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4일 막을 내린 미쟝센영화제가 다섯편의 부문별 최우수 작품상과 세편의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을 발표했다. 송해성, 정지우, 박흥식, 박진표, 박찬욱, 류승완, 장준환, 박광현, 김성수, 오승욱. “제아무리 부산영화제라 해도 자기 작업이 있으면 행차하지 않을”, 충무로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현역 감독들이 이들 작품과 감독을 향해 아낌없는 애정을 표명했다는 의미다. 머지않아 현장에서 만나게 될 예비 동료를 향한, 말 그대로 순수한 의미의 지지. 대부분의 예술에 있어서 교육이 가능한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회의를 품는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일찍 같은 길을 걸어본 이들이 후배를 독려하는 영화제는 최고의 교육장이라 할 만하다.
축제는 끝났지만 현실은 계속된다. 고독한 작업으로 복귀한 선배 감독은 물론, 짜릿한 수상의 기억을 뒤로하고 새로운 영화를 고민해야 하는 후배 감독들에게도 정말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서먹한 첫걸음을 내딛는 수상 감독들과 영화제를 인연으로 이들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게 된 충무로 기존 감독들과의 만남을 준비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정지우 감독과 정충환(<불법주차>)·강혜연(<착한 아이>, 봉준호 감독과 이상근(<베이베를 원하세요?>), 김성수 감독과 정태경(<2분>)·조형찬(<머리 위에 숯불>). 이야기를 처음 구상했을 때부터 완성된 영화를 많은 사람들 앞에 선보일 때까지, 회의하고 고민하고 주저하는 감독들만의 소심한 행보를 잘 이해하는 이들의 시시콜콜하고 사려깊고, 진심어린 대화를 지상중계한다.
영화는 영혼을 건 준비를 요구한다
미쟝센영화제 ‘비정성시’ 부문 수상자들, 정지우 감독과 만나다
“마치 전설과도 같은….” <불법주차>로 올해 미쟝센단편영화제 비정성시(사회드라마)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정충환 감독은, 정지우 감독의 단편 <사로>(1994)와 <생강>(1996)을 가리켜 그렇게 운을 뗐다. 같은 부문의 <착한 아이>로 관객상과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강혜연 감독은, 짐짓 서운한 티를 냈다. 영화전문지 <키노> 기자 시절 <해피엔드>를 담당했던 그녀를 정지우 감독이 곧장 알아보지 못해서다. <해피엔드> <사랑니>에 이어 세 번째 장편 <모던 보이>(가제)를 준비 중인 정지우 감독은 송해성 감독과 나란히 올해 미쟝센영화제 사회드라마 부문 심사에 나섰다. 그는 젊은 단편들과 연일 대면하며, 영화는 영혼을 걸 도리밖에 없는 작업이라는 엄숙한 진실을 다시 확인했다. 이날, 하나 그리고 둘의 대화는 지금 시작하는 동료에 대한 정지우의 인터뷰인 동시에 ‘우리’를 주어로 하는 자문이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맞춤하게 그윽한 비가 내려 뒤풀이가 길어질 조짐이 보였다.
정지우=‘비정성시’ 부문은 사회드라마라는 장르로 묶여 있지만, 올해 출품작들이 가장 많이 다룬 소재는 흐트러진 가족이었어요. 정충환 감독의 <불법주차>는 그중에서도 색다른 방식으로 가족을 언급해 심사한 감독들이 호감을 가졌고 강혜연 감독의 <착한 아이>는 코미디 부문이 따로 있는데도 관객상을 가져갈 만큼 심금을 울린 영화였죠. 두 영화를 제가 지금 가족의 이야기라고 묶어 규정했는데, 본인들은 왜 이 이야기들을 선택했나요? 이건, 영화를 완성하고 나면 감독이 기자, 평론가에게 듣는 가장 난해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웃음)
정충환=누군가가 <불법주차>를 보고 IMF 직후에 나왔다면 새로웠을 거라고 하더군요. 바꿔 말하면 너무 늦게 나온 영화란 뜻일지도 모르지만 시의성은 염두에 두지 않았어요. 언젠가 차 안에서 노숙하는 사람이 주인공인 만화를 봤어요. 만화는 독심술과 로봇이 등장하며 전개됐지만, 전 사업에 실패해 무작정 차를 끌고 나가 1년 반을 생활했다는 친척 아저씨를 떠올렸거든요. 그분은 나가서 어떻게 사셨을까. 또 울산 출신인 제게 서울역은 관문인데, 노숙자들은 거기서 처음 마주치는 사람들이기도 했어요.
강혜연=<착한 아이>는 15년을 간직한 얘기예요. 서울의 여러 동네가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사라져버렸던 90년대 초, 강남 대치동에 아파트가 들어설 무렵 철거촌에서 공부방 활동을 했어요. 그때 비닐하우스를 나서서 학교 가는 초등학교 1학년 소녀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었어요. 그때 전 아이들에게 할 말이 없거나 거짓말만 했거든요. 아이들과 헤어져 내 생활로 돌아오면 간극이 너무 깊어 힘들었고 그 힘겨움은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어요. 이제 내 또래들이 엄마가 되어 아이를 키우는데 이상하게도 자기 자식만 귀하게 여기더군요. 내가 엄마 입장에 가까워진 나이가 된 지금 하지 않으면 못할 이야기인 것 같았어요.
정지우=배우 얘기를 하자면 단편영화는 장편 감독에게 최선의 캐스팅 경로예요. 연극이나 다른 매체에 비해 훨씬 정확하게 배우를 알 수 있는 길이거든요. 저도 <사랑니>의 정유미씨를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에서 찾았죠. 많은 심사위원이 두 감독에게 지지를 보낸 부분이 연기 연출인데요. 강혜연 감독은 어린 배우들과 교감해야 했을 텐데 어떤 방법을 취했나요?
강혜연=처음에는 배우 아닌 아이들과 찍으려고도 했지만 결국 포기했어요. 동생 역의 강이석은 깡다구와 순발력이 좋은 친구였는데, 아동복 카탈로그 모델 경험이 있어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어른들이 귀엽다고 생각하는 표정이 자동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 ‘조’(調)를 버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나중에는 본인한테는 큐 사인을 주지 않고 얻어내고 싶은 것을 상대 배우에게 설명했어요. 그러니까 그 친구의 연기는 액션이라기보다 리액션이죠. 누나 기정으로 나온 이지은은 어느 정도 성숙하고 이미 리듬감이 좋은 배우라서 대화로 감정의 층을 하나씩 깔아주면 정확하게 반응했어요. 워낙 건강하고 예쁜 아이라 처음엔 극중 기정이처럼 아픈 경험을 끄집어낼 것이 없어 보였는데 대화하다 보니 지은이에게도 극성스러운 엄마에게 과보호받는 또래 배우들에게 밀려나 마음을 다친 경험이 있더라고요. 그 감정으로 기정이가 소외당하는 운동회 장면을 끌어냈죠.
정지우=내가 볼 때도 누나 역은 클로즈업이라든지 배우가 기술적으로 극복해야 할 숏이 많았어요. 동생을 찍을 때 카메라가 멀어진 것은 최초의 계획이 누나를 서술의 중심에 뒀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방금 말한 배우의 특성 때문인가요?
강혜연=계획도 그랬고, 결과도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치고 가까이 잡은 숏이 많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해요. 귀여움에 속아서 찍다보면 가깝게 다가가고 싶은 적이 많았지만 꾹 참곤 했어요.
정충환=<불법주차>에서 계약직 공무원인 주차단속원, 공익요원 캐릭터에는 박봉과 과로에 시달리는 어린이집 교사인 제 동생의 모습을 떠올렸어요. 큰 경력도 안 되는데 그만두려니 돌파구가 보이지 않고, 어떻게든 가진 것 안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하는 일이랄까요? 오히려 힘들었던 캐릭터는 차 안에서 구슬을 꿰며 먹고 자는 주인공 노숙자예요. 개념상으로는 도심 한복판의 카우보이죠. 거의 쓰러져가면서도 자존심만으로 서 있는 이 남자는 차 밖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노숙자와 자기는 다르다고 믿어요. 아내를 기다린다지만, 어쩌면 그건 그저 생존의 명분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것을 전달하기가 저도 배우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초반에는 캠코더만 차 안에 넣고 배우들끼리 대화를 찍어 토론하기도 했어요. 3, 4회차 촬영이 지나가면서 배우와 이야기가 조금씩 맞았고 결국 정인기 선배도 ‘나와 앉은’ 사람들과 닮아가더군요.
색다른 방식으로 ‘가족’을 언급했다
정지우=<불법주차>는 서울역에서 촬영을 감행했고, <착한 아이>는 운동회 장면을 만들었습니다. 단편영화로 치면 거의 만용에 가까울 만큼 찍기 어려운 환경 속으로 카메라를 들고 간 건데요. 저라면 비굴하게, 비슷한 느낌으로 쉽게 갈 방법을 고민했을 것 같은데(웃음), 그런 선택을 밀어붙이면서 많이 후회하거나 재미를 느낀 순간이 있을 텐데요.
강혜연=운동회는 만용이었죠. 하지만 스펙터클을 보여주자는 것이 아니라, 과보호받는 아이들과 최소한 누릴 것도 못 가지는 아이들을 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면이어서 했어요. 생일, 소풍, 운동회가 비슷한 케이스인데 제발 생일잔치로 가달라는 PD의 청을 뿌리치고…. (웃음) 아파트에 둘러싸인 학교가 필요했는데 일산의 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열린 마음으로 승낙해주셨죠. 교무회의, 학부모회의에 스탭들이 참가하고 가정통신문을 돌려 참여를 부탁했는데 마침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도 열려 일일 영화이벤트가 됐어요. 저는 임권택 감독님 연출부 시절 군중신을 워낙 많이 찍어서 걱정 안 했는데 애들이라 통제불능 아비규환인 거예요. 운동회를 다 찍고 엔딩신을 찍느라 배우의 감정을 충분히 만져주지 못했어요. 지금 보면 더도 덜도 아니고 딱 두 호흡이 모자라요.
정충환=알고보면 제 선택도 비굴함의 산물인데요. 안착할 수 있는 다른 장소를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거든요. 그런데 서울은 한국사회와 감정, 사람들을 대변할 아이콘적 공간이 사라져가고 있더라고요. 용산역도 옛 용산역을 생각하며 갔더니 복합 쇼핑몰이 서 있고. 결국 이별, 만남, 여러 부류의 인간을 보여주려니 서울역 말고 갈 데가 없었어요. 서울역은 촬영 1시간에 30만원을 내야 하는데 학생이라 4시간을 허락받았어요. 거기다 여러 꼼수를 써서 시간을 늘리고 망원렌즈로 몰래 찍고, 내부 촬영은 천안 아산역까지 가서 했어요. 고가장면과 자동차 추격전은 제 욕심이었죠. 원래 오토바이도 못 타는 여배우가 뒤에 80kg짜리 남자배우까지 싣고 몸에 쥐가 나도록 연기했고 촬영감독은 대뜸 밧줄로 트럭 짐칸에 몸을 묶더라고요. 무리하고 싶지 않았지만 연출상 그 대목을 대충 넘어가면 관객이 “대략 그러해서 저러했다는 거지? 단편영화니까 그냥 알아들으라는 거지?” 할 것 같아 정면 돌파했어요. 역에서도 어려움이 있었는데 노숙자분들도 신역전파, 구역전파로 갈려 각기 수장이 있어서 아침마다 소주값 받으러 오시기도 하고. 저쪽에서는 PD가 울며 싸우는데 저는 이쪽에서 “찍어! 찍어!” 하는 식이었죠. (웃음)
정지우=그처럼 영화가 더 지독하게 갈 것이 눈에 보일 때, 인간적으로 무리라고 느껴지는 순간에 어떻게 넘겨요?
정충환=일단은 모든 사람이 거부해도 촬영감독 카메라만 돌아가면 영화는 찍히고, 조감독만 설득하면 원하는 것을 해주니까 그 두분을 내 편으로 꼬드겼어요. 그렇게 셋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니 연기자들도 “이게 별일 아니고 단편영화에서는 자주 있는 일인가보다 여기더라고요. (좌중 폭소)
정지우=이제 의아했던 점을 하나씩 묻고 싶어요. <불법주차>의 엔딩에서 주인공의 차문을 두드리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했어요? 기다리던 아내인가요? 심사한 감독들도 그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는데.
정충환=제 친척 아저씨의 현실적 결말은 싸늘한 시신이었어요. 젊을 때 요르단에서 열심히 돈을 벌 무렵 아저씨가 제게 “요르단에는 아직 거지가 많단다. 우린 돈 벌어가서 잘살 수 있을 거야”라고 보내신 편지가 생각났죠. 만약 영화에서 해피엔딩의 암시를 받는다면 그건 영화라는 판타지의 흐름을 타고 간 관객의 마음일 것 같아요. 탑골공원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노인들에게 휴대용 재떨이를 나눠드린 적이 있는데 “저쪽 사람들이나 줘라. 우린 그런 사람 아니다”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계셨거든요. 우리 눈에 똑같아 보이지만 거기 있는 분들은 자기를 남과 구분짓고 그런 게 없으면 삶을 지탱할 무엇이 없는 거죠. 이곳은 사회복지 시스템과 무관하게 그렇게 나앉은 사람들에 대해 아무 존경심이 없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제가 직접 본 사람들은 모두 쓰러져갔지만 제가 만든 판타지 안에서는 내 식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어요.
정지우=<착한 아이>에서 집을 나간 엄마는 딸의 기억을 통해서, 그러나 플래시백이 아닌 기법으로 영화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나오는 장면 중 아빠가 딸을 아내로 착각하고 폭행하기 직전 숏만 유독 일관성에서 벗어나 아빠의 시점이거든요. 20분 넘는 러닝타임에 걸쳐 통일성을 조율한 이 영화에서 그 숏이 왜 들어갔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강혜연=플래시백이란 끊어지는 순간과 이어지는 순간의 경계가 명백한 기법인데 기정에겐 엄마가 항상 유령처럼 따라붙어야 했으므로 플래시백은 적당치 않았어요. 말씀하신 숏은 매우 껄끄러운 숏 맞아요. 개인적 관심으로 찾아본 자료에 따르면 10살 미만 여아를 성폭행한 범인의 다수가 친부래요. 그들의 흔한 변명이 딸에게서 아내의 체취가 난다는 거예요. 아버지의 폭행이 단순한 폭력 이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그 숏에 들어간 셈인데, 불균질한 숏인 줄 알면서도 몹시 넣고 싶었어요. 제 분노가 그런 식으로 흘러들어갔을 수도 있고요.
좌충우돌 끝에 영화의 길을 찾았다
정지우=듣고 보니 <착한 아이>와 <불법주차>는 모두 사적인 감성과 경험, 추억으로부터 숙성된 이야기네요. 더구나 두분은 모두 20분이 넘는 영화를 35mm 필름으로 만들었으니, 이제 그 기분으로 더 긴 영화를 만들고 싶을 때입니다.지금의 한국영화를 어떻게 보세요? 비빌 언덕이 있어 보이나요? 또, 어떻게 비벼야 할지 틈은 보이나요?
정충환=저는 어떤 소재를 만난 다음 생각에 들어가지 특정한 생각에 늘 지배당하는 편은 아니에요. 사회에 닿아 있는 소재를 가장 대중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히려 제겐 장편이 더 편안할 것 같아요. 단편은 뭔가 사회적 언급과 작가적 주관성, 명분이 있어야만 할 것 같고, 그래야 주목받을 자격이 생길 것 같은 제약을 느끼거든요.
정지우=선배 세대는 최근 단편영화가 너무 장편으로 가는 포트폴리오가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는데, 그 말은 반대로 “단편영화란 뭔가 생각이 있어 보여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는 이야기잖아요? 재미있네요.
정충환=제가 전대협과 한총련 중간 세대, 말하자면 가운데 낀 세대라 그런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단편을 장편의 징검다리로 여긴다는 부분은 맞아요. 그건 어떻게 보면, 이 사회가 FTA도 그렇지만 경쟁을 강요하는 세계이기 때문이에요. 물은 작은데 경쟁은 치열해서 “한번 떨어져나가면 너는 끝”이라고 압박해요. 하위리그를 전혀 만들지 않는 거죠. 그러니 낙오하면 아예 갈 곳이 없고 다들 큰물에서 뜻을 펼치겠다고 생각할 밖에요.
정지우= 미쟝센영화제에 많이 참석했다는 충무로 프로듀서들이 혹시 <불법주차>의 엔딩을 불친절하다고 생각할 염려는 없을까요? (웃음)
정충환=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 영화는 내 돈으로 만들었으니 마음대로 했지만 다음 영화는 얼마든지 친절하게 만들어드릴 수도…. (일동 폭소)
강혜연=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유학을 떠났다 돌아와보니 소재에 대한 예의나 책임감없이 한방으로 승부하는 단편들이 상도 받고 재능있다고 PD들에게 인식되는 경향은 보였어요. 작은 영화도 나름의 길이 있고 그것의 인생도 인정해야 하는데, 작은 영화 만들어놓고 큰 영화 같은 이윤을 바라는 마케팅을 한다거나, 뭔가 붕 떠 있는 것도 같아요. 제 경우는 단편이 딱히 장편의 포트폴리오라기보다 시나리오를 쓰다가 “이걸 누가 봐?”라는 자기 검열을 느끼는 정도였어요.
정지우=두분은 모두 영화감독으로 직진하지 않고 전공이나 직업을 바꾸며 좌충우돌했는데요. 영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담을 전하고 싶은가요?
정충환=전 연극영화과에 입학하고도 뭘 할지 모르는 인간이었어요. 제가 영화를 하도록 만든 건 승부욕이었던 것 같아요. 나를 무시하는 이들과 영화로 붙어서 이길 수 있다는 승부욕이 발동한 거죠. 그리고 영화는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알고 사회적 인간이 되는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타인을 이해하고 야비하게 말하자면, 이용하는 것을 배워가는 과정이랄까요? (웃음)
강혜연=중간단계가 힘들었죠. 팬으로서 순수한 열광을 잃는 한편, 영화 만들기의 마법이 눈앞에서 깨진 다음에도 견딜 수 있을까 5, 6년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그런데 겪고 나니 모든 일에서 관건은 얼마나 그 일을 좋아하고 유능한가가 아니라, 그 일에서 가장 엿 같은 부분을 견딜 수 있느냐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정지우=정말 재능있는 이가 최후에 남는가라는 질문에는 저도 답을 못하겠어요. 말씀대로 최악의 상황을 견디거나 즐길 수 있는 습관이 소중한 것 같아요. 이번 기회에 영화 만드는 일이란 어영부영해서는 안 되고 영혼을 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강혜연=버티는 것도 재능의 일부예요.
정지우=그런데 결론이 어째 신병교육대에 걸린 표어 같아서 마음에 걸리네. (웃음)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강자다.” “문제는 승부욕이다.” 스포츠 선수도 요즘은 이런 말 안 하지 않나요? 옛날엔 지면 무조건 정신력 문제라고 했지만 이젠 전략과 전술을 이야기하는데. (일동 웃음) 이 일의 원형에 그런 요소가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죠.
강혜연 감독은 누구?
생애 최초의 영화는 세 살 때 본 <메리 포핀즈>. 불이 꺼져 극장을 나오는데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 마법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후로는 줄곧 영화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었다. 대기업을 뛰쳐나와 <키노> 편집실에서 1년 반을 지냈다. 임권택 감독에게 이력서를 내고 <춘향뎐>과 <취화선> 연출부에 몸담았는데 한동안 기자들에게 취재 온 동료로 오해받았다. “사람을 한 번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서 깨뜨려주는 것”을 예술학교에 기대한 강혜연 감독이 경험을 정리할 장소로 택한 곳은 컬럼비아 대학 영화과. 졸업작품인 <착한 아이>는 미국 학생 아카데미 본선에도 올랐다. 지난해 여름 서울에서 촬영한 필름을 미국에서 초벌 편집하고, 한국에 다시 들어와 후반작업했다.
<착한 아이>는 어떤 영화?
“우리 기정이 착한 아이지?” 머리를 곱게 땋아주며 그렇게 속삭인 엄마(김수진)는 집을 나간다. 가책이 실린 그 한마디의 메아리는 고스란히 열 살 소녀 기정(이지은)의 굴레가 된다. ‘착한’ 소녀는 술병을 끼고 사는 폭력적인 아빠에게 엄마 대신 폭행당하고 투정 부리는 남동생에게 밥상을 차려낸다. 비 내리는 오후 동생에게 비닐봉투를 씌운 채, 살 수 없는 물건을 파는 상점과 아파트 신축 현장을 가로질러 하교하는 소녀의 발걸음은 이미 젖어 있지만, 그녀가 스스로에게 눈물을 허락하는 것은 한참 뒤다.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 어느 날, 남매는 가족과 등 돌린 아파트촌의 외톨이 할아버지와 만난다. 체육복도 무용복도 갖추지 못해 서러움이 더한 운동회 날, “엄마와 함께 달리기”라는 잔인한 쪽지를 집어든 기정의 눈에 손을 흔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본 우리는 할아버지가 이 소녀의 구원이 되리라고 차마 천진하게 낙관할 수 없다. “너도 그만 도망치렴”이라고 몇 번이나 외치고 싶게 만드는 이 영화에는 떠나간 엄마의 그것과 비슷한,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감독의 죄책감이 어려 있다.
정충환 감독은 누구?
불문학도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가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재입학했다, 라고 하면 비장한 청춘의 결단이 그려지지만 본인은 그 때도 막연했다. 연극영화과에 들어가고도 한참 후에야 영화로 남 못지않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겠다는 깨달음이 왔다. 일단 감이 오자 주저 없이 패를 걸었다. 휴학을 무릅쓰고 <은지화>, <아유레디> 등 상업영화 연출부를 경험했다. 학보사 사회부 기자로 뛰며 관찰한 세상 풍경도 뒷날 영화에 녹아든다.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 진학해 2004년 남자화장실의 먹이사슬을 그린 <W.C.정글> 미쟝센 단편영화제 코미디 부문 본선에 올렸다. 초등학교 동창과 결혼했다. <불법주차>를 촬영하는 동안 매일 새벽 6시에 두려움에 떨며 깨어났다.
<불법주차>는 어떤 영화?
선글라스를 쓴 한 사내(정인기)가 고독하게 하늘을 응시하며 천천히 발을 움직인다. 알고 보면 그는 꽁초를 슬쩍 주워 피우려는 중이다. 화려한 선글라스를 쓴 젊은 여자가 카메라를 조준한다. 알고 보면 그녀는 종일 부대끼고 구박받는 계약직 주차단속요원이다. 둘은 곧 대결을 벌일 참. 남자가 서울역 앞에 몇주째 차를 세워두고 꿈쩍도 않기 때문이다. 그는 구슬로 주렴을 만들며 차 안에서 숙식하고, 마침 재계약 시점을 앞두고 해고될까봐 초조한 단속요원은 나날이 부아가 끓어오른다. 사내는 아내를 기다리는 중이라지만 이따금 그가 누르는 전화번호는 언제나 불통이다. 밀고 당기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서로에게 측은함을 느낀다. 대결전이 끝나고 남자가 “가스 한통 사줘”(부탄가스 캔으로도 자동차가 움직인다는 사실!)라고 청하는 순간, 사랑스러운 반전이 준비된다. 자동차 추격전과 회현 고가도로 주행장면이 포함된 이 영화를 출품하며 감독은 액션스릴러, 코미디, 사회드라마 장르에 모두 동그라미를 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