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봉준호의 <괴물> [5] - 촬영현장 취재기 ③
2006-07-20
글 : 문석

세 번째 방문. 2005년 11월18일 오전 원효대교 아래 여의도 고수부지

: ‘봉’기남의 영상 도전

화려한 플래카드와 피켓, 그리고 무수한 깃발이 출렁이는 이곳은 진짜 시위장이 아니다. 무심코 이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이었다면 사흘 전 열렸던 농민집회를 떠올렸을 겠지만 플래카드와 피켓에 적힌 문구를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이전트 옐로우 살포 즉각 중단하라!”, “NO VIRUS”, “박강두 가족에 대한 지명수배를 해제하라”, “FREE PARK KANG DOO” 등의 수상쩍은 구호가 난무하고 있으니 말이다. 보조연기자가 600여명이나 동원돼 <괴물> 촬영 중 가장 큰 규모였던 이날의 장면은 각종 사회단체가 시위를 벌이는 대목이다. 한강에 나타난 괴물이 치명적인 괴바이러스를 품고 있다는 보고가 나오자 미국 정부와 세계보건기구는 첨단 화학약품 ‘에이전트 옐로우’를 살포한다고 발표한다. 유해성 논란에 휩싸여 있는 이 약품을 뿌린다는 소식에 환경단체와 학생조직 등은 대규모 반대시위를 개최한다.

늦가을을 맞아 기온이 뚝 떨어진데다 살을 에는 강바람까지 불어오는데도 보조연기자들은 꿋꿋하게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두툼한 복장을 갖춘 경찰쪽이야 덜 추웠겠지만, 얇은 셔츠 바람의 시위대쪽에 속한 보조연기자들은 연신 다리를 오들거리고 있다. 리허설이 잠시 멈추는 동안 이들은 제자리에서 뜀뛰기를 하거나 서로 부둥켜안으며 추위를 달래야 했다. 이날 현장에는 시위대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존재가 있었다. 대형 크레인에 매달려 있는 샛노란색의 ‘에이전트 옐로우’ 살포기가 그것. 마치 괴물이 똬리를 튼 듯한 모양새의 이 물체는 누런 연기를 쉭쉭 뿜어대며 위협적인 자태를 과시했다. 이 기계는 단지 전시용이 아니다. 며칠 전 본격 살포장면을 찍을 때는 엄청난 양의 황토를 폭발적으로 토해냈다고 한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즉석 ‘머드팩’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날은 위협 차원의 가스만 조금씩 뿜어낼 것이라고 한다. 다행이다. 겨울옷 빨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오후 12시가 조금 넘어 촬영에 돌입하자 시위대와 경찰의 격렬한 몸싸움이 시작된다. 뒤쪽의 시위대는 오자미, 물병 등을 던진다. “철수하라!”, “중단하라!”, “석방하라!” 등의 소리가 뒤섞인 가운데 봉 감독이 메가폰에 대고 “컷”이라고 외친다. 격렬해진 시위는 멈출 줄 모른다. 연출부들이 겨우겨우 뜯어말린 뒤에야 대열이 다시 갖춰진다. 거듭되는 테이크 속에서 오후 1시가 지나자 보조연기자들은 지쳐가고 부상자도 속출하는 분위기다. 대열 중의 누군가 큰소리로 외친다. “점심 안 먹는교!” 주변에서 맞장구를 치는 소리가 들린다. 자칫 시위 연기가 생존권 쟁취를 위한 보조연기자들의 진짜 시위로 바뀔 듯하자 연출부들이 달래고 어른다. 봉준호 감독의 표정도 잠시 흔들린다. 그러나 그는 이내 메가폰을 다시 움켜쥐고 “자, 3가지만!”을 외쳐댄다. <살인의 추억> 당시 “영화감독들은 모두 다 지옥에 갈 거예요”라고 했던 봉 감독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김형구 촬영감독은 바로 전날까지 괴물이 등장하는 장면을 모두 촬영했다(물론 괴물은 없이)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다. 미국 오퍼니지에서 진행하는 컴퓨터그래픽 일정이 빠듯하다 보니 CG가 들어가는 신부터 먼저 찍었다는 것이다. 급박한 스케줄에 맞춰 CG숏을 맥락에 관계없이 촬영하다 보니 봉 감독은 “내가 남기남 감독이 된 것 같다. 아니, 봉기남인가”라며 자괴에 빠지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 모든 것은 사실 봉 감독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다. 한국영화 사상 초유의 괴물영화를 찍기로 한 것도, 대규모 CG와 각종 특수효과를 동원하기로 한 것도 모두 그이기 때문이다. 김형구 촬영감독은 “아무래도 가장 어려운 점은 없는 것, 그러니까 허공을 찍는 일”이라고 말한다. 제작진은 3D로 창조되는 괴물을 위해 동영상 콘티인 애니매틱스를 미리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김형구 촬영감독은 그 동영상 콘티를 따라 그 자리에 괴물이 있다는 듯, 그대로 앵글을 잡고 카메라를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대로 따라하기도 어렵지만, 렌즈 선택이나 카메라 움직임을 어떤 스피드와 어떤 폭으로 할지 고민이 됐다”고 토로한다.

이날 현장에서 가장 바쁜 스탭은 단연 류성희 미술감독이었다. 피켓, 플래카드, 스티커, 티셔츠 등 디자인적인 요소가 가장 많이 들어간 장면이었기 때문. 그는 “디자인할 때도 그랬지만 촬영을 하다보니 더욱 축제 같은 느낌이 돼버렸다. 마치 거대한 농담 같은 느낌이다”라고 말한다. 류 감독은 “봉준호 감독은 범세계적인 주제를 진짜 한국적인 방식으로 전한다”며 전체적인 이미지가 “대낮의 살바도르 달리나 광기어린 샤갈”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큰 규모의 영화답게 미술 부문에서 굉장한 준비를 했지만 리얼리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봉준호 감독의 성향을 고려해 힘조절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화면을 보면서 저 부분이 미술작업을 한 곳인지 아닌지 헷갈리기도 했다”고 그는 말한다.

봉준호 감독도 새롭게 시도하는 영상작업에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촬영을 하는 와중에도 “후반작업 비중이 워낙 커서 촬영을 마치고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고민은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사실, 계속 촬영을 진행하다 보니 비주얼이펙트 숏은 이미 정교하게 짜여 있고 논의를 계속 해서 예정된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비주얼이펙트나 군중신 같은 게 있지만, <괴물>은 스펙터클을 과시하는 영화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세밀하고 섬세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게 내 중요한 과제다.” 결국 봉 감독에게 실감나는 CG와 특수효과는 그 자체의 쾌감보다는 그가 전달하려고 하는 현실의 이야기를 좀더 리얼하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방도라는 것이다.

5시가 가까워지자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짧아진 해가 못내 아쉬운 듯, 봉 감독은 촬영팀과 조명팀에게 “시간상 한번 더 갈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미 찍어놓은 장면과 이날 찍은 신을 이어붙여보고 있다. 많은 예산과 공력이 투입된 대규모 시위신도 결국 가족들의 처절한 사투장면으로 향하는 전주곡에 불과하다는 듯 수위를 조절하려는 것이다. 5시25분, 이날의 최종 테이크가 시작됐다. 그리고 곧 어둑한 고수부지 한가운데로 호쾌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카앗, 오케이!”

사진제공 청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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