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전영객잔 3인, <괴물>과 <한반도>를 논하다 [2]
2006-08-31
정리 : 박혜명

정성일: <괴물>은 어찌되었건 대중적인 폭탄이 됐다. 충무로의 이른바 선수들조차 망연자실할 정도로 성공했는데, 2006년 7월 지금 대중에게 <괴물>이라는 영화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김소영: 두편 모두 개봉시기가 기획된 영화다. <한반도>는 월드컵 이후 영화로 민족적 감정이 최고조일 때 터뜨렸다. <괴물>은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없는 시즌에 나왔고, CG로 잘 만들어진 괴물을 열대야에 가족끼리 피서용으로 보는 멀티플렉스 영화라는 게 핵심적 역할인 것 같다. 덧붙이면 믿을 만한 배우들 정도? 영화적으로 보자면 <괴물>은 장르영화치고 파토스(감정의 격앙·격정)를 지나치게 아낀다.

<괴물>

허문영: 파토스를 단절한다. 흥행된 영화를 놓고 왜 됐느냐라는 말을 하는 것만큼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도 없다. 기본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문제지만 굳이 이런 게 아닐까 짐작한다면, 그럴듯한 괴물 자체와 함께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배우, 그러니까 동시대 얼굴로 상상될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의 배우들을 보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한다. <괴물>의 주연배우들의 공통점이 그렇다. 이 말을 바꾸면 한국 관객이 이제 자기 연민에 빠진 자학적 주인공을 넘어서서 뭔가 해결해나가는 인물을 보고 싶어하는 갈증이 있지 않나 싶다. 괴물 자체는 각각의 관객에게 어떻게 읽히든, 그것이 미국으로 읽히든 세상의 나쁜 질서의 총아로 읽히든, 주어진 문제와 싸우고 해결하는 동시대인으로서의 영웅을 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하겠다고 하면 결말을 바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괴물>의 결말은 삭막하다. 눈 내리는 벌판에서 오로지 의붓아버지와 아들이 허름한 매점에 앉아 세상을 지키고 있는 모습은 굉장히 비극적이고 우울한 설정이다. 필사적으로 찾던 딸도 죽고 세상에 남은 건 유사부자밖에 없고, 보이지도 않는 괴물을 잡겠다고 강두는 총을 잡고 두리번거린다. 현서를 살리거나 가족의 마음을 풀어주거나, 어떤 식으로든 조금이라도 풀어주는 결말을 택했다면 훨씬 더 많은 관객이 들었을 것 같다. 그런 스산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드는 것은 동시대 한국인에게 가장 친근한 배우들이 진심으로 우리의 문제,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와 맞부닥쳐 싸우는, 진정으로 지역 영웅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대중적 갈증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 영화를 규정하기 힘들게 하는 불균질성 복합성은 관객이 영화를 보며 괴물을 자기가 생각하는 나쁜 질서이자 타자로 생각하고 위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김소영: <괴물>의 냉혹한 점은 괴물에게 일말의 동정심이 없다는 것이다. 봉 감독은 인터뷰에서 “알고 보면 불쌍하다”고 했지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독극물로 탄생했다는 비극적인 서사가 있지만 그것에 대한 일말의 연민도 없다. 한강 둔치에 사는 기우뚱한 가족이라든지 사회적 약자인 노숙자들을 다루지만, 괴물의 비극적인 탄생서사에 대한 시선이 없다는 게 인정머리없는 방식이다. 괴물은 그야말로 정말 괴물이다. 이는 냉혹한 방식이고, 바로 이 점이 영화가 복합성을 갖지 않는 데에 일조한다고 보여진다. 괴물성, 사회적 타자성은 있되 우리 모두 일종의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라는 복합적 타자성은 빠져 있는 것 같다.

정성일: <한반도>와 <괴물>은 대중영화를 목표로 찍은 영화들이다. 그런데 두편에서 모두 완벽할 정도로 로맨스가 증발해 있다. <한반도>에서는 모든 등장인물들을 끝까지 남성화시키고 있고, <괴물>에서는 그 긴 시간 현서를 괴물의 공간에 던져놓고도 괴물과 어떤 소통도 없다는 점이 이상했다.

허문영: 두 영화에 로맨스가 부재한 이유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경우 상실의 대상이 국새가 되는 순간부터 중요해지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견해이지 사적 세계가 아니다. 아까 한 말에도 보충을 하자면, 완성도를 떠나서 이처럼 공적인 견해만으로 이어진 영화에 400만명이라는 관객이 들었다는 건 이 영화가 의제로 삼은 국가적 기획, 국새의 상실이라는 의제가 많은 동시대인에게 시급한 의제로 받아들여진다는 걸 방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는 관객의 대중적 요구를 상당한 수준까지 읽고 만들어진 것이다. <괴물>의 경우는 로맨스를 개입시킬 만한 이야기상의 여백이 많았다. 일단 봉준호 감독은 단편에서 장편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로맨스를 그린 적이 없다. 로맨스를 그리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면 (로맨스를 대체할 수 있을 만큼) 가족간의 감정적, 정서적 연대가 충실한가.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괴물>은 가족이 가족애를 드러내는 순간 정서의 지속을 돌연 중단시킨다. 이 영화에서 제일 비극적인 장면은 현서의 죽음이 드러날 때보다는 그나마 덜떨어진 가족을 보듬고 끌어오던 박희봉이 죽는 장면이다. 그때 비로소 식구들은 오열한다. 배경음악으론 슬픈 음악이 이어지면서 다음 컷으로 넘어가면 뉴스 앵커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라고 말한다. 당연히 관객은 그 뉴스가 박희봉의 죽음을 전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해지는 것은 도날드 하사의 죽음이다. 뿐만 아니라 딸이 죽었는데 강두는 배꼽 내놓고 자고, 아버지가 비장한 이야기를 할 때 자식들은 졸고 있다. 이들 사이의 정서적 연대를 고의적으로 없앤 것이다. 그 연대가 완전하거나 숭고하지 않다는 걸 끊임없이 의도하고 설정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봉준호라는 감독에게서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라는 대작에 속하는 영화를 만들면서도 끝내 대중적 코드를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안간힘 같은 게 느껴진다.  

김소영: 역설적이게도 <괴물>에서는 그것이 대중적 코드로 등장하는 것 같다. 슬픔이 지속되지 못하게 하는 방해장치이면서 재미장치인 것들. 파토스와 같은 감정이 끊어질 때 사람들이 웃는 식의 리듬감이 대중적 코드로 자리잡고 있는 건 아닌지. 한 감정을 오래 지속시키지 않는 것이 새로운 대중적 코드라는 걸 감독도 인지하고 영화를 만든 것 같다.

허문영: 그 점이 봉준호나 <괴물>이 가진 포스트적인 중요한 요소다. 예를 들면 <각설탕>에서는 말이 죽자 주인공이 우는 모습을 10분간 보여준다. 그런 관성은 한국영화에서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괴물>에서는 장례식장에 건조함과 비장함이 기묘하게 동거하고 이 역시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코드들이 대중화되고 있다는 것을 <괴물>이 보여준다.

김소영: 박찬욱의 코드이기도 하다. 파토스를 길게 지속시키지 않고 다른 요소들을 틈새에 끼워 지속을 짧게 만드는 것.

정성일: 2006년 7월 <괴물>의 대중적 호소력이 바로 이것이다. 봉준호의 영화는 팝하다고 생각한다. 구태여 정의하자면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아방팝 정도? 만화를 보고 어른이 됐고 지금도 만화를 보는 한국 관객이 팝한 감각으로 팝한 영화를 만나는 시기에 도착한 게 아닐까라는 느낌이 크다. 11일 만에 600만명이 들었다면 성공 정도를 뛰어넘어 얘기가 다른 것이다. 굉장한 호소력이 있고 대중적 감각과 소통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또, 괴물이 나타나는 상황은 끔찍한데 그 비극을 가장한 영화를 보는 대중의 기쁨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방점은 비극의 호소력이 아니라 비극을 즐긴다는 것이다.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때 파토스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비극은 그저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것이 즐거움의 대상으로의 축소인지, 치환인지, 대체인지는 더 토론해야겠지만 그렇게 됐을 때 이 영화를 즐기는 대중적 감성이라는 건 비극에 관한 문제뿐 아니라 가족이나 젠더정치학 등 <괴물>이 지닌 불균질적인 텍스트와 그 속의 모순들을 관객이 팝하게 즐긴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허문영: 두 가지를 구분해야 되지 않을까. 한국 관객이 다른 어떤 문화권의 관객보다 비극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점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대작을 만들려는 제작자들은 영화가 기본적으로 비극으로 가야 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대부분의 대작들은 비극으로 갔다. 그중 몇편은 800만~1천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그 비극들은 <괴물>과 반대로 파토스의 과잉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봉준호식 비극은 팝한 것이다. 그것이 꼭 만화적인지는 더 토론할 필요가 있겠지만, 봉준호와 박찬욱이 가진 공통적 태도는 말해지고 있는 대상, 찍는 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비웃음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정치적 의제와 싸우는 사람도 비웃고 어떤 것도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게 하는 끊임없는 조소의 중첩,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유희적 요소를 가졌다. 2000년대의 비극적 대중영화들을 즐기는 방식과 <괴물>을 즐기는 방식은 전혀 반대편에 있는 것 같다. 여전히 파토스의 과잉이 호소하는 대중적 요소가 있고 그것이 주류였고 그것이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영화가 500만명 이상을 크게 넘지 못하는 저지선이 돼왔는데 이제는 파토스의 과잉뿐 아니라 파토스의 유희적 단절로 호소하는 방식도 그만한 대중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괴물>이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김소영: 엇박자의 유머나 비극적 엔딩이 흥행에 장애가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로 보면 몽땅 플러스로 작용한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 전환점이 되는 것 같다. 수용의 장에서 유희로 받아들이는 특성은 실은 김기영 감독에게 이미 보여졌던 것이다. 호스티스 딸은 울고 있는데 엄마는 돈 세고 있는 모멘트 같은 것은 자식 잃은 부모 앞에서 돈 얘기 하는 식으로(<친절한 금자씨>) 박찬욱 감독이 거의 빌려갔다고 보여진다. 봉준호 감독은 그보다 인간적인 버전으로 조롱과 비웃음을 유희할 수 있도록 넣어놓은 것 같다. 괴물의 타자성과 연관해 다시 말하자면, 에이즈 시대의 괴물이 영화 속에서 피범벅으로 등장하듯 일반적으로 괴물은 시대·정치적 무의식의 형상화로서 중요하다. <괴물>에서 괴물의 형상은 거기서 어떤 정치·사회적 공포나 무의식을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역으로 그 점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유희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성공한 것이 아닌가 싶다. 첫 장면에 정치성을 코드화한 영화치고는 괴물의 기형성이 심오한 정치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파토스의 부재와 더불어 괴물의 형상화에서도 심층적 공포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점이 결과적으로 흥행에 도움이 된 것 같다.

허문영: 첨언하자면 정치적 코딩에도 불구하고 심연의 공포를 건드리지 않는다기보다 처음부터 너무 명백하게 정치적으로 코드화돼 있어서 오히려 이런 방식의 괴물이 어울린다고 본다. 연원이 불투명하면 생김새도 명확하지 않은 공포를 불러일으켜야 하는데 이 괴물은 무섭다기보다 깔끔하다. 두려움의 전염성도 없고 그 자체로 큰 솥에 넣으면 바로 정리될 듯 보인다. (웃음) 게다가 바이러스의 존재는 허구이고. 나와 김소영은 포스트적인 불균질성, 정성일은 팝한 것으로 표현한 파토스의 간헐성 혹은 중단으로 이야기방식을 지적했는데 그것이 사실은 영화에서 괴물을 포함한 모든 대상에 적용된다고 본다. 괴물은 그것이 가진 공포가 크지 않음을 계속 드러내고 가족은 그렇게 슬프지도 무섭지도 않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이 전체를 일종의 게임으로 만들어간다. 고전기에 나왔다면 아방한 요소로 받아들여지겠지만 지금은 자기 유희, 자기 반영성이라는 것이 광고에 나올 정도로 상업적인 시대다. 포스트적인 대중문화시대에는 그런 방식이 매우 대중화된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누구도 심각한 얼굴로 극장을 나서기는 힘들 것 같다. 기괴한 게임을 보고 나가는 심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김소영: 대중영화의 새로운 분수령이라는 점이 우리가 함께 도달한 결론인 것 같다. 대중적 감정의 재구성. 그것이 전에는 300만명이었다면 이제는 1천만명까지 갈 수 있는 정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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