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부터 4월까지 <메종 드 히미코> <박치기> <스윙걸즈> <린다린다린다>가 매달 한편씩 차례로 개봉했다. 그 선두는 역시 최근 일본영화에 주목하게 만드는 연원을 제공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이누도 잇신이 만든 <메종 드 히미코>였다. <조제…>에 환호했던 관객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차 이누도 잇신의 영화를 반겼고, 그 관심의 폭은 이미 다른 영화들에도 미쳐 있었다. 네편의 영화는 적게는 2만에서 많게는 10만 사이를 오가는 관객을 모았다. 입소문은 늘어갔고, 마니아들은 더 분명하게 수면 위에서 형성됐다. 급기야 7월에 열린 일본인디필름페스티벌은 매진을 기록하며 보기 드문 성공 사례를 남기고 있다. 물론 이 성공을 뒷받침한 외부적 요인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니아들을 상대로 한 영화사의 소규모 장기 상영 전략과 일본영화 전용관 개관에 따른 여파, 일본 텔레비전 드라마의 일반화로 인해 일본 대중영화의 소재와 캐릭터와 이야기 방식에 더욱더 친숙해진 관객, 그중에서도 다운로드족의 일본영화에 대한 높은 관심도와 그에 이어진 극장으로의 발걸음, 그리고 아사노 다다노부와 그에게서 이제 막 왕관을 이어받은 오다기리 조, 쓰마부키 사토시에 대한 소녀들의 열광이 맞물린 결과다. 하지만 간단한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 할지라도 만약 영화 자체에 이유가 없었다면 이 호응은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때문에 어떤 호소와 호응이 작동한 것인지 영화를 빌려 말하는 과정이 생략된다면 이 외부 요인에 대한 분석은 현상에 대한 수치적 환산이거나 전략에 대한 결과론이거나 해석을 위한 치장이거나 산업적 보고서에 불과할 공산이 크다.
그러므로 다시 <메종 드 히미코> <박치기> <스윙걸즈> <린다린다린다>로 돌아가자. 올해 상반기에 개봉한 일본영화는 모두 합쳐도 이 네편의 영화와 서너편의 공포영화와 한편의 멜로드라마(<언러브드>) 정도다. 그러나 올해 일본영화에 대한 관심도를 달궈놓은 것은 함량 미달 수준으로 개봉된 서너편의 공포영화가 아니라 위에 열거한 바로 이 영화들이다. 이 작품들 사이에는 묘하게도 어떤 내용적 연쇄의 지점이 있다. 그게 주목의 연쇄 또한 만들어냈을 것이다.
궤도의 이탈, 밀려쓰는 답안지의 재미
지금 이 목록에 5월 개봉작 <언러브드>가 빠져 있는 이유가 네편의 영화를 묶는 첫 번째 고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언러브드>는 네편의 영화에 비해 결코 질적으로 떨어지는 작품이 아니다. 그보다는 다른 종류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에 관한 영화다. 비교하자면, <언러브드>를 사랑한 관객의 이유와 <메종 드 히미코>를 사랑한 관객의 이유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건 자기를 사랑하는 그녀를 사랑할 것인가, 남을 사랑하는 그녀를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언러브드>의 여주인공 미치코와 <메종 드 히미코>의 사오리는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진 여자다. 한명은 자기애의 실현을 꿈꾸고 있고, 또 한명은 타자에 대한 박애를 꿈꾼다. 두 인물은 모두 누군가의 방문을 받지만, <언러브드>의 미치코가 가쓰노와 시모카와라는 남자의 방문을 차례로 받는 것과 <메종 드 히미코>의 사오리가 게이 아버지 히미코의 애인인 하루히코의 방문을 받는 것은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 차이란 나의 영역에서 남을 받아들일 것인지, 나의 궤도를 이탈해 누군가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를 이해할 것인지의 차이다. <언러브드>에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여주인공 미치코가 하는 것은 자기 세계에 대한 고민이자 확립이다. 누구도 그녀의 세계를 흔들 수 없고, 끝내 그녀는 자기의 의지를 저버리지 않는다. 미치코는 나의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같은 자리에서 고민하고, 그 대답을 통해 얻은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사오리는 나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이 없다. 애욕의 흔적은 더 없다. 새로 접한 게이 노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관심이 더 있고 그걸 유지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자아의 목표치다. <언러브드>에는 정박의 고수가 있지만, <메종 드 히미코>에는 이탈의 유혹이 있다.
이탈의 스토리는 일찌감치 <조제…>에서 볼 수 있다. 유모차에 뭔가를 싣고 다닌다는(사람들은 그걸 황금일 거라고 한다) 괴이한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쓰네오가 새벽녘에 그 할머니를 우연히 만나고, 떠밀려 내려오는 유모차 안의 조제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사건은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는 주인공의 이탈의 시작이다. 이제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땅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이미 정해놓은 규율을 바탕으로 한 삶 안에서 펼쳐진다. 사랑도 그 타자의 일상을 끝까지 인준함으로써만 가능하며, 그렇지 않다면 쓰네오가 그랬듯이 떠나야 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러브스토리는 그런 이유에서 안타깝긴 해도 담담할 수밖에 없는 진리다. 그 점이 바로 이 영화가 사랑에 대해, 결별에 대해 정당하게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 이유였을 것이다.
<스윙걸즈>의 소녀들이라면 그 상황을 코믹하게 맞을 것이다. 낙오생 소녀들이 스윙재즈의 멋을 알아버린 건 수업을 벗어나 밴드부의 도시락을 갖다주려다 어영부영 잘못된 시골로 들어서고, 도시락은 다 상해버리고, 그걸 먹은 밴드부원들이 식중독으로 병원에 실려가고, 그녀들이 그 자리를 강제로 대신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린다린다린다>의 송은 부주의한 성격 탓에 그만 말을 잘못 알아듣고 밴드에 들겠다고 허락한 것이고, <박치기!>의 고우스케는 일본 여고생을 괴롭힌 적이 없지만 어쨌든 같이 휩쓸려 봉변을 당한 덕에 절실한 사랑에 빠지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모든 이야기가 한칸씩 밀려쓰는 답안지다. 그런데 그렇게 밀려쓰다보니 그들에게는 목표가 보인다. 러브스토리이건 코미디이건, 이것이 일단의 재미를 이룬다.
마을이라는 공간, 청춘이라는 시간
그런데 이탈은 이동의 문제고, 경계를 넘어서서 진입하는 것의 문제다. 그게 어디고, 언제쯤 벌어지는지는 그 때문에 중요한 물음이 될 수밖에 없다. 네편의 영화에서 그것을 공간적으로 나누면 마을이 되고, 시간적으로 나누면 청춘이 된다. 가령 이렇게 나누면 더 명확해진다. 우리는 한편의 ‘마을영화’(<메종 드 히미코>)와 또 한편의 ‘마을·청춘영화’(<스윙걸즈>)와 두편의 ‘청춘영화’(<박치기!> <린다린다린다>)를 본 것이다. ‘마을영화’란 실은 어디에도 없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만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마을에 사는 구성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같이하는 이야기가 일본영화 속에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본다. 그것은 가족영화와는 또 다른 것이어서 항상 내부의 갈등보다는, 어찌됐든지 완성되는 화해와 합심의 드라마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 마을에는 항상 피로 맺은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애환과 정이 넘친다. <메종 드 히미코>에서라면 그것은 게이 공동체로서 히미코의 집이다. 그곳으로 진입한 사오리는 결국 그들의 동반자가 되어 남기로 한다. 반면, 마을영화와 청춘영화의 양면을 모두 지닌 <스윙걸즈>는 마을영화가 추구하는 합심과 화해의 드라마를 청춘이라는 유한적 시간 속에서 한 목표를 향해 함께 가는 행위로 대신함으로써 충족시킨다. 만약 이 두편의 영화에 호응한 관객이라면 마을영화와 마을·청춘영화의 이 낭만적 화해 무드에 빠져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의미가 더 큰 부분을 차지할 경우에, 즉 주인공들이 온전히 청춘영화의 틀 안에 있을 경우에, 그 이탈의 시간이 잠정적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특히나, 청춘이란 잠정과 유한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반영이다. 그들은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시간을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는 강요를 피할 수 없다. 마을영화에 절반을 걸치고 있는 <스윙걸즈>는 그 요구를 간단하게 저버리고 그냥 그 자리에 화합의 집단적 기념비로 남는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더 청춘영화의 범위 안에서 운위하는 <박치기!>와 <린다린다린다>는 좀 다르다. 게다가 이 두편의 영화는 정치적 함의의 개입을 허용하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유한적 시간이란 좀더 절박한 무엇이다. <박치기!>는 이미 일본 안에 들어와 있는 조선인들의 이야기고, <린다린다린다>는 일본 여고생과 한국 여고생의 교집합이다. 적어도 이 두편에는 <스윙걸즈>와 달리 소속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박치기!>에서 일본인 친구가 죽자 마치 그 일원처럼 여겨지던 교우스케는 갑자기 한국인 어른에 의해 돌아가라며 내쳐진다)과, 무료한 속도를 따라 이어지는 장애 내지는 그걸 넘어서려는 시도(<린다린다린다>에서 그녀들의 침묵과 대화)가 있다. 그 때문에 <린다린다린다>와 함께 이야기될 만한 영화는 <스윙걸즈>뿐만 아니라 <박치기!>일 수도 있다. <린다린다린다>는 <박치기!>의 인물들이 나눈 약속에 대한 미래의 실현과도 같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박치기!>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간의 싸움 끝에 급기야 조선인 학생이 죽는다. 그런데 그와 일본인 학생 교우스케가 했던 미완의 약속을 기억하자. 그들은 언젠가는 함께 밴드를 결성해 노래 부르자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역사에 떠밀려 사멸해버린 그 약속은 40여년이 지난 뒤 <린다린다린다>에서 송과 그 친구들의 노래로 드디어 지켜진다. <박치기!>를 혹은 <린다린다린다>를 선호한 관객이라면 이 과거와 미래가 나눈 미완과 실현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충분히 흥미로울 것이다.
이탈의 유한적 시간을 만끽하기 위한 콘서트 혹은 축제
자, 다시 마을과 청춘을 합쳐서 이야기하는 게 가능하다. 이왕 밀려쓴 이 답안지의 이야기는 끝까지 밀려나가 무언가 다시 맞춰지는 기적을 이뤄야만 한다. 그럼 무엇으로 가능할 것인가. 다시 말해 네편의 영화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보기의 쾌감을 혹은 감동을 선사해준 장면들은 어디에 있었던가. 이 영화들은 모두 그 자리에 ‘축제’가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잘못 시작된 출발이었거나 아니거나 이제 이 축제의 자리를 빛내기 위해서 달려간다. 그게 유한적 시간 속에서, 그 너머의 영역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는 방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축제가 스포츠가 될 경우에는 실패의 확률이 높다. 그건 마음의 언어가 아니라 몸의 언어로 하는 축제이기 때문이고, 가령 <박치기>의 경우처럼 앙금을 제거하기 위한 자리라면, 그런데 쉽게 해소될 수 없는 자리라면, 몸과 몸이 부딪치면서 소통의 언어는 날아가고 몸의 본능적인 열기만 남기 때문이다. <박치기!>의 진보적인 일본 선생이 (나쁜) 전쟁은 (착한) 전쟁으로 풀어야 한다며, 조선인 고등학교와 일본인 고등학교 사이의 친선 축구 시합을 성사시키지만 결국 학생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시합은 발길질과 주먹질의 난투극으로 끝난다. 때문에 그것은 곧잘 공연으로, 특히 음악회나 연주회가 되어야만 한다. 음악이 매개가 되는 것이다. <메종 드 히미코>에서 사오리와 게이 노인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연주와 춤이 흐르는 나이트클럽에서다. <스윙걸즈>와 <린다린다린다>의 소녀들은 음악제와 학교 문화제의 무대에 오르는 순간 뜨거운 공감의 열정을 느낀다. <박치기!>의 배경인 1968년은 비유적으로 봐도 혁명적 페스티벌로 점철된 시간이었고, 교우스케가 라디오에서 <임진강>을 부르는 오디션은 그걸 듣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보이지는 않지만 뜨거운 감동의 콘서트다. 인물들은 이 축제를 완성하기 위해, 즉 잠정적으로 주어진 이탈의 유한적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재즈를, 펑크를, 포크를 연주하고 노래한다. 그들은 그렇게 마무리하고 싶어하고, 우리도 이 순간 즐거워하거나 감동한다.
차이와 다름에 관한 일본영화식 사지선다
하지만 일본영화에 관한 이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만약 이와이 순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올해 개봉된 목록에 올랐다면 어땠을까.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도 음악회 장면이 있었다. 아름다운 화음의 아카펠라가 울려퍼지고 그 정도면 외양적으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 성공은 피아노를 잘 친다는 이유로 이지메를 당한 여학생 구노가 일부러 자신의 자리를 빼고 만든 작곡에 힘입은 화음이다. 선생도 나머지 학생들도 소품처럼 무대 한편에 서 있는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른 체한다. 그건 아름다운 합창이지만, 이지메가 만들어낸 화음이다. 영화 속에는 인물들이 신봉하는 가수 릴리 슈슈의 콘서트도 있었지만, 그걸 보기 위해 기다리는 팬들의 입장은 무엇이었나. 자신이 생각하는 릴리 슈슈에 대한 의미에 반하는 남의 어떤 의견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축제는 갈등을 해소 못할 뿐 아니라, 더 드러내는 사건이다.
여기까지 미쳤기 때문일까. 이쯤에서 이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말하자면, 혹시 우리가 올해 본 네편의 마을·청춘영화들은 이탈을 기회 삼아 차이와 다름의 인준에 관해 말한, 이른바 일본영화식 ‘톨레랑스’에 관한 네 가지 쌍곡선은 아니었을까. 무작정 흥겨움으로 달려나가며 다름에 대한 인식을 제외한 의아한 화합(<스윙걸즈>), 또는 다름을 인정하되 그 안으로 들어가 일원이 되는 것의 낭만(<메종 드 히미코>), 또는 공존하지만 인정하기까지의 어려움(<박치기!>), 그러나 다시 그 다름의 공존을 인정하면서 같이하는 것의 아름다움(<린다린다린다>)에 관한 네 가지 묶음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걸 보는 우리의 제각각 선택과 호응은 아니었을까. 처음 이 봇물을 쏟아놓은 <조제…>의 러브스토리가 톨레랑스에 기반한 러브스토리였음을 기억하자.
<유레루> <빅 리버> <전차남>이 온다고 한다. <유레루>와 <빅 리버>는 스타 오다기리 조의 출연작이고, <전차남>은 드라마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이 영화들이 도래하면 또 다른 일본영화의 면모가 얘기돼야 하겠지만, 그래도 마을영화와 청춘영화는 다시 찾아올 것이고, 그 영화들의 성격상 톨레랑스에 대한 담화는 그때마다 다시 이야기돼야 할지 모른다. 그때 과연 우리는 어떤 영화를 선택하여 울고 웃을 것인가. 그건 단순히 재미로 말해질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그건 우리의 톨레랑스에 대한 인식을 시험받는 우회의 장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올해 우리는 그 경험을 한번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