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쟝센영화제 ‘4만번의 구타’ 부문 수상자들, 김성수 감독과 만나다
김성수 감독은 연출부에게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호된 엄격함은 후배를 향한 관심과 애정의 결과라는 것이 많은 이들의 증언. 그가 공동대표로 있는 나비픽쳐스가 정두홍 무술감독의 서울액션스쿨과 함께 신인감독들에게 액션영화 연출 기회를 줄 것이라는 최근의 뉴스는 이를 증명한다. 그런 김성수 감독이 올해 미쟝센 액션스릴러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2분>의 정태경 감독,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머리 위에 숯불>의 조형찬 감독과 자리를 함께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비픽쳐스 사무실에서 이루어진 이들의 만남은 감독과 심사위원, 학생과 제자(조형찬 감독은 영상원 졸업반이고, 김성수 감독은 영상원에서 강의를 진행한 바 있다), 선배와 후배의 그것으로, 수시로 정체성을 바꿔야 했다.
김성수/ <머리 위에 숯불>은 몇회 만에 찍은 영화야?
조형찬/ 20회차요.
김성수/ 학교에서 그렇게 많이 찍게 해주나?
조형찬/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장비를 빌렸어요. 로케이션이 너무 많아서 하룻밤 사이에 세 군데나 이동한 적도 있었고, 무슨 극기 훈련하는 것 같고 사고도 많았어요. 중간에 발전차도 사고가 나고.
김성수/ 훌륭한 감독이 되려면 영화사 세개는 말아먹어야 된대. 기껏 발전차 한대인데, 뭘. (웃음) 그래도 그렇게 장소도 많고 회차도 많은 영화를 찍은 거 보면 상업영화 현장 경험이 좀 있나봐.
조형찬/ 아뇨, 촬영과 조명을 했던 친구, 현장 진행을 했던 친구 등이 충무로 경험이 좀 있었어요. 특히 현장 진행은 매일매일 섭외가 펑크나면, 그걸 매일매일 메워 나가는데… 그 친구 없었으면 영화 못 찍었을 거예요.
김성수/ 그렇게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는 제작부가 있어야지, 그런 사람이 없으면 영화가 안 찍히지. <2분>은 몇회에 찍었어?
정태경/ 4회차요. 슈퍼16mm로 찍었는데 블로업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프린트는 못 만들었어요.
김성수/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와이드해서 조명이 힘들었을 텐데.
정태경/ 처음에는 새벽 1, 2시쯤의 한밤중으로 시간대를 설정했는데 그래서는 도저히 배경의 실루엣을 살릴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촬영감독 형 제안대로 동틀 때로 시간대를 바꿨어요. 그 마지막 컷만 이틀 동안 찍었어요. 그 시간대에 딱 찍어야 하는 거라서 한번 NG가 나니까 다음날 그 시간이 아니면 안 되겠더라고요.
김성수/ 내 영화를 공개적으로 사람들과 함께 본 것이 단편 <비명도시>였는데, 어느 순간 ‘내가 왜 이걸 찍어가지고 사람들한테 보여주려고 했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웃음) <머리 위에 숯불>은 왜 사람들한테 보여주려고 했던 거야?
조형찬/ (웃음) 저도 사실 막상 찍고 나니까 이야기도 별로 없는 거 같고, 분량은 길고, 스탭들은 고생도 많이 하고, 선생님들은 싫어하고. (웃음) 다들 원하지 않는 프로젝트인데 나는 이걸 왜 하고 있을까 (일동 웃음) 그런 생각도 들고. 지난해에 촬영분을 보고 많이 좌절했어요.
김성수/ 굳이 말하자면 <머리 위에 숯불>은 폭력으로 폭력에 대해 복수를 하는 청년의 분노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응징을 통해 쾌감을 주기보다는 마지막에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맞닥뜨리는 거잖아. 일종의 순환. 하지만 이런 얘기는 평론가들이나 하는 것이고. 이 영화를 만든 감독만의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조형찬/ 저는 이 영화가 아버지의 신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성장영화라고 생각해요. 저희 아버지도 교회에서 일을 하시니까 보고 들은 것도 있고. 스타일 면에서는, 최대한 생략을 하고, 보여줄 것만 보여주면서 영화를 빠르게 진행시켜보고 싶었어요.
김성수/ 아버지가 죽은 그 장소에서 주인공이 택시 운전석에 앉아 있다가, 손님을 태우잖아. 거기서부터 주인공이 택시에 램프를 켜고 밤거리를 운전하는 몽타주 시퀀스는 정말 탁월하더라. 아버지에게 아들이 정서적으로 동화된다는 느낌도 들고,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었지. 근데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리스트를 들고 다니면서 한명씩 제거해나가는 장면은 솔직히 좀 아쉬워. 사실 그런 식의 시퀀스는 너무 관습적이잖아.
조형찬/ 중간중간에 인물도 좀 등장시키려고 했는데 그러다보면 또 너무 길어질 것 같더라고요. 나중에는 너무 지쳐서 돌아다닐 힘도 없기에 거의 두세 군데에서 찍은 걸 이어붙인 것도 있고요.
김성수/ 정태경 감독은 영화를 보면서 아쉬웠던 게 뭐야.
정태경/ 음. 마지막에 주인공이 복수의 대상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부분은 힘을 더 줘도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조형찬/ 제대로 보신 거예요. 보는 사람마다 라스트가 너무 약하다는 지적을 했거든요. 막 해가 뜨려고 할 때 촬영을 했는데, 연기도 별로 좋지 않았지만, 재촬영할 사정이 안 됐거든요. 그냥 포기한 거죠.
김성수/ (웃음) 내가 정태경 감독에게 물어본 건 자기 영화 <2분>을 보면서 아쉬운 점이었는데. (일동 웃음)
정태경/ 아, 그게 아쉬운 게 너무 많아서. 사운드가 특히 아쉬워요. 워낙 바쁠 때 믹싱을 하느라 생각했던 걸 충분히 살리지 못했어요. 주인공의 숨소리나 와이퍼 소리를 극이 전개되면서 점점 고조되도록 하고 싶었거든요.
<2분>의 마지막 와이드 숏 놀랍다
김성수/ 영화가 시작할 때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사실 뭔지 정확히 모르겠는데도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끄는 게 있지. 그런 것들이 축적되면서 마지막에 와이드 숏까지 가는 건데, 그게 정말 최고였어. 상을 받은 것에 대해서 그 숏에 감사해야 돼.
정태경/ 원래 마지막 컷을 하나 더 추가하려고 했는데 다행이네요. 차가 빠져나간 뒤 사고장면을 직부감으로 찍은 컷이 있었는데 그걸 연결해보니 리듬이 이상하더라고요. 처음에 그걸 구상하면서, 사건 현장을 고스란히 롱테이크로 보여주면서 우유팩들에서 나온 하얀 우유가 마치 피처럼 강렬하게 펼쳐지는 걸 생각했거든요. 근데 아무리 해도 그런 느낌이 안 나서. (웃음)
김성수/ 그냥 듣기에는 없는 게 나았겠네. 현재 있는 마지막 컷이 이미 개괄적으로 보여주는 건데 거기서 한번 더 설명을 할 필요는 없지. 보는 사람 입장에선 두번 설명하면 짜증나거든. 어쨌든 나는,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차가 후진하고, 매달려 있던 사람이 털썩 떨어지고, 주위에 오토바이며 우유팩이 보여지는데, 정말이지 마지막에 모든 정보들이 일시에 몰려들면서 설명되는 느낌이 들었어. 그 컷만 그 장소에서 찍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찍은 거지?
정태경/ 아뇨. 내내 그 장소에서 찍었어요. 뒤에 주변 배경이 보이는 거였거든요. 영화 속에 비가 온 뒤라는 설정이어서 매번 바닥을 적셔놓기도 했고요. 중간에 비가 와서, 근처 아파트 주차장으로 차를 끌고 들어가서 조명을 비슷하게 해놓고 주인공 손 클로즈업 같은 걸 먼저 찍은 적은 있었어요.
김성수/ 정태경 감독은 비스콘티 감독 같은데. 버트 랭커스터가 <레오파드>에 출연할 때, 자기가 옷장에서 옷을 흩뜨려놓는 장면을 찍을 때 보니까, 진짜로 너무 좋은 옷들만 있더라는 거야. 그래서 비스콘티 감독에게 “어차피 잠깐 나오는 장면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겠냐”고 했더니 감독이 말하길, “당신이 왕자로 나오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거야. (웃음) 왕자의 옷장에는 진짜 왕자의 옷들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그럼, 영화의 길이는 딱 그 정도로 생각했던 건가.
정태경/ 네. 사실은 졸업영화를 위해 다른 시나리오를 썼는데 촬영 1주일 전에 갑자기 컨셉을 바꾸고 시나리오도 다시 썼어요. 좀 짧은 걸 찍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서.
김성수/ 사실 단편영화를 심사하다보면 영화도 많고, 나랑 맞지 않는 영화도 있어서 피곤할 때가 있는데, 제목이 <2분>인 영화가 있기에 어찌나 반갑던지. (일동 웃음) 근데 분명히 2분이 넘어갔는데 별 정보가 안 나오기에, 테이프를 꺼내서 확인까지 했다니까. 그러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완전히 반해버렸지. 사실 <머리 위에 숯불>은 영화는 좋은데 길다는 얘기를 미리 들었거든. 그래서 계속 딴 영화 먼저 보고 미뤄두다가 거의 마지막에 봤는데, 확 빨려들더라고. 지루하지도 않았어. 나중에 심사위원 감독들에게 보여줄 때도 40분이 넘는다는 얘기에 다들 아우성이었지. (일동 웃음) <2분>이야 단편의 매력과 미덕을 다 가진 영화여서 모두 좋아했지만 <머리 위에 숯불>은 시간의 압박이 큰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워낙 만듦새가 세련되고 좋아서, 약점을 딛고 수상을 했어. 조형찬 감독은 배우들과는 어땠어.
조형찬/ 주연을 맡은 ???는 단편영화에 많이 나왔는데, 주로 로맨틱코미디에서 꽃미남 역할을 했어요. 그게 좀 싫었는데, <발레교습소>에서 약간 어두운 역할로 나온 걸 본 뒤에는 이 친구도 괜찮겠다 싶었죠. 사실 대사도 거의 없어서 리딩도 할 게 없었고, 얘기도 많이 못했어요. 근데 영화가 워낙 길다보니까 함께 다닐 시간이 많았죠. 대사가 많은 장면이 있었는데 동욱이가 거기서 이러면 홍콩영화같이 되는데 이상하지 않냐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더라고요. 가만 생각해보니가 걔 얘기가 맞는 것 같기에….
김성수/ 그래서 수긍했어?
조형찬/ 네.
김성수/ 난 배우가 옳은 얘기를 하면 상처받는데. (일동 웃음) 내가 영화를 선택한 게 잘못이구나, 하는 자괴감에 빠져서 자학하게 돼지. 그날은 콘티도 못 그리고. 배우가 잘 못하면 감독이 할 일이 있는 건데, 배우가 바른말을 하면 내 할 일이 없어지는 거지. (웃음) 조형찬 감독은 <2분>에 대해서 뭐 할 말 없어?
조형찬/ 우선은 영화가 워낙 깔끔했고, 각종 소개글에서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정말로 그 한컷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되는 게 좋았어요. <머리 위에 숯불>도 나름대로는 차를 많이 찍은 영화인데, <2분>을 보니까 차 안에서 정말 다양한 앵글이 나오더라고요. 그러잖아도 물어보고 싶었던 게, 차를 좀 분해하면서 찍은 거죠, 그게?
정태경/ 원래는 폐차장에서 차를 빌려와서 여기저기 절단하면서 찍으려고 했는데 전문적인 기술이 없다보니 힘들었어요. 기껏 한 게 그래서, 차 문을 떼거나 유리를 떼는 정도였죠.
조형찬/ 아. 저는 그런 걸 하나도 못해서….
김성수/ 사실 현대영화에 자동차는 필수적이잖아, 특히 액션영화에서. 근데 영화는 차 자체를 중요한 설정으로 삼고 있으면서 그 앵글이 관습적이지 않아서 좋았어. 뻔하지 않은 숏을 찍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으니까. 보통 TV에서 차신 찍을 땐 제일 편한 위치에 카메라를 놓잖아. 근데 <머리 위에 숯불>에서 운전석 정면과 차 밖을 한번에 잡은 건 어떻게 한 거였어?
조형찬/ 보닛 위에 카메라를 세워서….
김성수/ 근데 카메라 위치를 보면, 운전자의 시선을 가리게 생겼던데.
조형찬/ 그게 아무래도 운전하기는 좀 힘들죠.
김성수/ 그게 위험할 텐데. 하여튼 위험해서 그랬는지(웃음) 그런 것들도 인상적이더라고.
조형찬/ 어차피 다른 차가 앞에서 길을 봐줘서 그렇게 위험하진 않았어요. 아, 그리고 <2분>에서 주인공이 대머리라는 설정이 인상적이었는데.
정태경/ 대머리 배우 구하는 게 참 힘들었어요. 배우 중에 대머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프로필 사진은 다들 가발을 쓰고 찍잖아요. 어디에도 누가 대머리라는 정보는 없고. (웃음) 그래서 고민하다가 결국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같이 작업하기로 한 배우를 만나서 시나리오를 줬는데, 그분이 그걸 읽더니 깜짝 놀라는 거예요. 자기가 대머리인 거 어떻게 알았냐고. 그래서 따로 가발 구입비도 절약하고 본인 가발로 찍었죠. (웃음)
<머리 위에 숯불>에는 규정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김성수/ 그 영화는 양파 껍질을 하나씩 벗기듯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거잖아. 가발도 그 인물의 실체에 다가가는 것과 일맥상통하면서 재미가 있더라고. 근데, 차 위에서 떨어지는 인물은 진짜 사람이야?
정태경/ 인형이에요. 상업영화에 쓰였던 인형을 아는 사람 통해서 빌려온 거죠. 처음에는 그냥 사람으로 할까도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 되겠더라고요. (웃음)
김성수/ 영화를 관객에게 리얼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리얼하게 보이는 걸 목표로 삼아야지 과정 자체를 리얼하게 갈 필요는 없지. 그걸 진짜 사람으로 하면 너무 위험하잖아, 아무리 액션감독이라도. (웃음) 근데 두 사람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액션영화 감독으로 보이지는 않는 것 같아. (웃음)
정태경/ 원래 액션스릴러를 좋아해요. 스릴러에 액션이 들어간 영화, 워쇼스키의 <바운드> 같은 영화. 협소한 공간에서 다양한 앵글과 연출력을 발휘한 그런 영화가 매력적인 것 같아요.
조형찬/ 사실 저는 액션영화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김성수/ 나도 액션영화 별로 안 좋아해. (웃음)
조형찬/ <비트>도 액션이 아니라 성장영화라고 생각했고. 스코시즈 영화 같은 누아르영화는 좋아해요.
김성수/ 그래, 조형찬 감독의 영화는 스코시즈나 폴란스키의 영화처럼 고전영화의 느낌이 들어서 좋더라. 화면은 황폐한데 영화는 센. 두 영화 모두 제목이 상당히 특이한 편이잖아. <머리 위에 숯불>은 무슨 뜻이야?
조형찬/ 성경 로마서에 복수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오는 구절이에요. ‘복수는 나의 것이다.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게 해라. 그러면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과 같다.’ 이런 구절인데, 그 원수가 스스로 부끄러움을 못 이길 거다, 라는 해석이 가능하죠. 워낙 비호감 제목이라 심지어 마지막에 크레딧 올라갈 때 택시 위에 있는 캡만 잡으니까, 저게 숯불이냐는 말도 들었어요. (일동 웃음) 제목만 보고 코미디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고.
김성수/ <2분>은, 왜 하필 2분이야?
정태경/ 그 말은 주변에서 많이 물어봤던 거예요. 제목 좀 바꾸라는 말도 많았고. 뭔가 그런 짧은 시간이 누군가에겐 굉장히 길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어쩌다보니 숫자 2가 떠올랐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어요.
김성수/ 두 사람은 현재 단편을 만든 걸로 보면 충무로에서 당장 상업영화를 만드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영화계에 들어오면 청룡열차를 탄 기분일 거야. 하지만 상업영화 감독이 아니라 오랫동안 자기 영화를 할 수 있는 감독이 돼야 하니까 힘들 때를 잘 견뎌야 돼. 좋은 감독이나 제작자는 추락할 때 판명되는 거야. 떨어지는 관성으로 다시 상승하는 에너지가 있어야지.
조형찬/ 감독님은 학교로는 다시 안 오실 건가요. 1년 동안 휴학하면서 감독님 수업은 못 들었는데 동기들은 감독님 수업을 너무 좋아해서 금방 가시는 걸 아쉬워해요. 뭐랄까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어주셨고, 학생들도 많이 아껴주셨다고 들었는데.
김성수/ 영상원은 학생들은 무척 우수한데 다들 원숙미를 가지려고 하더라고. 사실 그런 건 나중에 원숙한 나이에 도달하면 가져도 되는 거고 젊을 때는 실험과 패기와 열정이 매력이잖아. 나는 잘 만든 신인감독의 영화도 별로 안 좋아해. 모자라더라도 다른 시선과 화법을 가진 영화가 좋지. 그래서 자기에게 좀 솔직해지라고 말을 했지. 처음에 영화를 시작할 때는 자기를 즐겁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잖아. 근데 어느 순간이 지나면 자기를 즐겁게 했던 영화가 아닌, 남의 눈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아. 하지만 자기가 그리워하는 것에 카메라를 들이대야지, 멋지게 찍히는 게 다는 아니잖아. 두 사람,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지?
조형찬/ 저는 9월쯤에 졸업영화를 찍으려고 심심한 멜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요.
정태경/ 저는 얼마 전에 김지운 감독님의 <천상의 피조물>에 연출부로 일했고, 얼마 전에 촬영이 끝났어요.
김성수/ 연출부는 처음이었을 텐데, 어땠나?
정태경/ 많은 걸 느꼈어요. 학생영화에만 참여하다가 그렇게 체계가 갖춰진 시스템을 경험하는 게 색다르더라고요.
김성수/ 학생영화와 충무로 장편이 가진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잘 기억해야 돼. 충무로에 한번 들어오면, 너무 충무로 위주로만 생각하게 되니까. 두 사람한테는 우리 회사와 정두홍 무술감독이 함께하는 액션영화에 참여하지 않겠냐고, 아이디어 있으면 가지고 와달라고 말하긴 했지만, 꼭 액션스릴러가 아니어도 좋은 프로젝트가 있으면 함께 고민해보고 싶어.
정태경/ 감독님은 상업영화에 데뷔한 이래 뭔가 느끼신 것도 많으실 것 같아요.
김성수/ 단편을 찍을 때는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는데 장편에선 내 생각과 판단을 주변 사람과 조율해야 하더라고. 그게 되게 불편했어. 일단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잘 적응하고 타협하고, 말도 잘 들었지. (웃음) 이제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너무 오버해서 조율하는 거, 세상이 원하는 것보다 더 세속적이 된 게 문제지. (웃음) 그러니까 충무로에 너무 적응할 필요도 없어.
조형찬 감독은 누구?
95년에 첫 번째 대학에 입학할 당시 영상원이 생겼다. 그러나 그게 학교일까 싶은 마음과 당시 대부분의 감독들이 연극영화과를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일반 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지만 당시 분위기가 대부분 예술영화를 좋아하는 것이었던지라 오히려 영화에 대한 흥미를 잃고 4년 동안 학교를 다녔다. 뒤늦게 제대한 뒤 그래도 한번쯤 하고 싶은 걸 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영상원에 진학했다. 2학년 때 똑같은 옷을 입고 면접장에 나타난 두 여자의 에피소드를 다룬 <데칼코마니>와 애가 생겨서 고민하는 동거 남녀를 다룬 코미디 <고군분투 인생 대기중>을 만들었다. 모두 20분 내외의 짧은 영화들이었는데, 갑자기 3학년 내러티브 워크숍 수업의 실습 작품으로 무려 40분짜리 영화 <머리 위에 숯불>을 구상했다. 돈에 대한 부담, 학교에서 정해놓은 일정에 대한 부담이 있었지만 딱히 다른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아 모두의 반대를 무릅써야 했다고.
<머리 위에 숯불>은 어떤 영화?
언제나 이웃사랑을 실천하던 택시운전사 아버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살해된다.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어머니와 단둘이 남겨진 열일곱살 난 아들은 세상이 그저 밉다. 아버지의 택시를 끌고 돌아다니던 중 승객을 태우게 되고, 이후 소년은 온갖 손님을 태운 채 도시의 밤거리를 헤맨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아버지의 죽음과 관계된 단서를 접한 소년은 자신의 첫 승객이었던 술집 종업원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한 외로운 싸움에 나선다. 사채업자와 그의 동업자 박영필, 박영필로부터 협박을 받았던 일가족의 자살사건과 거기서 살아남은 또 다른 소년…. 마지막 복수의 기회를 가지게 된 주인공은 그러나 칼을 휘두르지 못한다. 우발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 역시 자신 못지않게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있음을, 그는 외면할 수 없다. 아들은 “그래도 죽지 마라”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그렇게 지켜냈다.
정태경 감독은 누구?
조선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으나 학교에 나갔던 것은 한두번뿐이다. 당시 고향 광주에서는 남자는 공대에 가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했고, 그는 그런 편견의 최대 피해자 중 한명. 졸업도 안 하고 하는 일도 없던 그 공백기는 식구들에겐 온갖 시름의 대상이었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오락기가 생기기 전부터 어린 시절 친구 집에 가면 항상 비디오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영화를 공부하기로 마음먹는다. 서울에 올라와 영화과에 진학한 뒤에는 무슨 영화제에 가든 단편영화를 꼬박꼬박 챙겨보면서 단편의 묘미를 깨달았다. 좋아하는 영화는 <폴라로이드 작동법>처럼 한정된 시공간 안에 풍부한 감성을 전달하는 작품. 20분 정도의 영화를 졸업영화로 준비하던 중 갑자기 짧은 영화를 찍겠다고 돌아선 것도 그 때문인 듯. 이후 제목은 <2분>이면서 러닝타임은 그의 다섯배에 해당하는 영화를 찍어버렸다.
<2분>은 어떤 영화?
누군가의 깊은 숨소리와 몽환적인 음악이 들려온다. 오전 5시11분. 가발을 고쳐 쓰다 벗어버린 이 남자는 차 안에 앉아 있다. 아내와 아들이 한껏 웃고 있는 사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와이퍼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고조시키던 중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들려온다. “아빠, 전화받으세요.” 그렇다. 누군가의 아버지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이 남자는 역시나 누군가의 아버지인 한 남자를 차로 친 것이다. 영원처럼 기나긴 2분이 흐르고, 남자는 자동차에 시동을 다시 건다. 영화의 마지막 컷. 짐짓 결연한 남자의 표정 클로즈업에서 시작한 화면은 카메라가 점차 뒤로 물러남에 따라 이 비극의 전말을 한번에 펼쳐 보인다. 자동차가 후진하고, 보닛 위에 걸쳐 있던 사내의 시체는 아스팔트 위에 내동냉이쳐진다. 우유배달 중이던 사내의 오토바이며 우유팩이 덩그러니 남겨진 채, 저 멀리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새날이 밝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