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 이 영화에서 또 한 가지 의아했던 부분은 가족의 심리적 발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왜 삼촌과 고모가 쫓아가는가. 보통 이런 영화에서 이런 인물들은 처음엔 조카를 구할 생각이 없다가 점점 달라지고 자기가 해결해야 할 사연을 만들어서 내면화를 통해 외재화된 괴물을 처치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 구조다. 그런데 그들은 시작하자마자 급박하다. 이렇게 인물들의 심리가 평면적일 수 있는가. 에필로그에 현서에 대한 어떤 애도도 없다는 것도 신기하다. 아무리 아이가 (세주로) 대체되었다 하더라도 이 밤 속에서의 각성 중에 영화의 음악은 웃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괴물은 낮에만 나타난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밤이 나왔고, 그 밤이라는 실재는 동화라기보다 블랙홀 같은 거다.
허문영: 심리적 발전이 없다는 건 비판할 수 있지만 그건 애당초 봉준호 감독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감독에겐 괴물을 등장시킨 싸움의 과정이 필요했고, 괴물도 가족도 온전한 파토스를 지닌 존재로 그리는 데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파토스가 중단될 때마다 괴물과 인물은 모두 시뮬라크라화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이 어떤 실존적 결단에 의해 행동하는지 묻는 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이 밤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마지막 장면에 원인을 남겨두려고 했을 때 그 시점은 밤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정성일: 만약 밤이 아니라 괴물의 뱃속이라면 어떻겠나. 마치 피노키오처럼 시뮬라크라화된 대상에게 먹힌 것이라면.
허문영: 그런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기나긴 괴물과의 싸움 이야기로 끝 맺으면서 마지막으로 당신은 무서운 동화를 한편 본 것일 뿐입니다라고 의도적으로 말하는 일종의 소격효과로 보는 것이 맞지 않나.
정성일: 이 영화에는 소격효과가 없다고 본다. 소격효과는 각성효과인데 각성하게 하지 않는다. 정치적 이성에 대한 냉소적 비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밤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이 정치적 이성 자체를 무력화시킨 게 아닌가, 그것이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크게 실망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허문영: 한 장면을 두고 느낌의 다름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합의를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어쨌든 이 장면이 지닌 세트의 인위성이 복합적인 느낌을 주는 건 사실이다. 그걸 괴물의 뱃속이라거나 시뮬라크라화된 게임을 끝내는 방식으로서의 자의식적 미장센이라는 데에는 공감하지만 그것이 아름답다, 평화롭다, 트라우마가 없다라는 의견엔 동의하기 힘들다. 이상한 불안함, 불길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 불안한 와중에도 불구하고 덜떨어진 사내 하나가 깨어 있다. 어떤 미장센이나 앵글로도 그가 깨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해서는 안 된다. 깨어 있는 행위가 뭘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은 없지만 영화는 그 행위를 지지한다. 열광적 박수가 아니라 아무것도 해결 못하는 무력한 이 세상에서 보여줄 수 있는 봉준호의 최소한의 예의라고 할까.
김소영: 그런 마무리는 속편을 만들던 관행, 정치적으로 해석하기 어렵게 굳어진 관습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강두가 깨어 있다는 것은 공포영화의 속편 관행을 따르는 것 같고, 현서에 대한 애도도 없이 밥 먹는 데 집중하는 장면에서 끝나는 것이 굉장히 비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허문영: 어쨌든 봉준호 감독은 건전한 상식과 지혜를 가진 시민이고, 그가 미군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면서 현실의 사건을 끌어들이는 순간부터 이 영화는 비관과 냉소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희망이 이 정도라는 것이다. 과연 이게 희망인지조차 불투명한 희망.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면 감독 자신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대가 무슨 소용있냐고 할 정도로 모호하고 미약하고 무기력하지만 깨어 있음, 살아 있음, 같이 밥 먹음, 가족도 아니지만 자기 손으로 끄집어낸 아이와 살아감. 그 정도가 감독 자신이 정치적 사건을 끌어들였을 때 양심에 거리끼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최대한의 낙관 아닐까.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반미다, 아니다라는 것은 초점에서 벗어난 논쟁 같다. 오히려 굉장히 시민적인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본 것이라고 본다. 시민정신이 부재한데 강두만이 그 시민정신의 힘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시민성이란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의 시민이 아니라 고대적인 의미의 세계시민성,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던 정신, 디오게네스가 말한 ‘자신이 소속된 폴리스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인 개인으로서의 시민성’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과 맞서 싸우는 무리에 강두 가족뿐 아니라 미군에서 노숙자까지 포함되는 거다. 국민국가를 전제한 기획영화라면 등장하지 않을 사람들이 다 등장한다. 그런 세계시민적 태도가 있다. <한반도>에서는 우리, 나의 울타리, 국민국가라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명백한데 <괴물>에서는 그 울타리가 미군 대 제3세계 가족으로 보이다가 갈수록 그 경계도 애매해진다. 여기서 괴물과 마주 보고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그것은 국가나 계급도 아니고, 보편적 세계시민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나쁜 질서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적 태도라는 거다. 그런 시민이 노숙자 빈민연대에서 아주 가냘프게 보는 것,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영화를 철저한 비극으로 끝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양심이나 교양을 저버리지 않는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정성일: 그래서 정치적으로 하소연하고 싶다. 강우석 감독에게는 ‘왜 최민재는 마지막 순간에 진짜 국새는 없었다고 말할 수 없었나’, 봉준호 감독에게는 ‘왜 현서를 결국 살릴 수 없었나’.
김소영: 현서에 대한 질문은 지금까지 나에게도 남아 있는 것 중 하나다. <한반도>가 초반부에서 보여주는 경의선이 달릴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이 영화의 유일하게 성공적인 대중적 해방감인 것 같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소피 소령이 아무렇지 않게 JSA의 남북 경계를 넘는 장면이 주는 영화적 해방의 순간처럼, 정말 경의선이 뚫렸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한반도>가 아무리 모순적이라고 하더라도 대중영화로서 맨 처음 던진 그 약속을 살렸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괴물>에서는 현서의 죽음 이후 ‘왜 현서를 결국 살릴 수 없었나’ 하는 하소연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정성일: <한반도>가 블록버스터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이후 한국 상업영화 공식의 결정판이자 그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면 거의 같은 시간 우리 앞에 도착한 <괴물>은 좌표 자체를 다시 짠 것 같다.
허문영: <한반도>는 한국 영화사에서 굉장히 유별난 영화다. 정성일이 지금 말한 어법에 맞는 것은 <태풍> 같은 영화다. <한반도>는 어쩌면 강우석이 가진 정치의식을 가장 비대중적인 방식으로 드러낸 영화일 것이다. 대중영화의 공식을 밟지 않고 400만명까지 모았다는 것에 놀랐다. 오히려 <태풍> 같은 영화가 호소할 수 있는 관객층이 바뀐 것이고 <괴물>처럼 포스트적인 이야기 방식이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다고 보인다.
정성일: <왕의 남자>와 <괴물>의 성공이 어떤 점에서 보면 매우 다행인 것이, 이른바 선수라고 생각하는 충무로 투자자들의 공식을 두 영화가 깨버렸다는 것이다. 봉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괴물>은 “100억원짜리 이무기 영화를 찍는다고?”다(7월10일자 <한겨레> 인터뷰 중에서) 실제로 시나리오를 읽을 때 대중적 상업영화라는 느낌은 받기 힘들었다. <왕의 남자>와 <괴물>의 공통점은 아무도 성공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성공이 한국 영화계 감독들의 상상력을 위해서 스펙트럼을 넓게 만든 긍정적 효과는 명백히 있다.
김소영: <왕의 남자>는 그렇지만, <괴물>은 측량하고 계산된 영화다. 150억원짜리 영화를 관객 수에 대한 계획없이 만들 순 없으니까. 문제는 <괴물> 탓만은 아닌데, 스크린 장악에 따른 상대적·절대적 박탈감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귀를 기울여 배급구조가 바뀔 수 있는 전기가 마련돼야 할 것 같다. 영화 자체는 보수적이지 않더라도, 600만~700만명이 한 영화를 향해 달려가는 관람행위 자체는 너무 집단주의적이다.
허문영: 어쨌든 2006년 여름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두 가지 새로운 유형의 영화가 도착했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한국 대중영화 지도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 본다. 김소영의 말처럼 승자 독식 배급이란 문제를 제외한다면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