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봉준호의 <괴물> [3] - 촬영현장 취재기 ①
2006-07-20
글 : 문석

2005년 6월29일 카메라를 돌리기 시작한 <괴물>은 올해 1월8일에야 모든 촬영을 마쳤다. 1년 가까운 프리 프로덕션과 정교한 CG 등 후반작업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한강 주변을 맴돌며 6개월 넘도록 진행된 촬영이야말로 감독과 스탭과 배우들에겐 고난의 시간이었다. 초여름부터 한겨울까지, 모두 110회차에 걸쳐 이뤄진 촬영 중 <씨네21>은 3차례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난해 8월과 10월, 그리고 11월 근접거리에서 지켜본 <괴물> 촬영현장을 소개한다.

첫 방문. 2005년 8월19일 밤 동작대교 부근 한강 둔치

: 가족, 탄생하다

4호선 동작역에서 나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괴물>의 현장은 동작대교 남단에서 동쪽으로 몇 백미터 치우쳐 있는 한강 둔치에 있었다. 한여름이라고 해도 밤 9시가 넘었고, 바람이 심한 강변인데다, 빗방울까지 오락가락해 체감온도는 꽤 낮았다. 긴 바지와 두툼한 점퍼를 입은 스탭들은 반팔과 반바지, 그리고 알량한 슬리퍼 차림으로 다가오는 외부인을 보면서 ‘너 오늘 고생 좀 해봐라’라고 말하는 듯했다. 만약 한 스탭이 바람을 차단하는 점퍼를 빌려주지 않았다면 취재를 포기했을지 모를 정도로 기온은 뚝 떨어지고 있었다. 촬영장 한가운데로 들어가자 이날의 촬영공간인 매점 세트가 보였다. 촬영의 편의를 위해 한강 둔치에 있는 보통 매점보다 약간 크게 만들어진 이 세트는 오랜 시간 강바람을 맞은 듯한 외양이나 과자, 음료수, 사발면, 소시지 등 요깃거리가 꽉꽉 들어찬 내부까지, 무심코 지나치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실감이 난다.

촬영, 조명, 미술팀이 오글오글 작업하고 있는 매점 세트를 지나자 봉준호 감독과 배우들이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 비닐 텐트가 나온다. 헤드폰을 낀 채 현장편집본을 보며 연출부 스탭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봉 감독보다는 박해일과 농담을 나누고 있는 송강호에게 말을 거는 편이 여러모로 안전해 보인다. “아, 이 머리요? 색깔 이상하죠? 양아치 같고. 그래도 이 머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 신경을 써야 돼요.” 익숙한 말투로 송강호가 말한다. 한쪽에는 카메라 여러 대를 들고 이것저것 찍고 있는 배두나가 보이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변희봉도 있다. 그리고 아역배우 고아성은 더 어린 아역배우와 재잘거리며 놀고 있다. <괴물>을 이끌어나가는 이 다섯명의 배우는 극중에서 한 가족으로 나온다. 짐작할 수 있듯, 변희봉이 아버지 박희봉 역이고, 박강두 역의 송강호와 박남일을 맡은 박해일, 박남주 역의 배두나는 그의 삼남매 자식들이다. 고아성은 박강두가 애지중지하는 외동딸 현서를 연기하게 된다.

이날의 주된 촬영분은 현서가 한강변에 갑자기 출몰한 괴물에게 납치된 뒤, 현서를 찾아 헤매던 나머지 가족들이 매점으로 숨어드는 장면이다. 특히 이 장면은 영화에서 드물게 가족 전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신이라 배우는 물론이고 스탭들 또한 기대하는 분위기다. 게다가 고아성은 처음 촬영장에 나왔으니 이날은 박강두네 가족의 역사적인 상봉일인 셈이다. 어느새 배두나가 첫 촬영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고아성 옆으로 다가와 툭툭 살가운 장난을 건다. 두 사람은 이미 TV드라마 <떨리는 가슴>에서 이모와 조카 사이로 출연한 바 있다. 고아성이 <괴물>에 출연하게 된 것도 배두나의 추천이 영향을 끼쳤다. “이번에는 고모가 됐는데, 현서를 위해 헌신하는 연기를 해야 하니까 내 마인드컨트롤 차원에서라도 아이들을 관리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던 배두나는 세주 역을 맡은 이동호가 옆으로 지나가자 “누나, 이뻐이뻐해줘”라고 말을 건넨다.

밤 11시20분, 전날 끝내지 못했던 세진이와 세주의 컷으로 이날 밤 촬영이 시작됐다. 이 가여운 형제는 괴물이 출현해 아수라장이 됐는데도 한강 둔치를 맴돌며 매점을 ‘서리’해 허기를 때워야 하는 부랑아다. 이날 장면도 형제가 매점에 들어가서 다양한 먹을거리를 챙기는 대목이었다. 형인 세진이 역은 <살인의 추억>의 첫 장면에서 메뚜기를 잡으며 송강호와 ‘맞상대’를 펼쳤던 이재응이 맡았다. 어느새 여드름이 난 이재응은 사춘기 소년답게 고독을 즐기는 듯 보였다. 반면 세주 역의 이동호는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법한 나이라 촬영장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두 번째 컷에서 자신의 실수로 NG가 나자, 매점 안에 있던 동호는 무전기에 대고 “죄송합니다”라고 오물거리며 말한다.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봉 감독과 스탭들은 아이의 앙증맞은 말투에 자지러진다. 곧바로 동호는 “감독님 사랑해요”라고 ‘아부’를 한다. 봉 감독 옆에 있던 박해일은 “동호, 너 왜 이렇게 정치적이 됐어?”라고 농담을 던지더니, “감독님 사랑해요”라며 귀염을 떤다. 이어지는 봉 감독의 싸늘한 대답. “징그러워 이 새끼야.” 그러자 송강호가 “<살인의 추억> 때는 봉 감독이 해일이만 귀여워해서 배 아팠는데 이제야 시원하네”라면서 고소하게 웃는다.

진짜 가족처럼 스스럼없이 지내는 이들의 촬영도 곧바로 이어졌다. 배우들만으로도 비좁은 매점 안에 촬영, 조명, 미술 스탭들이 몸을 구겨넣은 채 촬영이 이뤄진다. 가족들은 괴물에게 현서를 빼앗긴 허탈감과 억울함을 가눌 수 없는 비참한 심정이지만, 이 와중에도 허기를 달래야 하는 비루한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사랑하는 딸, 조카, 손녀를 애절하게 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발면에 물을 붓고 김밥 집은 젓가락을 입 안으로 쑤셔넣어야 하는 이율배반의 상황이다. 식탁을 둘러싸고 네명의 어른들이 어색하지만, 끈끈한 무언가를 나누는 분위기로 옹기종기 앉아 있으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리네 가족처럼 보인다.

사실, 이들 가족 구성원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흐르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장편영화 두편에 출연했던 배우들이라는 점이 그것. <플란다스의 개>에 출연했던 배두나와 <살인의 추억>에 나왔던 송강호와 박해일, 그리고 두편 모두에 등장했던 변희봉은 모두 봉 감독의 ‘가족’과 같은 존재들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번 영화는 너무 신경 쓸 게 많아서 호흡이 잘 맞는 연기자들과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기획의도만 믿고 출연을 결정했다는 배두나는 “봉 감독과 작업해봤기 때문에 그의 상상력을 믿는다”고 말하고, 박해일은 “같은 감독과 2편의 영화를 작업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나를 너무 잘 아는 봉 감독이 무섭기까지 하다”고 한다. 송강호 또한 “봉 감독과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다. 궁합이 정말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하며, “지금이 내 연기생활 중 가장 좋고 흐뭇하다”는 변희봉 또한 “봉 감독의 출연 제안이라 당연히 수락했다”고 소탈하게 이야기한다.

세팅이 지연되면서 새벽 1시가 넘어가자 야식이 지급된다. 따뜻한 국물에 담긴 국수가 아늑한 김을 뿜고 있는데, 한구석에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아성아 축하해”라는 소리와 함께 케이크가 배달된다. 이미 1시간이 지난 8월20일, 고아성의 생일을 맞아 스탭들이 준비한 깜짝 파티다. 놀라면서도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고아성이 케이크를 자르자, 배우들은 진짜 할아버지, 아버지, 고모, 삼촌이라도 된 양 축하해준다. 동이 완전히 틀 때까지 진행된 이날의 촬영분이 <괴물> 속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 중 하나로 완성된 데는 가족처럼 단단한 팀워크가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진제공 청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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