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장편감독, 단편감독을 만나다 [2]
2006-07-26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정리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펀치 드렁크 러브> 같은 영화가 나올 것 같다

미쟝센영화제 ‘희극지왕’ 부문 수상자, 봉준호 감독과 만나다

2004년 사회드라마 부문 <감상의 이해, 청산별곡>으로 심사위원 특별상, 올해 코미디 부문 <베이베를 원하세요?>로 최우수 작품상과 연기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거머쥔 이상근 감독. 지난해 미쟝센영화제 때 평소 흠모하는 봉준호 감독을 길거리에서 만나 인사했다가 뻘쭘하게 외면당한 뒤 “꼭 복수하겠다”고 다짐(?)했으나, 복수는커녕 이렇게 화기애애한 대화의 자리에서 일년 만에 마주앉게 되었다. 문화센터에서 봉준호 감독의 강의를 섭렵한 것은 물론이고, 그의 습작 시절 다섯컷 작품까지 열심히 챙겨본 진짜 봉준호의 폐인이다. 그렇게나 존경하는 선배 감독 봉준호가 마침내 이상근 앞에 나타나 그와 그의 영화에 관해 요리조리 꼼꼼하고 친절하게 물었다.

봉준호/ 언제 졸업해요?

이상근/ 제대로 다니면 2008년 2월 말이요.

봉준호/ 음… 그래서 심사위원들이 경쟁심을 안 가졌구나. 원래 반쯤 충무로에 나와 있는 사람일 경우에는 미쟝센 심사위원 감독들이 경쟁심이 발동해서 “얘는 좀 밟아줘야 돼. 가뜩이나 투자받기 힘든데 이런 실력 좋은 애들 빨리 나오면 힘들어져. 음, 얘는 몇년 좀 쉬어야겠는데” 이렇게 걸러낸다고. 그러다가 나중에 이현승 감독이 뭐라고 하면 그때서야 양심에 손을 얹고 다시 심사하는 거지. 미쟝센 심사하는 감독들이 심사비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수두룩 빽빽 모여서 자기 전문 장르를 열심히 심사하겠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그게 바로 미쟝센의 음모지. (일동 웃음) 잘 찍었는데도 불구하고 상을 받은 걸 보면 아직 학기가 많이 남아선가 보네? (웃음) 농담이고. 영화에 대해 말하자면, 일단 포복절도하면서 봤어요. 그런데 아직 젊기 때문인지 취향이 정해져 있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 <베이베를 원하세요?>는 그 전 영화 <감상의 이해, 청산별곡>하고도 다르죠? 지금은 이것저것 해보는 입장이에요?

이상근/ 예. 아직 공부하는 입장이라 많이 시도해보고 만들어보려고 해요. 그런 건 있어요. 저는 구상할 때 엔딩부터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감상의 이해…> 때도 그랬고. 끝에서부터 틀을 맞추는 편이에요.

봉준호

봉준호/ 감독 체질이네. 최초 단계의 이유는 잘 모르는 편인 걸 보니. 나도 <지리멸렬> 때 심야에 세 사람이 모이는 뒷장면에서 구상 시작한 거였거든. 그건 그렇고, <감상의 이해…>나 <베이베를 원하세요?>나 모두 주인공이 다 짊어지고 가야잖아요. 배우들도 부담이 많이 되고, 본인도 신경이 많이 쓰였을 텐데, 어떻게 하는 편이야? 나도 영화 찍을 때 배우와의 작업이 제일 어렵거든. 주인공 맡은 그 친구(최유형)도 본인처럼 연출 전공인가요? 그 점에서 전문 배우가 나온 <감상의 이해…>하고는 맥락이 다른데, 그런데도 아주 절묘하게 연출이 됐단 말이에요.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연기부문의 상을 최유형씨에게 주면서) 논란이 있었던 게 사실이에요. 이 상의 의미상 직업배우에게 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점에서. 그래서 그쪽으로 확 쏠렸다가, 갑자기 R모 감독이 “아니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의미 따졌냐? 우린 재밌으면 준다” 그러면서 뒤집혔지.

이상근/ 그 R모 감독님, 류승완 감독님이 뒤풀이 때 저에게 쓱 오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말 거는 것처럼 하시더니, 바로 그 친구 전화번호 따가셨어요. (일동 웃음) “드디어 내가 원하는 배우가 한국에 나타났다”고 하시더라고요.

캐릭터 묘사가 뛰어나다

봉준호/ 그런데 비전문배우일 경우 감독의 손이 많이 갔을 거라고. 나도 이번에 <괴물>에서 임필성 감독을 데리고 서로 지지고 볶고 고생을 했지만…. 어쨌든 과정이 있었을 것 같아. 이 대목을 좀 길게 들어봤으면 좋겠는데.

이상근/ 학부 마지막 학기 때 간단한 단편을 찍을 일이 있었는데, 그때 타이츠를 입고 춤추는 남자가 필요했어요. 그때 최유형이 떠올랐는데, 원래 그 친구가 말하길 자기는 난감한 상황을 즐긴대요. 누가 뭐 좀 해달라고 부탁하면 안 된다고 해놓고, 당일 되면 일찍 일어나서 준비 다하고 오는 친구거든요. 그 친구의 재미있는 성격을 잘 아니까, 언젠가는 한번 써야지 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원래는 여자에게 어떻게 해보려는 엉뚱한 남자의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사정이 안 돼 바꾸다보니 지금처럼 됐는데, 2주일 정도 만나서 길거리에서 동선 맞춰 보고 찍었죠. 다른 것보다 그 친구가 알아서 표현을 잘했어요. 자기가 다 만들어낸 것 같아요.

봉준호/ 사실 대범한 사람보다 소심한 사람들은 하루를 살아도 훨씬 힘들게 살잖아. 난 잘 알지. 나도 성격적으로 복잡한 게 많아서. 소심함에 대한 그런 느낌을 잘 알아요?

이상근/ 예! 좋게 말하면 배려가 너무 심한 거고요. 안 좋게 말하면 너무 소심한 건데요. 예를 들면 차를 안전한 데 주차시켰는데도 자꾸 다시 가보게 되고, 화장실 갔다 온다고 핑계대고 또 가보고 그래요. 그리고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거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주인공 맡은 친구도 모임이 하나 있었는데요, ‘수남모’라고, 수동적인 남자들의 모임이에요. 세명의 수동적인 친구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만나면 커피 마셔요.

봉준호/ 연기에 대해서는 서로 어떤 얘기를 나눴어요?

이상근/ 제 영화가 메타포나 거대 담론이 있는 게 아니고, 상황 설정이 전부잖아요. 그래서 표현방법에 대해서만 서로 많이 이야기한 것 같아요. 제가 얘기한 건 네가 어떤 식으로 액션을 취해야 한다 정도였어요. 처음에는 그 친구가 느끼는 어색한 걸 없애려고 리허설을 많이 했어요. “어차피 네가 전문 연기자는 아니니까 정말 자연스러운 걸 원하는 건 아니다”라고 하면서요. 이 영화 처음 시작할 때는 사실 비전문 배우에게 나오는 어떤 덜컥거림 같은 걸 보고 싶었던 거라서요.

봉준호/ 마지막에 이어폰을 끼고 베이베~베이베~ 계속할 때는 웃기면서도 서글픔까지 느껴지는데, 그런 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 페이소스인지, 아이러니인지, 그냥 슬픔일 수도 있고. 하지만 계속 그런 위트있는 시추에이션만 나열하고 영화를 끝내고 싶지는 않았을 텐데.

이상근/ 몸으로 막 웃기려고 덤비는 것에 거부감이 있어요. 저는 일상에서 픽픽 웃을 때가 많거든요. 사람들 생활에 대한 말만 들어도 웃길 때가 있고요. 아마 어떤 동질감을 표현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맞아 나도 겪어봤어”, 뭐 이런 거요. 이 영화는 그런 공감대를 위해서 짧게 운을 떼는 정도랄까요.

봉준호/ 그래요. 영화가 딱 정확하게 잘 끝나는 것 같긴 한데, 거기에 굳이 한신을 붙인다면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던데.

이상근

이상근/ 원래는 그 친구가 금붕어를 들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준비한 금붕어가 이틀 사이에 다 죽어버려서 못 찍었어요. 금붕어 탈을 쓴 사람이 나와서 지하철 안에서 춤추는 판타지 장면도 생각해봤는데, 주어진 시간 안에 다 찍을 수가 없었어요. 아 맞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으로 이런 게 있었어요. 주인공이 배터리를 사서 끼운 다음에 진짜 노래를 듣는데, 그게 영화 속에서 나오는 경쾌한 박자의 베이베~베이베~ 하는 노래가 아니고 클래식 같은 거였어요. 이를테면 자기가 선호하는 음악은 다른 계열의 음악인데,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뿐이거든요. 결국에는 자기가 듣고 싶은 음악을 들으면서 조용하게 걸어가는 게 끝이었어요.

봉준호/ 음… 그랬군… 외로움을 자주 느껴요?

이상근/ 외로움을 즐기는 편이에요. 그런데 너무 만성이 되면 밑에서 뭔가 눅눅한 액체 같은 것들이 올라와서 몸이 막….

봉준호/ 응? 정액이 올라와요? (일동 폭소)… (다시 정색하고) <베이베를 원하세요?>는 외로움을 줘요. 내가 아까 슬프다고 말했던 것도 궁극적으로 주인공의 외로움이 느껴져서예요. 외롭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행동 안 할 것 같아. 외롭지 않은 사람이라면 음악 재생 안 되면 그냥 문자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본인이 겪은 가장 비슷한 상황이라면 뭐가 있을까?

이상근/ 그대로는 아니지만, 이 영화가 제가 경험했던 거예요. 지하철 안에서 음악 들으려고 하다 배터리가 없어서 그냥 뻘쭘하게 이어폰만 끼고 음악 듣는 척하면서 간 적 있어요.

유머 뒤에 외로움이 느껴진다

봉준호/ 어떤 사람들 보면 그런 뻘쭘함 안 느끼고 장쾌하게 사는 사람들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이 영화보고 나서 도대체 어떻다는 거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그런 관객 접한 적 있어요?

이상근/ 예, 일단 선생님한테 혼났고요. (웃음) 어떤 분은 “영화제의 심사방식이 아무리 감독 개인의 선호 취향이라고 하더라도” 하면서 미쟝센 게시판에 제 영화와 다른 영화를 비교하는 비판조의 글을 쓰셨더라고요.

봉준호/ 우리 입장에서 <베이베를 원하세요?>에 상을 줘야 한다는 건 확실했어요. 어떤 상을 줄 것인가 고민을 했던 거지. 캐릭터 묘사가 뛰어났어요. 물론 R감독의 배우에 대한 가공할 편애도 있긴 했지만, 다른 감독도 다 좋아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었던 케이스였어요. <베이베를 원하세요?> 같은 경우 짧은 개그쇼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여운이 있다는 게 중론이었어요. 여운이라는 건 공감대의 문제고, 극장에 불이 켜지고 나서의 문제니까. 그건 확실히 얼마만큼 공감했느냐, 얼마나 경험했었는가 하고 연결되는 거니까. 그래서 아까 외로움에 대해 물어본 거고. 처음 찍은 단편은 뭐예요?

이상근/ <꼽슬머리>라고, 99년에 찍은 건데요, 그것도 제 얘기예요. 제가 곱슬머리거든요. 한때 곱슬머리를 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었거든요. 직모가 부러웠던 시절이 있었어요.

봉준호/ 그건 내가 잘 알지….

이상근/ 저는 중2 때부터 갑자기 꼬부라지더라고요.

봉준호/ 그렇지, 그렇지. 근데 사람들 그거 잘 안 믿죠? 나도 원래 찰랑찰랑한 직모였는데, 고1 겨울방학 때 갑자기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고2 되니까 이렇게 되더라고. 방학 끝나고 학교 가니까 얘들이 “야 저 새끼 저 얼굴에 파마했다. 집에 불났냐?” 막 이랬어. 그 뒤에 알게 된 사람 중에는 내가 파마한 줄 알고 은근히 비웃는 투로, “나름 멋을 부리시네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웃음) 그럼, 그 영화 스토리는 어떤 거였어요?

이상근/ 곱슬머리 남자애가 어떤 여자애를 좋아하는 건데, 자격지심에 미리 머리를 편 다음 고백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거예요. 결국 머리를 빡빡 밀어요. 원래는 그 여자가 그 남자를 좋아했는데도요.

봉준호/ 앞으로도 그런 개인의 콤플렉스에 대한 주제를 다룰 계획이 있어요?

이상근/ 지금까지는 소심하거나 상처받은 남자들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다른 이야기를 일부러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 좀 들어요. 너무 똑같은 거 같아서요.

봉준호/ 나는 <베이베를 원하세요?> 보면서 저걸 일종의 프롤로그로 한 장편을 만들면 <펀치 드렁크 러브> 같은 영화가 나올 것 같다는 상상을 해봤거든. 그런 유의 영화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아. 나중에 그런 장편 한번 찍어봐. 되게 잘 찍을 것 같아.

이상근/ 폴 토머스 앤더슨하고 비교하는 건 좀….

봉준호/ 다 자기 방식대로 뛰는 건데 뭐. 갈지자로 뛰는 사람도 있고, 텀블링으로 뛰는 사람도 있고, 아까 미쟝센 음모론 이야기했지만, 그 음모론의 벽을 뚫고 나왔으니까, 더더욱 기대가 돼. (웃음)

이상근/ 제가 걱정하는 건, “얘가 학생 때는 참 잘했는데… .어쩌다…” 이런 소리 나중에 들을까봐 고민이에요. 차라리 가만있다가 나중에 탁 솟아올라야 하는 건데.

봉준호/ (웃음) 별 걱정을 다하네. 아니야. 계속 쭉 잘하면 돼.

이상근 감독은 누구?

성명 이상근. 29살. 영상원 전문사 1학기 마침. 1학기 초급워크숍 과제물로 만든 <베이베를 원하세요?>로 올해 미쟝센영화제 코미디 부문 최우수 작품상과 연기부문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뮤직비디오 및 극영화 연출부 경험 약간. 결혼식 비디오도 100쌍 정도 찍었음. 친한 막내삼촌에게서 세번의 제작비를 대 주겠다는 약조를 받았으나 이미 한번에 너무 크게 받아서 다시 손벌려야 할지 고민 중. 그러나 돈이 끊길 때쯤 되면 어디선가 꼭 대주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대단한 행운아. 중학교 2학년 때 별안간 곱슬머리가 되었으나, 고1 때 같은 경험을 한 봉준호 감독 이외에는 그 신기한 신체 변화를 믿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음. ‘소심함과 자격지심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많음. 그래서 자신의 곱슬머리 콤플렉스를 첫 단편의 소재로 삼음. 앞으로는 좀 변화해볼 생각.

<베이베를 원하세요?>는 어떤 영화?

3호선 전철역. 비트있는 음악을 듣는 듯 몸으로 리듬을 맞추고 있는 힙합 청년. 그 옆에 뻘쭘하게 들어서는 주인공. 봉준호 감독이 “억울한 풍경의 얼굴”이라고 칭한 바로 그 남자(최유형). 한눈에도 어정쩡하다. 힙합 청년을 쳐다보다 눈길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커피 자판기로 향한다. 커피 한잔 고르는 데도 한참 걸린다. 소심한 게 틀림없다. 그런데 버튼을 누르고 커피를 기다리는 순간 전철이 들어온다. 급하게 커피를 마시고 전철을 타는 남자. 자리가 비어 앉으려는데 다른 사람이 얼른 채가고, 무안한 김에 그냥 전철 안내도를 보는 척한다. 겨우 앉아 MP3로 음악을 들으려는 찰나, 그런데 이번에는 이어폰 줄이 엉망으로 꼬여 있다. 한참을 낑낑대다 손바닥으로 미친 듯 비벼서 겨우 귀에 걸쳐놓고 보니, 이번에는 배터리가 없어 작동이 안 된다. 진땀이 나기 시작한다. 모두가 나(그)만 쳐다보는 것 같다. 에이 모르겠다. 이 순간 이 영화의 유일한, 그리고 코믹한, 그러나 가련한 대사가 튀어나온다. 베이베∼베이베∼. 마치 비트있는 음악을 감상하는 척 베이베∼베이베를 토해내는 남자. 10여분간 펼쳐지는 이 우스꽝스러운 소심남의 작은 수난극으로 영화는 이런 공감을 촉구한다. 혹시 여러분은 이런 경험 없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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