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봉준호의 <괴물> [1] - 영화평
2006-07-20
글 : 문석

칸영화제를 뜨겁게 달궜던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드디어 국내에서 첫선을 보였다. ‘한국형 괴물영화’ 혹은 ‘한국산 블록버스터’ 등으로 명명된 이 영화는 벌써부터 호의가 듬뿍 담긴 평가에 둘러싸여 있다. 7월27일, 마침내 관객 앞에서 두터운 장막을 걷게 될 <괴물>의 면면을 평론가들의 간략한 평과 함께 소개한다. 여기에 봉준호 감독과의 인터뷰와 3차례에 걸친 <괴물> 현장 취재기도 곁들인다.

‘한강에서 괴물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덮친다’는 설정만으로도, <괴물>은 가슴 설레게 하는 영화다. 맨해튼이나 남태평양의 이름 모를 섬에서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속 괴물을 보며 “우리에게도 언제쯤 저런 일이…”라고 ‘한탄’하던 괴수영화 마니아가 아닐지라도, 한국하고도 서울 한강에서 펼쳐지는 괴물의 액션은 남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가 아니라 63빌딩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킹콩을 상상해보라. 하지만 <괴물>은 이런 ‘전시효과’에 만족한 채 일차원적인 오락성만을 드러내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2006년-한국-서울-한강’이라는 시공간은 여타 괴물영화에서처럼 숨막히는 액션을 위한 병풍으로만 기능하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 영화의 전면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영화 속 괴물은 그 자체가 무섭기보다는 이같은 시공간 자장 안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진짜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리얼리티라 부를 수 있는 현실적인 시공간이 두드러짐에 따라 괴물의 공포스러움, 숨막히는 롤러코스터 액션, 영웅적인 주인공 등 괴수 장르의 컨벤션 또한 이 리얼리티의 기압권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결국,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한국적인 ‘괴물영화’라기보다는 ‘한국적인’ 괴물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맥풀리는 외모의 박강두(송강호)다. 아버지 희봉(변희봉)과 함께 한강 둔치 매점을 운영하는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졸거나 손님이 주문한 오징어 다리를 훔쳐먹곤 하는 한심한 인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외동딸 현서(고아성)만큼은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진한 부성애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 나른한 강두의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나니, 어느 날 한강에서 나타난 괴생물체가 현서를 나꿔채간 것이다. 곧바로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한 것을 벼슬처럼 내세우는 실업자 남일(박해일)과 뛰어난 양궁 실력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굼뜬 성격을 가진 남주(배두나) 등 강두의 두 동생까지 합세하고, 영웅의 풍모라곤 조금도 갖춘 게 없는 이들 네명의 가족은 현서를 찾기 위한 길에 나서게 된다.

<괴물>은 괴물의 출현이라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계기로 드러난 괴물 같은 이 사회의 현실을 소시민 가족의 눈으로 보여준다.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숙주’로 지목된 괴물과 접촉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들은 병원에 갇히고, 강두는 심지어 정신병자로 몰린다. 그곳을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이들 앞에는 터무니없는 폭리를 취하는 흥신소 업자들과 통행료를 요구하는 구청 직원이 나타난다. 못 배운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들어주지 않고, 절박한 사정을 도리어 악이용하려는 이 참담한 ‘한국적’ 상황은 사랑하는 딸을, 손녀를, 조카를 구하겠다는 이들의 소박한 바람을 짓밟은 채 괴물로 하여금 더 활개칠 수 있도록 하고, 현서를 극한의 위험에 빠뜨린다.

<괴물>은 이처럼 괴물영화라는 장르를 한국적 리얼리티 안에서 변주해낸다는 점에서 지극히 할리우드적 장르, 스릴러를 ‘80년대 한국’이라는 공기 안으로 집어넣어 ‘농촌스릴러’로 만들어냈던 봉준호 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과 닮아 있다. 전반부의 코믹하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무겁고 어두워진다는 점, 이에 따라 캐릭터들의 감정 또한 후반부에 가서 격렬해진다는 사실, 그리고 평화로운 일상을 파괴하는 계기가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점 등 두 영화가 비슷하게 느껴지는 면은 적지 않다. 정치적 입장을 좀더 분명히 드러낸다는 사실은 <괴물>이 <살인의 추억>보다 한발 더 나아가는 지점이다. 용산 미군부대의 영안실에서 미국인의 지시로 포름알데히드가 다량 배출되면서 괴물이 배태되고, 괴물과 맞서싸우던 미군 병사가 사망함으로써 바이러스가 발견되고, 미국 정부가 개입하게 된다는, 명징하고도 노골적인 설정은 이 영화가 한편으로 정치적 비판의 깃발을 치켜세우고 있음을 드러낸다.

정치적 맥락에 동의하지 못하거나 정치성이 외삽처럼 느껴지는 경우라 할지라도, <괴물>이 한국영화의 기술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실사화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괴물의 3D캐릭터나 영화 곳곳에 들어간 컴퓨터그래픽은 몇몇 장면을 제외하곤 완벽에 가깝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백미는 40억원짜리 ‘개런티’의 괴물보다는 사람 배우들이다. 순간순간의 감정 변화가 극단적인 강두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한 송강호는 물론이고, 껄렁한 ‘퇴역 운동권’ 연기를 실감나게 보여준 박해일, 큰 눈을 꿈벅거리며 미련한 양궁선수 역을 해낸 배두나, 영특하다는 말밖에 할 길이 없는 고아성까지 <괴물> 속 배우들은 웃음과 슬픔이 아이러닉하게 교차하는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뭔가 나사 풀린 듯한 이미지로 고정됐던 변희봉의 강인하고 힘찬 연기는 <괴물>의 또 다른 발견이라 할 만하다.

사실, <괴물>은 잡다한 해설이 필요없는 봉준호표 영화다. 배우들의 연기부터 CG까지 꼼꼼하게 챙겨 자신의 뜻 안에 엮어낸 봉준호 감독의 세공술은 운명적 패배의 기운 속에서도 희망을 걸고 질주하는 이들의 표정과 내면에서 진짜 빛을 발한다. 바이러스 감염자로 분류된 강두가 행여 딸아이에게 세균을 옮길까봐 방역차 꽁무니를 쫓아 달리는, 무심한 장면에도 그는 가족애, 또는 아가페, 혹은 연대,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희망의 씨앗을 심어넣는다. 그건 마치 거칠고 위협적인 검푸른 빛의 한강을 무사히, 상처를 덜 입은 채 건너기 위해선 ‘우리’끼리라도 그것을 함께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평론가들은 <괴물>을 어떻게 보았나

(이하 가나다순)

김경욱/ <괴물>을 보면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점은 순제작비 110억원의 블록버스터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정치성이다. 이것은 <살인의 추억>에 이어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확보하려는 봉준호의 전략이며, 여전히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다시 봉준호는 1980년대의 ‘추억’에 빠지고, ‘그때 그 사람들’을 불러일으켜 지금 여기의 ‘괴물’과 맞서게 만든다. 스크린을 휘젓는 공포의 괴물보다 그들의 처절한 사투가 마음을 흔든다.

김봉석/ 어느 날 갑자기, 평화로운 한강 둔치에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괴물이 태어난 이유는 미군기지에서 버린 독극물 때문이고, 괴물을 잡는 것은 아이를 잃은 낙오자 가족이다. <괴물>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역시 한국영화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괴물의 활약이고, 실제로 즐거움을 주는 것은 낙오자 가족들의 개성 넘치는 캐릭터다. 봉준호의 개성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장르보다는 주변과 이면에 더 관심이 많은 한국산 블록버스터.

김소영/ 처음이 좋다. 비 퍼붓는 한강은 심연 속에 폭포가 거꾸로 치솟는 듯하다. 이 한강에서 곧 솟아날 괴물은 미국의 독극물이 탄생시킨 것이고 , 현서가 속한 가정은 도망 간 엄마로 인해 기우뚱하다. 가해자 미국은 끝까지 멀쩡해 이래라저래라 말이 많고, 소녀와 괴물이 맞붙어 둘 다 사라진다. 그래서 끝은? 허망하기 그지없다. 이른바 블록버스터 허무주의!

변성찬/ ‘쿨’하면서도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는 봉준호 특유의 화법은 ‘장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괴물>은 실핏줄까지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괴물’이다. 영화 <괴물>은 ‘괴물’의 애크러배틱한 몸놀림처럼 유연한 화법으로, ‘괴물의 존재론’을 설파한다. 현대판 ‘괴물’은, 정보 독점에 바탕을 둔 타자화 전략의 산물로, 즉 기생하는 권력의 ‘숙주’(host)로 존재한다.

이현경/ <괴물>의 영문 제목은 ‘The host’(숙주)다. 영화에서 공권력은 괴물을 바이러스를 옮기는 숙주로 보고 뒤쫓지만, 박강두 일가에게 괴물은 납치범일 뿐이다. 이 두 가지 입장이 맞부딪치면서 영화의 긴장과 알레고리가 발생한다. 전략적 무기라곤 휴대폰과 화염병밖에 없는 평균치에 좀 모자란 가족의 혈투는 한국적 괴물 이야기를 돋보이게 만드는 으뜸 요소임에 틀림없다. 한강의 재발견과 기계체조 선수를 방불케 하는 유연성을 갖춘 괴물은 감탄스러웠다. 문제는 알레고리와 유머다. 알레고리는 단선적이고 유머는 종종 도를 넘었다.

허문영/ <살인의 추억>의 장르 변주 방식을 상기시킨다. 정치적 알레고리를 끌어오면서 장르의 감각적 온도를 낮춘다. 장르적 쾌감의 자리에 숙명적 비애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이다. 첫인상으로는 이 방식이 <살인의 추억>에서보다 더 세련되게 구사되었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늘 여기서 살아가는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자기모멸을, 집단주의에의 도취에 호소하지 않고, <괴물>이 마침내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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