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가는 햇살 속, 한적한 교외 묘지에 두 모녀가 찾아든다. 대단할 것 없는 이들의 소풍에는 왠지 모를 슬픔이 감돈다. 그 슬픔의 정체는 마지막에 밝혀진다. 모든 것을 한순간에 설명하는 반전 아닌 반전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산드라, 다이애나, 홀리, 소니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녀들의 이름 아홉개를 제목 삼아 아홉개의 짧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를 통해 삶과 세상을 말하는 영화 <나인 라이브즈>의 마지막 단편 <매기>의 내용이다. 일찍이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을 통해 차분히 인물을 응시하는 섬세함으로 나른한 일상을 마법처럼 빛나게 만들었던 로드리고 가르시아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화법을 한층 밀어붙였다. 촬영감독에서 시나리오작가, 영화감독에서 TV 연출자, 그리고 다시 작가 겸 감독으로 수시로 정체성을 바꾸어온 그는, 인간을 우주로 바라보는 진심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그를 보기만 해서는 알 수 없을, 그의 삶과 영화를 전한다. 그의 영화가 그러하듯, 짧지만 강렬하고 소박하되 결정적인 이 만남이 끈질긴 인연으로 이어지길 바라본다.
2000년 가을. 우리는 한자리에 모이리라 기대하기 어려웠던 여배우들을 한 영화에서 맞닥뜨렸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글렌 클로스, 홀리 헌터, 카메론 디아즈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무장한 이 영화는 소리없이 개봉했다 사라졌다. 그나마 제대로 기억하기 힘든 긴 제목 때문에 말랑말랑한 로맨틱코미디를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섰다 당황했던 관객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별다른 사건없이 살아가는 여인들의 지극한 일상을 담고 있을 뿐인 이 영화는 특별했다. 짝사랑하는 남자의 전화를 노심초사 기다리는 산부인과 의사, 쿨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부남의 아이를 낙태하는 은행 매니저, 훌쩍 자란 아들의 모습에 놀라는 동화작가, 에이즈로 죽어가는 애인을 바라보는 점술사, 연애에는 숙맥인 형사 언니와 자신감에 넘치는 맹인 동생 그리고 유서도 남기지 않고 자살한 여인. 희미한 연관을 맺고 있는 다섯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그녀를…>에는 이름없이 살아가는 여인들의 노곤한 삶과 그 사이로 내비치는 말간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극장문을 나서고도 오래도록 ‘그녀’들은 잊혀지지 않았다.
<그녀를…>의 감독은 로드리고 가르시아.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콜롬비아의 대문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들이며 <그녀를…>의 촬영감독 에마뉘엘 루베즈키 밑에서 몇편의 영화를 촬영한 촬영감독이기도 하다. 그리고 6년. 로드리고 가르시아의 또 다른 연출작 <나인 라이브즈>가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매력적인 캐스팅으로 주목을 끌었지만 저조한 대중성 때문에 자국 내 개봉불가 판정을 받았던 첫 영화와 달리 LA, 뉴욕 등 일부 지역에서 6개월 넘게 관객을 만난 영화라니, 모종의 변신이라도 꾀한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여전히 여자들의 이야기를, 몇개의 단편으로 엮어낸 <나인 라이브즈>와 전작의 차이점을 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코타 패닝, 글렌 클로스, 홀리 헌터, 시시 스페이섹, 로빈 라이트 펜…. 매력적인 여배우들의 명단은 한층 길어졌고, 단편의 개수는 두배 가까이 늘어 아홉개가 됐다. <그녀를…>은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진출했고, <나인 라이브즈>는 2005년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작품상과 함께 14명의 여배우들이 여우주연상을 공동수상했다.
이 소심한 차이는 대조가 아닌 비교의 결과다. 1997년 선댄스 라이터스 랩(Sundance Writer’s Lab)에서 완성한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그녀를…>이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으면서 연출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후 카메라를 잡지 않았다. 오히려 1999년 <소프라노스>의 일부 에피소드를 연출하고 <식스 핏 언더> <카니발> 등 <HBO> 시리즈물에 간판 연출자로 눌러앉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영화를 만들 때만은 철저하게 인디영화의 영역에 머물렀다. 열명의 여배우들의 독백을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옴니버스물 <열개의 작은 사랑 이야기>(Ten Tiny Love Stories)는 극장 개봉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그녀를…>과 유사한 방식으로 제작한 <나인 라이브즈>는 50만달러를 들여 18일 동안 촬영해 만든 영화다. 각각의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여전히 별볼일 없다. 그 누구도 인류구원이나 혁명완수, 인생역전에는 관심이 없다. 평범한 우리와 아주 닮았다.
배우들도 반할 만한 매혹적인 시나리오작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콜롬비아에서 태어나 멕시코시티에서 자랐으며 현재 아내와 두딸과 함께 LA에서 거주하고 있는, 47살의 남성 감독이 평범한 이야기로 쟁쟁한 여배우들을 끌어모은 비결은 뭘까. 명실상부한 대답을 찾자면, 그것은 매혹적인 시나리오다. 시나리오의 완성과 영화화를 위한 인맥 연결까지 주선하는 선댄스 라이터스 랩은 <그녀를…>의 시나리오를 여배우 캐시 베이커와 존 애브넛 감독(<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게 전달했고, 인연은 다시 글렌 클로스로 연결됐다. 두 여배우의 출연과 존 애브넛 감독의 제작은 한달 만에 결정났고, 유명한 배우는 또 다른 믿을 만한 배우를 불러들였다. 그야말로 만사형통.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개인 코디와 개인 메이크업을 대동하고 가르시아의 촬영장으로 몰려들었다. 출연료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후배들에게 “로버트 드 니로와 메릴 스트립이 반할 만한 시나리오를 써라. 호랑이나 사자를 끌어들이려면 커다란 고기가 필요하다”라고 충고한다.
물론 가르시아가 배우의 명성과 공인된 연기에만 급급한 건 아니다. “잘못된 캐스팅을 만회할 방법은 없으므로 오디션은 중요하지만, 관건은 연기력이 아니다. 배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오디션의 절반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그의 영화는 명배우의 명연기가 아닌, 영화 속 그녀들의 삶을 담는다. 평생 떨쳐낼 수 없었던 아버지와의 애증을 정리하고자 오랜만에 집을 찾은 홀리가 어떤 결심에 이르는 시간을 담아낸 단편 <홀리>는 <나인 라이브즈> 중에서도 묵직한 긴장감을 자랑한다. 언제고 나갈 문을 열어놓지 않고는 집에 들어서지 못하고, 아른한 추억에 잠겼다가도 이내 불같은 증오에 휩싸이는 불안한 인물 홀리를 연기한 리사 게이 해밀튼은 우리에겐 다소 낯선 얼굴. 그러나 가르시아는 홀리를 위한 배우로 일찌감치 해밀튼을 점찍었다. “그는 완벽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배우다. 그가 전작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준 연기는 정말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드리고 가르시아가 <나인 라이브즈>의 아홉 에피소드를 각각 10여분에 이르는 롱테이크로 완성한 것은 영리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가르시아는 “누군가의 삶의 단지 몇분, 비록 순간이지만 그 인생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내러티브를 지닌 여타의 예술과 영화의 차이점은, 이미지를 그대로 옮길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른 그는 한 장소에서 한달음에 지속되는 몇분을 실시간으로 표현해야 함을 깨달았다. 일찍이 <열개의…>를 통해 하나의 단편을 한 테이크로 완성한 바 있는 그는, 대부분 두 시간 정도를 쉼없이 연기해야 하는 연극 경험을 지닌 배우들에게도 이것이 편하게 다가설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에피소드마다 주어진 이틀의 일정 중 하루는 리허설, 하루는 촬영에 할애하면서, 배우의 동선과 카메라 움직임, 이에 따른 일체의 조명을 완벽하게 컨트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를…>에서 감정을 반영한 섬세한 핸드헬드는, 부드럽게 상황을 재연할 수 있는 스테디캠으로 대체됐다. 이른 시일 안에 형기를 마치려는 모범수 산드라가, 한달에 한번 찾아오는 딸과의 면회가 엉망이 되어버리자 이성을 잃는 순간을 묘사한 첫 번째 단편 <산드라>. 실제 교도소 안을 헤집고 다니는 듯한 산드라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진짜처럼 자연스럽다. 초대형 매거진(카메라에서 필름을 장착하는 부위)에 묵직한 스테디캠을 운영했을 카메라맨의 노고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르시아 감독은 에피소드당 평균 열 테이크 정도를 찍을 수 있었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모두가 지쳐버렸기 때문에 대부분 중간 테이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