발해 거꾸로 정체성을 형성한 셈인데, 이는 인간의 악함을 거듭 탐구하는 싱어 영화의 습성과 연결된 듯하다. 그의 영화에서 선과 악, 강자와 약자는 엎치락뒤치락 자리를 바꾸는가 하면 동일한 목표를 위해 종종 상이한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싱어는 도덕적 모호함과는 선을 긋는 사람이다.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늘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악의 복잡함을 인식해야 한다. 더 잘 이해해서 막을 수 있도록.” 이것이 <슈퍼맨> 프로젝트에 싱어가 진심으로 헌신할 수 있던 근거일 것이다. 나치의 맹목적인 차별주의와 살의라는 주제는, 아우슈비츠에서 초능력을 발견하는 매그니토의 과거를 담은 <엑스맨>의 매혹적인 프롤로그에서 재림한다. 7500만달러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예산으로 <퍼펙트 스톰> <미션 임파서블2> 등과 당당히 경쟁한 <엑스맨>과 한층 진보한 속편은 대중적 성공까지 거두며 게이를 비롯한 모든 잠재적 소수자들의 환상 속에 ‘<일리아스>’처럼 새겨졌다. 이즈음 싱어는 개인과 사회의 딜레마를 소재로 어둡고 세련된 엔터테인먼트를 만드는 감독으로 명성을 굳혔다.

브라이언 싱어의 가장 가볍고 로맨틱한 영화인 <수퍼맨 리턴즈>의 바닥에도 근원에 대한 물음이 계속된다. 영화는 슈퍼맨이 5년 동안 고향 크립톤 행성의 폐허에 다녀왔다고 전제한다. 이미 거대한 묘지가 된 행성에서 슈퍼맨은 자신을 닮은 존재와 가족의 흔적을 애타게 찾았다. 이는 과거 <슈퍼맨> 영화에 없었던 욕구다. 돌아보면 <엑스맨> 시리즈의 울버린도 지워진 기억의 부름에 끌려 비슷한 여행길에 올랐다. 입양아인 브라이언 싱어는 이들의 여정이, 양부모를 사랑하면서도 삶의 뿌리를 정확히 지적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매우 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거듭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슈퍼맨이 “미국적 영웅일 뿐 아니라, 이민자의 대표”라는 점을 환기하기도 했다.

흥분을 자아내는 재능을 소유한 대중 영화감독

<수퍼맨 리턴즈>

지금도 제임스 카메론을 만나면 사인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는 ‘동심’의 소유자지만 어느새 브라이언 싱어의 이력과 재능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그것을 비슷한 경로로 뒤쫓고 있다. (브라이언 싱어의 제작사 배드 해트 해리 프로덕션은 <죠스>의 마지막 대사(That’s one bad hat, Harry)에서 회사 이름을 착안했다). 학창 시절 열등생이었던 두 사람은 10대 초반에 생애 첫 영화를 만들었고 출세작이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유행을 불렀다. SF와 판타지 장르에 대한 열정도 공약수다. 브라이언 싱어는 “SF와 판타지는 언제나 편협함과 완고함에 대해, 전체주의 정부에 대해, 섹스와 젠더의 전복적인 화제를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만든다. <스타트랙>은 다른 인종간의 키스를 TV에서 처음 보여주었다. 현란한 모험이 간혹 메시지를 집어삼키기도 하지만, 메시지는 여전히 거기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해명한다. 무엇보다 두 유대인 감독의 영화에는 언젠가 학살자가 한밤중에 문을 노크하고 종말을 통고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서려 있다. 싱어는 “세상 어딘가에는 내가 단지 내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파괴하려는 자가 있을 수 있다. 이 생각 자체가 너무 두려워 나는 끝없이 파고들 수밖에 없다”고 한때 고백했다. 스필버그와 싱어는 사적인 공포와 환상이 투영된 블록버스터의 연출자이며, 생존을 위한 투쟁의 이미지에 시정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감독들이다. 할리우드는 그가 현재 누구보다 흥분을 자아내는 재능을 가진 대중 영화감독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한 인터뷰에서 브라이언 싱어는 흔쾌히 인정했다. “개인의 내밀한 문제를 터뜨리고, 온 세상에 슬쩍 팔아넘기는 데에 있어 여름 액션 이벤트 영화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알지 못한다. (웃음)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거래라면 우리는 항상 관심을 가질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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