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독 일본 배우들의 방문이 잦았다. <메종 드 히미코>의 오다기리 조, <박치기!>의 사와지리 에리카와 다카오카 소우스케, <나나>의 나카시마 미카와 나리미야 히로키, <좋아해>의 미야자키 아오이와 니시지마 히데토시 등. 아사노 다다노부가 2001년 그의 20번째 영화 <일렉트릭 드래곤 80000V>를 마치고서야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이들의 방문은 매우 빠른 편이다. 일본 배우에 대한 갈증의 해소. 하지만 이는 외우기 어려운 그들의 이름만큼 생소한 행사이기도 했다. 문화지체의 역설적인 현상. 1998년까지 금지된 일본문화 개방은 한국 관객들을 지체된 문화적 시차에 길들여왔다. 일본 배우는 당연히 지각생이라는 생각. 그래서 2006년, 실시간에 가까워진 일본 배우들의 방문은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대체 이 배우는 일본에서는 얼마나 유명할까. 어, 얘는 노래도 하고 드라마도 했네. 이 꽃미남은 오다기리 조보다 나이가 많은 건가? 일본 배우에 대한 무작위 질문들. 일본 인디영화의 작은 성공이 불러일으킨 이 호기심은 인디영화라는 프레임 속에서 더욱 증폭되었다.
메이져와 인디, TV와 영화, 구분없이 출연하는 배우들
일본 인디영화에 대한 확인 하나. 인디영화는 있지만 인디 배우는 없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배우들이 메이저와 인디영화 사이를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한다. <스윙 걸즈>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등에 출연했던 다카하시 잇세이는 올해 부천영화제에서 “인디영화든, 메이저영화든 이는 별로 상관이 없다. 다만 작품과 캐릭터를 볼 뿐”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는 배우 한명의 개인적인 연기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예는 계속 이어진다. 오다기리 조는 상업영화인 <시노비>와 <더 우쵸텐 호텔> 사이 <스크랩 헤븐>을 찍었고, 쓰마부키 사토시도 <워터 보이즈> 이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출연했다. 이에 <지옥갑자원> <미트볼머신> 등 B급 공포영화를 주로 만들어온 야마구치 유다이 감독은 “일본에서는 인디와 메이저 사이의 경계가 그리 크지 않다. 물론 최근에는 대작화·리메이크화 경향이 심해지고 있어 양극화하고 있지만 한국처럼 제작비의 차이가 별로 심하지 않다”고 답한다. 이어서 그는 일본 상업영화의 평균 제작비가 2, 3억엔 정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3천만엔∼1억엔 사이 영화들의 층이 넓으며, 이 점이 일본 배우들이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다”고 밝힌다. 그래서 일본 인디영화는 단관 개봉으로 공개되는 영화도 있지만, 레이트 쇼(하루 1회, 저녁 늦은 시간대에만 상영하는)나 미니 시어터(도쿄에서 먼저 개봉한 뒤 중심 도시와 외곽 지역으로 상영을 확대해나가는) 방식으로 상영되는 영화도 있다.
TV와 영화 사이의 이동도 자유롭다. TV 드라마의 성공으로 스타가 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일본 배우들의 매체 이동은 흔한 모습이다. 이는 일본 드라마들이 사전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점, TV가 스타성·대중성 확보에 더 용이하다는 점 등과 관련이 있다. NHK의 위성방송인 <BS-i>의 니와타몬 프로듀서는 “최근에는 영화쪽 인력들이 TV로, TV쪽 인력들이 영화로 많이 이동하고 있는 추세다. 과거 상호 매체간에 교류가 거의 없었던 것에 비하면 주목할 만한 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배우들의 이동도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는 것. 드라마 <시효경찰>도 영화 <인더풀>에서 함께했던 미키 사토시 감독과 오다기리 조가 다시 뭉친 작품이다. 그래서 일본 배우에 대한 접근은 TV와 영화, 메이저와 인디의 구분 없이 시작돼야 한다.
TBS 드라마 <오렌지 데이즈>의 커플 쓰마부키 사토시와 시바사키 고의 사례. <메종 드 히미코>에서 ‘피키피키피키∼’를 외치며 깜찍한 포즈를 보여줬던 시바사키 고는 화장품 광고로 인기를 얻은 배우다. 한국에서는 2001년 개봉한 영화 <고>의 여자주인공으로 이미 얼굴을 알린 바 있다. 미이케 다카시의 공포영화 <착신아리>, 사부 감독의 <드라이브> 등 인디와 메이저를 오가며 연기하고 있는 그녀는 가수로도 유명하다. 구사나기 쓰요시가 주연한 영화 <환생>의 엔딩곡이 그녀의 목소리. 2004년 쓰마부키 사토시와 함께 출연한 드라마 <오렌지 데이즈>는 그녀의 인기에 기폭제가 된 작품이다. 7월15일 개봉해 일본 역대 최고의 흥행성적을 내고 있는 영화 <일본침몰>에서도 주연으로 출연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쓰네오로 유명한 배우 쓰마부키 사토시는 한국에도 많은 팬을 갖고 있는 스타. 최근에는 시바사키 고와 함께 영화 <도로로>의 촬영을 마쳤다. 20편이 넘는 드라마와 역시 20여편의 영화에 출연한 쓰마부키 사토시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 중인 배우 가운데 한명. TV 드라마 <슬로우댄스>,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의 <봄의 눈>, 히로키 류이치 감독(<바이브레이터>)의 <온화한 생활> 등, 최근 3년간의 필모그래피는 그가 TV와 영화, 메이저와 인디를 꾸준히 오가며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쓰마부키 사토시와 비슷한 외모로 역시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는 배우로는 에이타가 있다. 코카콜라 CF로 인기를 얻은 뒤, TV 드라마 <워터 보이즈>와 <오렌지 데이즈>에 출연하며 스타로 자리 잡은 그는 도요타 도시아키 감독의 영화 <나인 소울즈>와 <공중정원>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국내에 소개된 영화로는 <아즈미>와 일본 인디필름페스티벌의 개막작 <좋아해> 정도. 최근에는 나카시마 테쓰야 감독(<불량공주 모모코>)이 연출한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 출연했다. 여자 배우로는 사와지리 에리카를 주목할 만하다. <박치기!>에서 수줍은 재일 한국인 경자로 출연한 그는 그라비아(수영복 사진을 주로 찍는) 모델 출신. 일본에서는 귀여운 딸의 이미지로 10대는 물론 중년 남자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최근에는 상업영화와 TV로 무대를 옮겨 활동하고 있다. 공포영화 <유실물>과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1리터의 눈물> 등이 대표작. 현재는 드라마 <태양의 노래>에서 희귀병으로 태양을 보지 못하는 소녀를 연기하고 있다.
인디영화의 성공을 이끈 톱스타들의 자유로운 연기
물론 영화 출연만을 고집하는 배우도 있다. 데뷔 초반 몇 편의 드라마를 제외하면 모두 영화에만, 그것도 인디영화에만 출연해온 아사노 다다노부는 아티스트적인 분위기로 현재 국내에서도 가장 지명도 높은 일본 배우다. 그는 이에 대해 “다른 10대 스타처럼 활동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영화를 택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현재 ‘아사노류’의 배우는 많지 않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영화 <아무도 모른다>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야기라 유야 정도가 고작. 수상소감을 묻는 질문에 “나의 꿈은 축구선수이며, 시험을 못 봐 속상하다”고 한 답변은 연기에 대해, 스타가 되는 일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던 아사노 다다노부의 데뷔 초기 모습을 연상시킨다. 패션감각이 돋보이는 또다른 ‘아티스트형’ 배우로는 오다기리 조와 나리미야 히로키가 있다. 일본의 조니 뎁이라고 불리는 오다기리 조는 TV 드라마 <가면 라이도 쿠우가>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 이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밝은 미래>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주목받았다. 현재 일본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배우 중 한명이다. “무언가 표현하지 않고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그림, 글, 음악, 영화연출에도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3월 영화 <나나>의 개봉으로 한국을 찾았던 나리미야 히로키는 유쾌한 아티스트형 배우.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지만 보통의 10대 스타와는 달리 연극 무대로 연기를 시작했다. 밝은 미소와 장난꾸러기 같은 행동이 매력 포인트. 연기에 대해서는 “무언가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하지 않으면, 고교 시절을 보낼 수 없었다”며 진지한 답변을 남기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패션감각이 뛰어난 그의 헤어스타일을 따라 ‘히로키 컷’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영화 <나나> <심호흡이 필요하다>와 드라마 <고교교사2>가 있으며, 한국에서는 드라마 <고쿠센>의 노부로 더 유명하다.
<나나>에 함께 출연했던 미야자키 아오이는 연기파 배우쪽에 가깝다. 일본 인디필름페스티벌의 개막작인 <좋아해>로 7월 한국을 찾았던 그는 큰 눈망울과 환한 미소가 아이돌 스타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배우. 하지만 연기실력은 첫 주연 데뷔작인 영화 <해충>의 프랑스 낭트3대륙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일치감찌 증명된 바 있다. 밝은 이미지와는 달리 상처받은 캐릭터를 줄곧 연기하고 있는 미야자키 아오이의 현재 출연작은 NHK 아침 드라마 <순정 반짝>. 안방 드라마의 친숙한 이미지와 작가영화의 고독한 모습이 동시에 묻어난다. 그녀와 친구 사이며 이름도 같은 배우 아오이 유우는 더 독특한 위치에 서 있다. 뮤지컬 <애니>로 데뷔한 뒤 CF와 잡지 모델로 인기를 얻은 그녀는 우리나라의 이나영처럼 신비스러운 느낌이 강한 배우. 아이들 스타답지 않은 어두운 이미지가 매력적이다. 그녀를 스크린으로 불러온 작품은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원조교제를 하는 소녀 쓰다로 출연한 그녀는 드뷔시의 선율에 어울리는 몽환적 연기로 주목받았다. 이후에도 <하나와 앨리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등 주로 인디영화에 출연해온 그녀는 지난해 2차대전을 소재로 한 전쟁영화 <남자들의 야마토>에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도에이비디오주식회사의 프로듀서 다이스케 스즈키는 “메이저 영화사에도 작은 영화를 보는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경계는 없을수록 좋다. 다양한 영화의 가능성이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배우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다양한 연기는 매체를 구분하지 않고, 영화의 크기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연기하는 배우들의 토양에서 비롯된다. 2006년 상반기, 일본 인디영화들의 작은 성공은 어느 정도 배우들의 유연성에 빚지고 있다. 톱스타 배우들이 톱스타를 넘어선 다양하고 유쾌한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TV와 영화, 메이저와 인디의 경계가 허물어졌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시너지. 올 상반기 한국을 다녀간 일본 배우들이 남긴 발자취다. 한국영화계에선 좀처럼 보기 어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