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전영객잔 3인, <괴물>과 <한반도>를 논하다 [1]
2006-08-31
정리 : 박혜명

정성일: 김소영씨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서처럼, <괴물>을 둘러싸고 괴물적 현상이라 부를 만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는 <태극기 휘날리며> 때와 다른 느낌이다. <괴물>이 어떻게 흥행했는지(이 대담이 이뤄질 시점에 <괴물>의 관객 수는 전국 700만명을 넘어섰다)는 마케팅 담당자들이 논할 일이다. 다만 이런 성공 속에 만들어진 담론과 관련해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그중 하나는 <괴물>을 영화 안에 가두려는 담론이고, 또 하나는 <괴물>을 ‘2006년 한국’이라 불리는 상황에 대한 정치적 판본의 하나로 읽으려는 담론이다. 또 다른 하나는 둘 사이의 중재라고나 할까, 대중이란 무엇일까란 방식으로 좌표를 재정립하려는 시도다. 매우 복합적인 담론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왕의 남자>의 성공요인 분석 등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담론이 번져나가고 있다. 언론이 만들어낸 문화담론의 헤게모니 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 어느 쪽이 동의를 얻느냐는 매우 중요한 전투다. 그 점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첨언하자면 민노당 기획위원이 <괴물>에 관한 글을 썼는데 그 글의 제목이 ‘괴물은 북한이다’였다. 말하자면 괴물은 무엇무엇이다, 라는 괄호를 놓고 벌이는 논쟁이 있다고 생각한다. 괄호 안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또는 누가 그 괄호를 차지할 지이다. 이제 <괴물>은 봉준호 감독을 떠나 사회 안에서 어떻게 (혹은 무엇으로) 그것을 뒤집어씌울 것인지의 문제에 놓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김소영: 일반적으로 공포영화나 괴수영화에서 타자성에 대한 위치는 중요하다. <괴물>에서 괴물은 타자성을 갖지만 그것이 굉장히 모호하게 처리됐다고 생각한다. 영화 첫부분에서 괴물은 미국의 독극물이 탄생시킨 것이다라는 설명이 있지만 그것이 어떤 복합적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전개나 발전이 없다. 때문에 그것은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하면서도 자의적인 정치적 알레고리의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건 우리 사회 안에 타자를 어떤 괴물로 형상화해서 명명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거다. 포스트냉전시대에는 뚜렷한 적이 없다. 괴물이 텍스트 내에서 모호한 타자성과 복합성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세계화나 신자유주의 등 세계질서는 냉전의 지속을 있게 만들고, 어떤 적도 경계도 없는 것 같은 분위기에서 자기가 포함될 수 있는 타자성 또는 거부하고 싶은 타자성에 대한 명명의 욕망이 있다. 그것을 <괴물>로 형상화할 계기로 삼은 것 같다. 북한이든 미국이든 둘 다 포스트냉전시대의 대표적 타자로 받아들여지는 대상이다. ‘괴물은 무엇이다’의 괄호는 포스트냉전과 신자유주의의 동거 속에서 채워지는 것 같다. 경계를 허무는 신자유주의적 담론과 냉전을 지속하려는 담론 사이에서 말이다.

허문영: 다른 문제틀로 보면 어떨까 싶다. 개인적으로 <한반도>와 <괴물>이 같은 시기에 등장했다는 것은 한국 영화계에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의 한국영화 대작들은 공동체의 갈등을 해결하는 영웅의 이야기를 제대로 그린 적이 거의 없었고 있다 해도 희귀했다.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돼 오다가 갑자기 올 여름 두편이 나왔다. 공동체의 갈등을 제기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한다는 점에서 두편 모두 외연상 고전적 영웅담의 모양새를 띠고 있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문제제기 방식은 상극이라 할 만큼 다르다. <한반도>의 경우 이 영화가 제기하는 갈등의 정체는 등장인물들의 사적인 모티브와 어떠한 연관도 없다. 오로지 인물들의 견해로서만 전개된다. 물론 경의선 부설권에 대해서도, 그것이 뭔지 이야기는 하지만 경의선이 무엇인지 어떤 말도 안 하고 놀랍게도 국가적 의제로만 영화를 전개해나간다. <괴물>의 경우 갈등의 정체는 구체적이다. 강두라는 빈민의 딸이 납치당한다는 구체적인 사적 계기가 있다. 괴물의 타자성이 모호하다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그들이 아닌 ‘나와 우리’가 모호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태극기…>라면 세상의 나쁜 질서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명백하지만 <괴물>은 그렇지 않다. 강두와 노숙자를 제외했을 때 괴물과 끝까지 싸우는 인물은 도날드 하사다. 이처럼 우리의 영역이 불분명하다는 점이 괴물의 타자성을 명명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하고 다양한 해석을 낳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아닐까.

정성일: 두편을 보면서 생각한 것은, 두 이야기가 똑같다는 거다. 얘기를 간단하게 만들어버리면 둘 다 무언가를 찾으러 다니고 결국은 찾는다는 거다. 차이라면 하나는 제대로 찾았고 다른 하나는 찾았는데 죽었다는 것이다. 잃어버렸다는 건 원래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는 국새고 하나는 같이 살던 현서(고아성)다. 이 전제를 위해서 하나는 역사 전체를 허구화하는 것을 담보하고 다른 하나는 없는 괴물을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두 이야기는 결국 반복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점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한반도>

김소영: 두편이 비슷한 시기에 나와서 시대적인 비유를 할 수밖에 없는 시간성이 있다고 본다. 지정학적으로 두 영화가 보여주는 불안이나 욕망, 공포가 비교의 준거틀이 될 수 있겠다. <한반도>는 제목 자체가 한반도다. 반도는 일본이 내지·외지를 규정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은 여기에서 설정된다. 경의선으로 북한을 통과하자는 욕망을 막는 것이 일본이다. 그것을 과거로 돌아가 반도를 한반도로 만들자고 하는 건데, <한반도>의 지정학적 정세 파악방식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수준이다. <괴물>의 경우 공간정치학 측면에서 흥미롭다. 어떤 괴수영화든 괴수는 밖으로 뛰쳐나가는데 <괴물>의 괴물은 한강에만 머물고 영화도 한정된 공간에 머문다. 공간의 폐쇄성이 확장되면서 괴물은 더 괴물이 된다. 한강이 가진 역사, 즉 6.25전쟁 때의 한강대교와 최근에 붕괴되었던 성수대교, 하나는 역사의 귀신이고 다른 하나는 압축 근대화가 낳은 비극인데 그것들이 공간의 역사에서 빠져 있는 것이 흥미로웠다. 이 정치의식은 굉장히 당대적이고 축소적이다. 하나는 공간의 정치가 너무 매크로하고 장기역사적이라 정치적 감각을 상실했고 다른 하나는 너무 미크로해서 외연을 볼 수 없다는 차이를 생각하게 됐다.

허문영: 기본적으로 공통점을 찾자면, 아주 상투적인 표현으로, 탈식민지사회에 작동하는 제국주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이고 기본적으로 저항의식이 흐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두 영화가 제기하는 의제의 층위가 워낙 다르다. <한반도>에서 국새는 추상적인 것이다. 그 존재를 찾는 이유는 국민국가를 완성하기 위한 국가적 기획이다. 여전히 작동하는 제국주의 질서로부터 국민국가의 주권을 완전한 형태로 만들겠다는 욕망이 작동한다. <한반도>를 우파영화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은 상실의 대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찾아오는 것이 영화의 욕망이 되는 순간부터 국민국가를 완전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국가의 하위 단위, 즉 계급, 집단, 지역, 가족, 개인 등이 완전히 배제돼 있다. 국민국가라는 단위 아래 이렇게 모든 층위의 단위를 무시한 영화는 거의 처음이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이 영화는 전제한다. 그 정도로 국민국가라는 단위에 대한 철저한 신뢰나 신앙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적인 의제를 설정하면서 개인의 욕망은 들어갈 틈이 없고 모든 것은 공적인 임무와만 연관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견해가 중요하다. 국민국가를 당신은 신뢰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견해만이 나온다. <괴물>로 옮겨오면 똑같이 탈식민지시대에 작동하는 제국주의 질서에 대한 시선이 스며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질서가 어떠한 것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명백한 설명이나 서사적 장치가 매우 모호하다. 그것이 두 영화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큰 차이다. 

정성일: <한반도>가 우파 이데올로기를 담보하는 국민영화인 것은 명백하나 <괴물>이 좌파영화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차라리 <한반도>가 냉전영화라면 <괴물>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 영화계에 처음 도착한 포스트폴리티컬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의아한 건 정치성이 명징하게 드러난 이 영화를 왜 사람들은 가족으로 덮어씌우고 싶어하는가 하는 점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서 현서가 세주를 돌봤었고 현서가 죽자 세주(이동호)와 강두(송강호)가 하나의 가족을 이루는 것에 대해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란 지점을 강조했다. 만일 <괴물>이 정말 가족에 관한 영화라면 왜 둘 다 살리면 안 됐는지 질문하고 싶다. 그것이 장르영화의 컨벤션에 반하는가라고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현서를 죽이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한반도>에서 왜 모두가 공적인 임무에 매달리는가라는 질문을 <괴물>에 똑같이 묻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모든 가족이 현서를 찾는 데 매달릴 수 있나. 그게 사실적 가족인가. 삼촌 남일(박해일), 고모 남주(배두나)가 현서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 때 그들에게 그럴 만한 모티브는 무엇인가. 국민주의만큼 납득할 수 없는 가족주의가 이 가족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그 지점에서 포스트정치영화의 불안한 미래가 느껴졌다. 페미니스트 입장의 담론이 침묵을 지키는 것도 의아했다. ‘괴물은 무엇이다’의 괄호 문장의 역으로, ‘가족이 괴물이다’라고 하면 어떻겠는가.

허문영: 괴물에게 납치된 딸을 찾는 데에 온 가족이 매달린다는 점은 그냥 전제처럼 받아들여도 좋은 게 아닐까 싶다.

김소영: 가족이 괴물이다’라는 건 약하게 제기될 문제 같다. 왜냐하면 엄마의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삼촌과 고모가 들어왔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아버지(강두)가 사회적 기능을 잘 못하니까 삼촌이 들어올 또 다른 자리가 있다. <괴물>에서 괄호쳐진 것은 어머니들이다. 봉준호 감독 인터뷰 때나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쓸 때 <괴물>의 젠더정치학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밝힌 대목은 이 지점이다. 이 영화에는 생물학적 모성이나 양육자로서의 어머니가 모두 없다. 그것이 괴물성으로 괄호쳐져 있고 그 부재 속에서 현서가 납치된다. 그래서 괴물의 성별이 궁금했다. 에일리언처럼 명백히 암컷이냐. 봉준호 감독은 양성이라 답했다. 그리고 모성 또는 부성이 아니라 돌봄의 연쇄고리가 이 영화에 있다고 했다. 허무하다고나 할까. 생물학적으로 여성화된 모성은 2대째 없고 (현서가 세주를 돌봄으로써) 그것이 현서에게 구체화됐다가 죽음으로 사라지는 것이 불편하기는 했다. 세주와 현서 두 아이가 같이 괴물의 뱃속에 들어가 있는데 세주만 살릴 만한 영화적 논리는 없다. 생물학적 모성을 대체하는 부성이나 돌봄의 긍정성은 있는 반면 왜 엄마는 부재하도록 처리하는지 하는 대목은 불편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정성일: <괴물>은 모든 등장인물을 남자건 여자건 엄마화, 모성화한다. 희봉(변희봉)마저도 사실상 강두의 엄마에 가깝다. <괴물>은 영웅서사를 모성화된 서사로 뒤집어씌운다는 느낌이다. 그것이 이 정치적인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인 것처럼 착시효과를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닌가. 괴물의 뱃속에서 아이들을 꺼낼 때의 모습이 출산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하다. 아버지 강두가 세주를 끌어냄으로써 사실상 한 아이가 가족의 일원으로서 태어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근데 그 순간에 엄마 역할을 할 수 있는 현서를 죽이고, 굳이 강두에게 철제판을 깨고 쇠파이프를 만들어 그걸로 괴물을 찔러 물리치게 한 다음 아들을 얻었을 때, 결국 엄마없이 아버지와 아들만 남았을 때는 급격히 보수적 태도로 회귀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괴물>의 등장인물들을 만들어놓은 사람은 민노당을 지지하는 봉준호다(봉준호 감독은 자신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함을 밝힌 바 있다). 괴물이 탄생한 사연이나 가족의 사연, 이들을 돕는 이가 노숙자라는 점 등을 긁어모았을 때 그 공통점에서 민노당 지지자인 시민 봉준호를 본다. 그런데 <괴물>이라는 장르영화를 찍을 때의 봉준호는 영화일을 하는 봉준호라는 것이다. 시민 봉준호와 영화감독 봉준호가 <괴물>이란 영화를 성립시키기 위해 내놓는 두 가지가 섞여들지 않는다. 그게 안 되니까 개념화에 실패할 수밖에. 로고스(논리적 사색)로는 성립이 안 되고 미토스(로고스로 표현하기 곤란한 비유적·직관적 표현)로 즉각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미토스를 끌어들이면서 불균질적이 된다. <한반도>는 지나치게 균질적이고 평면적인 반면 <괴물>은 불균질적이다.

허문영: 불균질적이란 말에 동의한다. 어차피 봉준호는 괴물영화를 만들고 싶어했고 한강 둔치를 살육장으로 만들려고 했고, 그 와중에 불가피하게 그의 정치의식이 작동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영화 자체를 성립시키기 위한 장치도 불가피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점에서 <괴물>이 불균질적이라는 점은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괴물>이 어떤 정치적 태도의 영화다, 괴물의 타자성이 무엇이다, 라고 말하는 것 역시 이 영화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라고 본다. 영화 자체가 명백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의 동기를 짐작해 말한다는 것은 조금 웃기는 일이지만, 봉준호 감독은 처음부터 잡혀간 현서가 죽는 설정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본다. 감독은 오히려 <괴물>이 가족영화로 남지 않기를 처음부터 계획했던 듯하다. 가족이 가족을 지키는 게 아니라 지키는 와중에 그 연대가 또 다른 가능성을 가진 사회적 연대로 발전되길 바라는 희망이 세주를 구하는 장면, 또 세주가 살아가는 장면에 있다라고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가족에서 출발한 영화가 빈민의 연대로 나아가는, ‘우리’라는 것의 구획이 서사 안에서 변화돼가는 과정은 충분히 존중받고 평가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소영: 정성일씨가 <괴물>을 포스트정치영화라고 일컫는 까닭은 이 영화가 이전과 같은 조직화된 정치성 또는 장치나 기구를 비판하는 정치성이 아니라 반미적 시각을 포함하는 혼재성을 가졌다는 점 때문일 텐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괴물>은 가족, 젠더, 모성의 측면에서 기존의 양분화된 여성/남성이라든지 정상/비정상적인 가족을 모두 넘어서는 포스트의 성질을 갖고 있다. 그 점에서 반페미니즘영화로 읽기 망설여진다. 친여성적인 영화도 아니지만. 영화 마지막 부분에 강두가 괴물을 남근의 상징인 쇠창으로 찌르고 아들을 얻는데, 나는 그것을 딸이 죽고 아들을 얻는 이야기로 보는 데에 여지를 둔다. 그 순간 강두가 한 말에 여운이 있다. “네가 현서랑 끝까지 같이 있었니?” 세주는 현서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기억장치다. 그 점이 기본적으로 젠더정치적 양분화를 막는 여운의 시약이 되는 것이다. 생물학적 여성의 역할 즉 돌봄과 서비스 등 여성화된 노동영역을 <괴물>이 전유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다.  

정성일: 재미있는 건 <한반도> 자리에는 아무도 안 가려 한다는 것이다. <괴물>의 자리는 다들 차지하고 싶어한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컨센서스가 있는 반면 <괴물>에 대해서는 어떤 컨센서스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두 영화가 우연찮게 바인딩되었지만 사실상 동시에 도착한 것이고 그때가 2006년 6월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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