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1일 개봉하는 <천하장사 마돈나>는 시나리오 작가 출신 이해영, 이해준의 감독 데뷔작이다. <신라의 달밤> <품행제로> <아라한 장풍대작전> 등에 녹아 있던 감성과 재기는 본인들이 직접 연출한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극대화해 있다. “단지 여자가 되고 싶을 뿐인” 뚱보 소년 오동구가 씨름을 통해 꿈을 이룬다는 독특한 설정 때문만은 아니다. 그럼 뭣 때문에? <천하장사 마돈나> 영화평과 이해영, 이해준 감독 인터뷰, 그리고 제작기를 모아서 내놓는다.
엉뚱한 비유 같지만, <천하장사 마돈나>는 <미션 임파서블>과 비슷한 시나리오 작법을 구사한다. 남자 고교생 동구(류덕환)의 미션은 여자, 그것도 관능적인 개성이 흘러넘치는 마돈나처럼 되는 것이다. 이 미션이 만만치 않은 또 하나의 설정, 동구는 자신의 발이 하이힐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비대한 몸집의 소유자다. 소년의 난감한 상황은 고립무원 상태를 헤쳐 파트너십을 복원하고, 막강전력의 상대방을 막판 뒤집기 한판으로 처리해야 하는 에단 헌트의 처지에 견줄 만하다. 에단 헌트가 곧잘 써먹는 난국 타개책 중 흥미진진한 건 가면 쓰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내가 아닌 적의 얼굴로 원하는 것을 얻어낼 때다. 동구 역시 실제의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듯한 씨름 선수로 변신해 남성적 땀과 살의 얼굴로 모종의 작전을 수행한다.
사랑스러운 주인공이 행복해지기 위해 어떤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그 앞에 위험천만 혹은 난공불락의 장벽이 막아선다, 마침내 장애물을 멋지게 돌파해냈을 때 주어지는 주객 일치의 카타르시스. 이 수순이 일반적인 시나리오의 통뼈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미루고 미뤄둔 마지막 순간에 터뜨리는 극적인 쟁취의 쾌감까지 <미션 임파서블>의 맥락을 닮았다(긴박한 최후의 순간에 리얼리티 문제를 살짝 증발시키는 유머를 집어넣는 재기는 차라리 한수 위다).
사실 이 비유는 ‘좋은 시나리오가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말을 동어반복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통뼈의 뻔한 존재감이 아니라 그 통뼈에 살과 피를 어떻게 실감나게 붙여나가느냐다. 당연히, <천하장사 마돈나>는 <미션 임파서블>과 서로 수혈할 수 없는 이질의 피를 지녔다. 고급 영양식과 피트니스 트레이너, 적당한 지점마다 주사되는 보톡스와 고주파로 생성되는 콜라겐으로 탱탱한 피부와 매끈한 몸매를 가꾼 <미션 임파서블>을 굳이 <천하장사 마돈나>에 끌어댄 건, ‘트랜스젠더를 꿈꾸는 소년’이라는 소재부터 소수 취향인 드라마를 다수가 만끽할 만한 극적 전개로 펼치는 데 성공했다는 간접화법이다(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부드러움의 소유자 류덕환을 톰 크루즈의 무미건조한 표정에 비하랴!).
소수 취향 드라마를 범대중적인 극적 전개로
수혈의 갈래를 따지자면, 기타노 다케시적 영상이다. 뻔뻔스럽고 우직하며 단호하게 코믹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캐릭터들도 그렇지만, 코믹 에피소드는 대체로 스톱모션처럼 정지된 채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다음 컷으로 넘어간다. 코믹의 소격효과랄까. 우리가 방금 본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뭔지, 슬쩍 (시간적) 거리를 만들어줄 테니 생각하며 즐겨보라는 투다.
결국 이 글은 이해영, 이해준이라는 촉망받는 시나리오작가 짝패가 감독 짝패로도 성공적으로 데뷔한 데 대한 환영사다. 이들의 데뷔작은 유쾌하고 용감한 코믹 터치가 끊이지 않지만, 동구 아빠가 동구를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패는 두번의 장면을 점층적으로 사용할 정도로 심각하기도 하다. 예컨대 이 폭력장면은 불필요한 과잉일까, 필요불가결한 급소일까. 그 장면의 무게만큼 무거운 질문이 필요한 순간이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성장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돼버린 교사의 학생 폭행장면을 아버지의 아들 폭행으로 대체한 건 논리적으로 명쾌하긴 하다. 동구의 미래 만들기는 대학 진학이나 연애, 우정을 둘러싼 실험에 있지 않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몸을 바꾸는 것, 달리 말하면 원래 있어야 할 위치로 몸을 되돌려보내려는 고단함에 있다. 그러니 후천적인 문제로 대립하게 되는 교사와의 갈등보다 선천적으로 몸을 준 아비와 다투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왜 그 아비는 하필 실패한 마초 노동자이며, 해고 노동자이어야 할까. 한때 승승장구하던 권투선수였으나 1등이 되지 못하고 추락한 루저라는 수위에서 멈출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 루저 노동자는 자신을 해고시킨 사장을 두들겨 패 입원시키고, 아이들의 놀잇감이 되는 수모를 겪으며 1인 시위를 벌인다. 왜 이런 장면들이 필요했을까. 그리고 동구 엄마는 왜 하필 공주 복장을 한 동화 속 소녀가 되어 생계를 유지할까. 그저 집나간 노라면 안 될까. 더욱 이상한 점은 부모와의 사연을 서브플롯 중 하나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서브플롯으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마돈나를 꿈꾸는 소년이 천하장사가 되려고 한다는 제목에 어울릴 만한 본론, 즉 씨름부 선배와의 갈등이나 씨름부 감독의 정체를 둘러싼 ‘싸움의 기술’이 서브플롯의 우두머리가 되지 못하고 부차적으로 보이는 부모와의 사연이 그 자리를 꿰찼다.
하여 고개를 쳐드는 생각, <천하장사 마돈나>는 계급(과 취향)에 관한 영화다. 계급사회를 질타하거나 자기 계급에서 탈출해 상승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주어진 계급을 견디고 즐겁게 버티는 법에 관한 이야기. 계급과 취향의 기묘한 동거에 관한 이야기다. 동구가 성을 바꾸고자 하는 건 애초부터 어긋난 선천성의 문제다. 이건 계급의 문제도, 취향의 문제도 아니다. 일종의 자연법칙이다. 그런데 거기에 돈이 든다. 해고 노동자 아빠와 집나간 엄마를 둔 동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500만원. 슬슬 계급이 작용한다. 왜 동구는 하필 마돈나를 동경할까? 휘트니 휴스턴이나 빅마마 같은 여자가수가 아니라, 마이클 잭슨이나 리키 마틴 같은 남자가수가 아니라 굳이 마돈나다. 슬슬 취향이 작동한다.
같은 계급적 지위에 놓인 세명이 있다. 동구, 동구 아빠(김윤석), 동구 엄마(이상아). 권투선수 출신의 동구 아빠가 가진 인생의 노하우라고는 “가드 올리고, 상대를 주시하고”가 전부다. 그래봐야 엉뚱한 시점에 엉뚱한 상대에게 주먹을 날린다. 동구 아빠는 가드를 올려서 무엇을 방어할지, 상대를 주시하다가 언제 잽을 날릴지 자주 헛다리를 짚는다. 하여 자학과 냉소의 알코올에 취해 깨어나질 못한다. 동구 엄마가 좀더 나은 건 자학하거나 냉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건 청춘을 건 모험이었던 남자를 증오하게 된 이유이니까. 자신이 예뻤다는 걸 아는 그녀는 예쁜 공주옷으로 치장하고 세월을 가릴 수 있는 가면을 쓰고 돈을 번다. 수입이라고 해봐야 세상을 버틸 수 있는 수준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좋아하는 사람과 더불어 지내는 상상을 여기선 하기 힘들다. 동구는 자학하거나 냉소하는 아빠의 과거를 닮아가는 씨름부 주장(이언)을 질타한다. 그 점에서 동구는 엄마와 친구가 될 법하다.
현실을 버티는 법을 즐겁게 알려주는 영리함
동구 아빠가 ‘가드’라고 치켜드는 주먹은 이미 자신도 믿지 못하는 주먹이기 때문에 ‘가드’(방어막)가 되지 못한다. 동구의 가드는 주먹이 아니라 립스틱이거나 원피스이거나 마돈나 댄스다. 동구의 가드는 절망을 모른다. 동구가 가드를 내리는 건 자신의 취향과 결별하겠다는 뜻이니까. 동구는 자신의 취향=가드를 앞세우고 잽을 날리기 시작한다. 몸을 바꿀 수 있는 딱 그만큼의 돈을 벌기 위해서. <천하장사 마돈나>는 딱 그만큼의 욕망 정도는 가능할 수 있다고 즐겁게 설득한다. 자기 취향에 대한 애정과 보살핌없이 무산자가 버틸 구석은 그나마 없다고. 비관투성이의 마초 노동자인 아버지와의 대비는 필요불급한 살이며 피인 것이다.
나의 취향이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취향도 존중해야 한다, 차이를 존중하자는 건 꽤 오래전 기지개를 켰던 담론이며 동구 같은 소수자를 대하는 정치적 올바름이었다. 지금, 또다시 이 말을 반복한다는 건 식상할 수 있고, 심지어 위험하기조차 하다. 부르디외가 일찌감치 지적했듯, (문화적) 취향은 계급에서 비롯한 후천적 요인이며 계급의 차별을 위장하고 흐려놓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벌써 한물간 서구의 조어 ‘보보스’(부르주아+보헤미안)는 부르주아가 보헤미안의 취향을 접수할 수는 있어도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여자가 되고 싶고, 꽃미남 선생님(구사나기 쓰요시)을 사랑하는 동구의 파란만장 스토리를 단지 차이를 존중하자는 취향의 논리로만 접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발 나아간 배짱좋은 작품이다. 그리고 계급의 틀을 굳이 문제삼지 않는 대세(우리는 더이상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서는 영화를 볼 수 없다. 냉소적 결론에 이르는 <괴물> 역시 딱 그 지점에 있다)를 거스르지 않고 현실을 버티는 법을 즐겁게 알려주는 영리함을 갖고 있다.
이 영화의 배짱이 느껴지는 또 하나의 대목. 굉장히 이질적이고 의문스러운 캐릭터가 씨름부 감독(백윤식)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화장실에 처박혀 똥만 싸대는 감독의 정체는 미스터리다(설마, <으랏차차 스모부>에서 경기만 시작되면 설사를 시작하는 다케나카 나오토에 대한 오마주?). 동구에게 감독은 유사 아버지다. 자신의 몸을 낳아준 건 생부이나 자신의 몸을 알아준 건 감독이다.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수영장에서 유유자적 햇빛과 한가함을 즐기는 감독은 “갈 놈 가고 올 놈 오고”라는 도인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감독은 현실의 문제에서 완벽히 비켜서서 만사를 즐긴다. 동구를 씨름부로 유혹하긴 했어도 동구의 선천적, 후천적 불편사항에 개입하지 않으며, 씨름부 내부의 갈등과 호소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능력은 있으되 먼발치에서 이따금 훈계할 뿐. 그러니까 해영, 해준 감독은 영화 내부와 무관한 듯 보이는 이 캐릭터를 영화 밖의 능력 있으나 현실에 냉소적인 감독들(혹은 문화 권력자)에 대한 코멘트로 사용한 건 아닐까. ‘너희들은 그저 똥이나 싸고 있구나’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