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가 품을 수 없는 단편의 매력
까다로운 롱테이크를 선택한 것이 독특한 비주얼을 선호하는 촬영감독 출신 감독의 도전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인 라이브즈>는 롱테이크의 대단함을 관객에게 웅변하지 않는다. 별도의 설명이 없다면 이 영화가 원신 원컷으로 이루어졌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또한 그의 영화 속 클라이맥스는 지극히 담백한 비주얼을 자랑한다. <그녀를…>의 모든 주인공은 점성술사, 부랑자, 가르치는 아이 등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말에 치부를 가격당한다. 무안하고 슬프지만 진심을 드러낼 수 없는 맨 얼굴을, 가르시아의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응시했다. <나인 라이브즈>는 한발 더 나아간다. 유방절제 수술을 앞둔 긴장감, 묵묵히 곁을 지키는 남편을 향한 이유없는 애증에 시달리는 중년 여성 카밀의 드라마틱한 감정변화를 정밀묘사한 단편 <카밀>. 시종일관 짜증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표정은 마취약에 취해 잠에 빠져드는 몇초 동안 진심을 담아낸다. 비논리적인 인물의 감정변화를 단번에 설명하는, 단조롭고 격렬하며 애틋한 스펙터클.
촬영감독의 경력이 끼친 결과가 있다면, 그것은 방임의 연출이다. 그는 시나리오를 제공한 뒤에는 배우에게 캐릭터에 관해 관여하지 않는다. 연기는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니고, 배우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그들의 상상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는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내가 썼던 대사의 진짜 의미를 깨닫기도 한다”는 고백은 진심일 것이다. 각각의 캐릭터에 대해 관객이 알고 있는 정보 또한, 감독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이애나>에서 10년 만에 재회한 옛 연인을 연기한 로빈 라이트 펜과 제이슨 아이삭스는 촬영에 앞서, 연기할 커플의 과거사에 대해 감독과 공유하지 않았다. “배우들이 과거에 대해 몰라도 상관없었고, 지금도 두 캐릭터 사이에 10년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 장면과 그 순간을 원할 뿐, 과거는 필요없다.”
가르시아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신중한 유보가 낫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연인과 배우자로 맺게 되는 관계들 대부분이 그렇다. 무릇 삶이란, 기승전결이 뚜렷한 극영화와는 달라서 우리는 뻔히 알고 있는 문제와 승산없는 눈싸움을 벌이고, 실은 애틋한 누군가에게 이유없이 상처를 주고 후회하길 반복한다. “일상적이면서 해답이 없는 문제, 가족관계라든가, 증오하는 이와 자신이 닮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 등에 흥미를 느낀다”는 로드리고 가르시아가 계속해서 단편의 이야기체에 열중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주 익숙하지만, 여전히 대답되지 않고 계속해서 고민해야 할 질문을 앞에 둔 기분좋은 답답함, 혹은 구체적인 막연함. 이는 유장한 플롯의 서사가 절대로 품을 수 없는 단편의 매력 아니던가.
여성적이되 여성주의적이진 않은 영화
정답과 해결책이 아닌, 공감과 소통을 중시하는 것은 여성적인 대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캐시 베이커, 글렌 클로스와 함께 가르시아의 영화 두편에 출연한 홀리 헌터는 “감정이입에 탁월한 사람으로, 어떤 갈등을 누군가의 내부로부터 이해할 줄 안다”고 그를 설명한다. 여성 전용 네일숍에서 여배우들과 비키니 왁싱에 대한 대화에 열중하는 것을 즐긴다는 중후한 풍채의 감독이 지닌 믿기 힘든 섬세함은 다른 이의 삶을 지그시 바라보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여자의 인생이 관심거리나 되겠어?”라는, <그녀를…>의 맹인 캐롤의 대사는 반어법이다. “모든 여자는 우주와 같다”거나 “여자는 그냥 자살하지 않아”라는 <나인 라이브즈> 속 여인들의 중얼거림이 바로 그의 진심이다. 가르시아의 주인공은 여성이 아니다. 자기 연민이나 분노 없이 주어진 삶을 견뎌가는, 강인한 존재일 뿐이다. 그가 만든 일련의 영화들은 그러므로 여성적이되 여성주의적이지는 않다.
<그녀를…>과 <나인 라이브즈>는 모두 LA에서 촬영한 영화다. 눈부신 햇살이 그처럼 쓸쓸해 보일 줄은, 미처 몰랐다. 때로 사막처럼 넓기만한 도로, 단조로운 사연을 품고 있는 낮게 깔린 오피스타운, 넓고도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주택가 등 <그녀를…>은 밝은 태양 아래 고독이 자라는 도시, LA의 여러 얼굴을 담고 있다. 그의 영화가 <숏컷> <매그놀리아> 등 LA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군상을 내세운 다중플롯 영화와 비교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소시민의 일상에 조금씩 드러나는 균열이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얽히고설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그 영화들은 그물을 통해 전체를 낚는다. 반면, 각각의 무심한 이야기로 완결성있는 단편을 끝맺고 약간씩 겹쳐지는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가르시아 영화는 점묘법을 통해 전체를 완성한다.
문제는 남는다. 선택된 순간이 전체를 대변할 수 있을까. <나인 라이브즈> 중 <루스>는 남편을 두고 애인과 함께 모텔방에 들어선 루스의 짧은 결심을 다룬다. 루스의 애인이 TV 속 동물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말한다. “상상 속에서만 있는 삶이죠. 어떻게 찍는지 모르는 게 나을걸요. 막 짬뽕하거든요. 조각조각 붙여서 얘길 만들죠. 동물들한테 상황을 주고 원하는 대로 찍기도 해요.” 그 자체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리진 않지만 그 말투에선 빈정거림이 느껴진다. 자신의 영화 만들기에 대한 가르시아의 반성처럼 들리는 그 대사는, 비판이 아닌 고백이고 결심이다. 진심을 담은 신기루는 진짜를 대신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우리는 같은 전구에 붙은 나방 같은 존재”(<로나>), “우린 행운아들이야. 뭔가의 일부라는 게”(<카밀>) 등 <나인 라이브즈>의 각 에피소드에는 가늘지만 질기게 연결된 우리를 묘사하는 대사가 계속해서 변주된다.
우연과 필연으로 점철된 인생의 한순간을 추출해내는 감독
관계를 화두로 하는 영화답게, “아버지와 갈등하는 딸이 오랜만에 집에 찾아온다”는 식의 메모에서 출발한 <나인 라이브즈>의 단편 모듬은 꽤나 정교한 구조를 지녔다. “우리는 꿈과 뼈(dreams and bones-여기서 뼈는, 꿈을 현실화할 수 있는 강인한 구조를 의미)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카밀의 대사는 <홀리>의 두 자매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함께하는 동요의 가사로 언급된다. 두 남녀가 스스로를 ‘우리’라고 일컬으며 단단한 친밀감을 형성하는 상황은 <다이애나>와 <소니아>와 <카밀>에서 반복된다. “후회는 세상에서 가장 추한 감정”이라는, 루스를 향한 헨리의 대사는 또 다른 에피소드 <사만다>에서 루스가 자신의 딸 사만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다. 적절한 대사와 함께 에피소드를 연결하는 것은 서로의 이야기에서 주변 인물로 얼굴을 비추는 주인공들이다. 다이애나의 옛 애인 데미안은 소니아가 부러워하는 친구의 남편이고, 아버지를 증오하는 홀리는 카밀이 입원한 병원의 간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딸과의 면회가 좌절된 산드라는 탈옥하여 루스가 묵는 모텔에서 체포되는 식이다. <그녀를…>에 비해서 한결 확고해진 이 연결고리들은 단지 각각의 에피소드가 전체로 수렴돼야 한다는 강박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것은 로드리고 가르시아가 생각하는 세상이고 삶이다. 자신의 문제에 골몰하여 불안한 모습을 보여줬던 이들도 정상적이고 믿음직한 일상이란 걸 영위하는 존재고, 아픈 순간은 영원처럼 괴롭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건 아니다.
스틸사진에 대한 관심이 촬영감독 경력으로 이어졌다는 로드리고 가르시아는 사진작가 카르티에 브레송의 이상을 영화로 실천하고 있는 듯하다.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은 ‘광선과 구도와 감정이 일치된 순간’을 말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터닝포인트를 포착하는 친근하고 진실한 스냅사진의 화법. 가르시아는 혼탁한 흙탕물을 가라앉혀 확연한 침전물을 얻듯 우연과 필연으로 점철된 인생에서 그 순간을 추출해냈다. 촘촘한 그물망과 끈기가 필요한 작업으로, 가르시아가 곤경의 패턴을 향한 민감한 더듬이와 함께 뚝심을 겸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상투적인 상황을 나열하던 그의 소박함을 이제는 남모를 야심으로 인정해야 할 듯하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음을 이야기하던 가르시아는 이제, 순간이라 불러 마땅한 아홉개의 시간을 통해 아홉개의 ‘인생’(lives)을 담았다고 말한다.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대단치 않아 위대한 삶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진심으로 일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영화는 흔치 않다.
“체호프와 조이스와 카버, 보르헤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문학적 아름다움이 깃든 로드리고 가르시아 영화 속 명대사
“다시는 같은 실수를 안 할 거야. 지나치게 사랑하는 거, 틀린 남자를 만나서 고치려고 노력하는 거. 여자들이 인생 망치기에 알맞은 짓이지. 백년 동안의 고독처럼 말이야.” 처음으로 각본을 쓰고 연출한 영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에서 로드리고 가르시아는 자신의 출생을 분명히 했다. 아버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대표작 <백년 동안의 고독>의 제목을 농담처럼 대사에 삽입한 그는, ‘가문의 영광’을 굳이 부인하려들지 않는다. 거의 모든 인터뷰마다 아버지처럼 소설을 쓰고 싶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으면서, “일류 작가의 이류 작가 아들이 되고 싶지 않았다”는 대답으로 일관한 그는 때로 “기자들에게 원래 촬영감독이 되고 싶었다고 말하면 아버지를 따라하기 싫어서라고, 원래는 작가를 꿈꿨다고 한다면 아버지를 능가하기 위해서라고 쓸 것 아니냐”는 뼈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문인 친구들이 수시로 집을 드나들며 나눴던 문학적인 대화들은 소년의 감수성을 자극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친구들은 모두 작가나 언론인, 시인, 화가, 극작가들이었다. 아버지가 카를로스 푸엔테스와 함께 거실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것 등은 매우 익숙한 광경이었다. 아버지는 헤밍웨이처럼 단편을 잘 쓰는 작가들을 부러워했고, 나 역시 체호프와 조이스와 카버, 보르헤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영화에는 철학적이고도 문학적인 아름다움이 깃든 대사들이 넘쳐난다. 40, 50년대 위대한 고전영화의 그것처럼, 상황과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으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아포리즘을 이루는 대사의 일부를 소개한다.
-“그들은 아마 혼자 감당하기에는 짐이 너무 무겁고 함께 나누는 것은 불가능해서 헤어졌을 거야. (중략) 그녀는 지쳤을 거야. 오지 않는 전화, 지켜지지 않는 약속들, 알면서도 걸려 넘어지는 돌들에.” - 유서도 남기지 않은 여자의 자살 배경을 추측하는 캐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너랑 만난 지 이제 겨우 5분인데, 지난 (10년간의) 내 인생이 허구로 느껴져.” - 10년 만에 만난 옛사랑에게 다이애나가 한 말. <나인 라이브즈>
-“전화를 발명한 사람은 대화란 걸 안 해봤을 거야.” - 전화로는 다 할 수 없는 말을 위해 오랜만에 집에 찾아온 홀리가 동생에게. <나인 라이브즈>
-“봐요. 예수가 봤던 거랑 같은 달이에요. 부처도 마호메트도 저 달을 봤겠죠. 이 작은 행성에선 모두 연결돼 있어요. 우린 서로 교감하는 존재들이거든요.” - 루스의 정부(情夫)가 모텔로 향하던 중 밤하늘의 달을 보고. <나인 라이브즈>
-“모두가 변하는 거란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그랬고. 모두 무거운 짐들을 지고 갔겠지. 다들 어떻게 견디는지 모르겠다.” - 공동묘지에 늘어선 묘비를 바라보며 매기가 딸에게. <나인 라이브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