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전영객잔 3인, <괴물>과 <한반도>를 논하다 [3]
2006-08-31
정리 : 박혜명

정성일: <씨네21> 566호에 실린 허문영의 평을 보면, 자살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 사람의 자살을 말리기 위해 달려온 등장인물들이 영화 후반부에 재등장조차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괴물>의 시나리오를 보면 초반에 강두가 낮잠에서 깨어나기까지 실제로 더 많은 신이 있다. 프롤로그가 긴 것이다. 우리가 본 버전은 타협한 버전이다. 프롤로그를 다 찍든지 혹은 다 버리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타협하고 난 결과, 관객은 프롤로그에 구애받지 않고 영화를 본다는 느낌이 있다. 만약 이 프롤로그없이 괴물의 공격으로 영화가 바로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그 프롤로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가.

허문영: 그 점이 봉준호 감독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하다. 나에게 선택하라고 했으면 초반의 세신은 드러내는 것이 맞다고 본다. 미군이 독극물을 방류했다는 설정은 나중에 미국의 바이러스 운운하는 내용과 직접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 설정이 없어도 뒷부분이 말이 된다. 자살하는 사내의 등장 역시 없어도 된다. 이 장면을 넣음으로써 훨씬 해석이 복잡해진다. 사내가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이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을 여기까지 몰고 온 어떤 것과 괴물을 동일시한다. 물론 이 장면 하나로 영화의 정치적 해석 자체가 달라질 필요는 없다. 프롤로그의 설정들은 군더더기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인 짐작으로는 감독이 대작 상업영화를 만들면서 가지게 되는 정치적 자의식의 투영이라고 본다.

정성일: 나는 프롤로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따라 <괴물>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프롤로그가 없으면 결과를 놓고 벌이는 내기가 되는 것인데 프롤로그가 있으면 원인을 방어하는 것이 영화 전체에 매우 중요해진다. 즉 내기의 방식이 달라진다. 마지막까지 원인만 남고 모든 잘못은 다시 원인으로 돌아가는 식, 원인을 방어하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식이 되는 것이다. 내게는 이 영화의 에필로그가 에필로그라기보다 프롤로그의 다른 판본처럼 보인다.

허문영: 똑같은 의견인데, 내적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프롤로그가 원인을 제시한 이후 영화에서 보이는 것은 결과밖에 없다. 끝내 그것이 봉준호의 정치적 자의식이기도 하다. 독극물 방류는 너무 직접적인 설정이라 상징 효과나 은유의 쾌감이 없다. 실패한 사업가의 이미지를 지닌 사내의 자살 에피소드도 그런데, 그 두신을 배치함으로써 괴물을 없애도 괴물을 만들어내는 세상의 나쁜 질서는 남아 있다는 것을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한 셈이 되었고 통상적인 괴수영화가 가지고 있는 완전한 해결을 감독은 처음부터 회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흥행에 도움되는 요소는 아니더라도 흥미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프롤로그)의 세 번째 신(남자의 자살신)은 끝까지 대답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매우 불균질하다고 생각한다.

김소영: 한강과 한강다리의 역사적 기억이 이 영화에서는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한강이 갖고 있는 비극적 사건 가운데 하나가 투신자살이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투신자살 장면은 상식적인 인트로라고 생각했다.

허문영: 자살하는 사람을 그냥 바라본 것이라면 상식적인데 남자는 죽기 전에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이라고 했다. 그는 이미 많은 걸 아는 것이다. 그냥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의도한 돌연한 중단이 거기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가 냉혈한 같은 표정을 지을 때 분명 돌연한 중단이 있다. 거기엔 발언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김소영: 전체적으로 <괴물>은 원인이 지배하고 있다. 문제의 원인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게 이 영화의 구조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 같은 점에 있어서도 남자가 자살하는 장면은 투신자살이 한강가는 목적 중 하나이기 때문에 흔히 공포영화에서 괴물이 등장하기 전에 나오는, 비가시적이면서도 그 존재를 알려주는 관습적인 과정으로 매끄럽게 봤다. 어떻게 보면 <괴물>은 미군의 독극물 방출사건이라는 집단적 기억의 후일담이다. 가까운 과거에 대중화된 사건이 영화적으로 그 후일담이 다뤄지는 현상 속에서 이 영화를 바라볼 방법은 없을까? 그렇다면 <괴물>은 <살인의 추억>과 연관성이 있을 것 같다. 

허문영: <살인의 추억>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공통점을 찾자면 이렇다. 둘 다 실화에서 시작하고 있고, 실화로부터 비롯된 원인제공자 또는 그 같은 원인제공의 결과를 좇는 방식이며, 그 원인이란 없어져야 될 나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에서는 환기의 보충 장치로 기억의 이야기를 한다. 연쇄살인범이 있었고 그가 불러일으킨 공포를 시대적인 억압과 연결시켰다. 반면 독극물 사건에서 봉준호가 발견한 것은 기억의 상실이다. 분명히 나쁜 것이 있었고 지금도 있는데 이제는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되어지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찾는 행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보는 행위다. 눈앞에 있는 걸 강두는 보는데 왜 다른 사람은 못 보며 못 본 척하는가라는 차원에서 후일담을 불러오는 방식이 <살인의 추억>과는 다르다.

정성일: 결정적으로 나와 허문영의 견해가 달랐던 부분이 마지막 싸우는 장면이다. 이 영화가 원인을 방어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과 대상의 비가시성에 대해서는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그렇게 때문에 나는 마지막 장면의 연대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그것이 연대라면 연대에 대한 봉준호의 비웃음이라고 본다. 도시빈민, 노숙자, 만년 3등 양궁선수, 전직 운동권 등이 모여서 벌이는 괴물과의 마지막 싸움은 우스꽝스럽다. 화염병은 단 한번도 맞지 않고, 남주의 화살이 맞는 것조차 목표를 명중시키는 건 아니다. 또 그것이 통상적인 연대라면 결말에 가서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살아가거나 지금의 에필로그는 없어야 한다. 그런데 누구도 영화를 보고 남일과 남주와 강두가 같이 살 것이라는 기대는 안 한다. 더이상의 연대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 관계도 아니었던 한 아이와 강두가 같이 살게 됐을 때 강두는 밤에도 안 자고 깨서 두리번거린다. 그 순간이 1980년대라는 마법의 순간, 모두가 연대해서 싸웠던 그 마법을 깨버리는 순간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연대에 대한 희망을 더이상 갖지 않는다는 결단이 프롤로그를 버릴 수 없는 이유라고 생각하는 거다.

김소영: 나는 연대와 조소의 중간지대의 해석을 했다. 연대가 꼭 성공이 아니라 그것의 실패를 통해 다른 것을 촉발시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존속하는 80년대에 대한 기억이 억지이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정 선생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강두가 깨어 있는 존재로 거듭나는 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밥 먹는 것, 즉 기본적인 욕구는 돌아 오지만 강두 자체는 잠 못 드는 밤을 맞는 불안한 엔딩인데, 그런 결말의 장면이 80년대식 연대와 80년대의 자멸을 분리했다는 느낌이다. 그런 식으로 마지막과 처음이 붙게 되는 원형구조로 끝나게 되는 것 같다.

<괴물>

허문영: 정성일의 견해에 90%까지 동의한다. 남일은 운동권 출신이며 도바리(도망)의 천재다. 그런데 그가 던진 화염병은 목표를 명중하지 못한다. 이른바 저항운동, 진보적 시민운동, 학생운동의 모습이 이 상징에 투영된다. 적으로부터 도망은 잘하지만 정작 목표가 되는 적을 맞추진 못하는 것. 즉 일종의 헛발질이지만 누군가가 다른 공격을 할 수 있도록 연결시키는 부수적인 역할은 한다. 이를 이미지로 드러내주는 다른 장면이 환경단체 시위 때 공중에서 미친 듯이 나부끼는 풍선 인형의 허황된 몸짓이다. 남일은 괴물도 맞추지 못하고, 결국 남주가 괴물을 맞췄는데 그래도 조카는 못 구한다. 그렇다면 이 해결은 너무 허망한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것이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행위, 영웅적 행위가 이룰 수 있는 최대치라고 보는 것이다. 그나마 중요한 건 어쨌든 그래도 괴물에게 끌려간 아이(세주)를 구해냈다는 것이다.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헛발질을 너무 많이 했고, 엉겁결에 도달한 마지막 순간에도 (현서를 살려내지 못했다는) 결과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한 아이를 구했다. 이 아이의 모습은 노숙자(윤제문)의 모습과 겹친다. 여기서 그나마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감독은 묻는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원인들을 누가 지켜볼 것인가. 바이러스나 괴물은 없지만 원인은 있다. 아무도 안 보는 그것을 유일하게 강두가 지켜본다. 그 곁에 밥 먹는 아이가 있는데 혈연은 아니다. 이 설정에서, 모든 것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누구를 믿겠느냐고 영화는 묻는 것이다.

김소영: 그건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낙관적인 해석이다. 이 영화에서 모성과 함께 또 하나의 흥미로운 부재는 트라우마다. 세주는 괴물과 관련된 온갖 걸 다 보고 겪은 담지자고 목격자인데 마지막에 보면 잘 먹고 잘 잔다. 모든 트라우마를 희석시키는 놀라운 결말이고 결과적으로 관객에게도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는다. 괴물이 살아날까, 독극물이 또 괴물을 만들어 낼까 등등의 질문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밥 먹고 잘 살자, 밥만 먹으면 된다, 는 식이다. 그래서 비극적으로 끝난다기보다는 트라우마를 없애면서 끝내는 결말이 아닌가 싶다.

정성일: 트라우마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사실상 이 영화는 가장 절망적으로 끝나고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는 셈이 된다. <괴물>이라는 타이틀이 뜬 다음 맨 처음에 깨어 있는 인물이 세주다. 강두는 자고 있고, 물건을 집으러 온 애가 세주니까. 그 점에서 이 영화의 완벽한 목격자, 끝까지 깨어 있는 사람은 세주라는 한 사람이다. 그에게 아무 트라우마없이 끝난다는 건 이 영화에 대한 가장 절망적인 해석의 판본으로 보인다.

허문영: 그 트라우마를 개인을 통해 드러내지 않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미장센을 통해 드러난다고 본다. 마지막 장면은 현실적이지 않다. 한강을 언제 어떻게 찍어도 그런 미장센은 안 나온다. 강 건너가 그렇게 깜깜할 수 없다. 눈은 내리고 오로지 불빛이 비치는 곳은 작은 매점밖에 없다. 이 공간에서 그렇게 엄청난 비극을 겪은 아이도 계속 잔다. 그리고 밥을 열심히 먹는다. 개인을 통해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장면이 판타지처럼 찍혀 있는 자체가 거대한 트라우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속의 인물들이 무기력하지만 끊임없이 먹거나 자거나 하는 데서 봉준호의 인간관, 정치적 견해가 드러난다.

김소영: 판타지는 맞는데 거의 동화적으로 묘사된다. 음악까지 계속 가볍게 조롱하듯이 사용되면서 동화처럼 끝난다.

허문영: 만일 둘이 편하게 자는 장면이었다면 그것이 동화적이라는 데에 동의하는데, 강두가 공포를 느끼고 깨어 있다는 건 프롤로그 세 번째 신에서 자살한 사내가 던지는 질문, 즉 ‘(나는 보는 것을 당신들은) 왜 보지 못하는가’에 대해 강두가 대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눈앞에서는 안 보이지만 뭔가 있는 것 같다, 라는 태도는 최초의 원인에 대한 경계인 것이다. 그 불안이 남아 있는 한 마지막 장면은 동화가 될 수 없다.

김소영: 강두의 매점을 잡을 때 조명이나 앵글 등이 ‘헨젤과 그레텔’ 식이다. 강두가 아니라 세주의 시선으로 이 집을 바라보고 있다. 그건 트라우마의 부재와 연결된다.

허문영: 결국 선택적 읽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아까 우리가 말했듯 이 영화에는 원인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전혀 해소되지 않았고 그러는 한 강두는 깨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이 아무리 동화적이라 해도 동화 속에 포함될 수 없는 어둠이 그 속에 있다. 그게 이 영화가 남기는 트라우마다.

김소영: 세주가 밥 먹는 장면이나 카메라가 매점을 잡아내는 방식은 어떤 정치화도 안 된다. 이 영화가 견지하는 다음 세대의 정치성은 없다는 거다. 내가 말한 허무함, 비관이란 건 영화가 이처럼 트라우마를 견지하지 않기 때문에, 세주에게서 그것을 없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허문영: 이 영화의 정치성을 말할 때 과장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영화의 정치적 각성의 수준이 새로운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21세기에 상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충분히 공유될 만한 비관, 전망없음, 불안감이다. 독극물 방류를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분개나 정치적 구호의 허망함, 혹은 80년대 정치적 실험의 어떤 지점에서의 실패 같은 건 모두 공감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의 특별한 비관적·냉소적 시선을 읽는 것은 이 영화의 정치적 사고를 지나치게 특별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다. 따라서 그나마 이 영화가 괴수영화의 관습인 전문가들의 존재를 모두 무시한 채 한 생명을 구하는 행위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이 사회의 루저들로 설정하고 또 노숙자로 커갈 아이를 강두가 먹이고 원인을 주시하기 위해 불안에 떨고 있는 장면을 넣은 것은 이미 상식이 된 정치적 비관이나 냉소에서 끝나는 건 아니라는 거다.

정성일: 마지막 장면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왜 그 장면을 세트장 안으로 들어가서 찍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괴물>은 한강에서 현장을 통제하는 데 명백한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영화의 대부분 분량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고수했다. 그럼에도 굳이 에필로그만 세트 촬영을 한 것은 에필로그가 험한 일을 겪고 난 두 사람의 시뮬라크라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퇴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실재하는 세상으로부터 상상적인 시뮬라크라로 물러났을 때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정치적인 이야기를 실컷 하다가 마치 꿈처럼 시뮬라크라로 끝나면 연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게 연대라면 마지막 질문은 이거다. 왜 현서랑 같이 살지 않았나. 현서는 이 모두를 묶는 매듭인데 그걸 다 끊어놓고 세트장 안으로 끌어와서 세상을 시뮬라크라화했을 때, 구태여 안으로 들어와서 영화를 끝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 연대가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허문영: 현서의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은 일종의 가족의 옹호, 가족주의적 기치에 대한 영화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한 냉혹한 거절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신은 어떻게 살겠는가를 감독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명백하게 판타지다. 왜 그 장면을 세트장으로 들어가서 찍었느냐고 했는데, 사실 이 영화가 시뮬라크라화돼버리는 것은 하강 둔치 밖 세상 사람들이 괴물에 대해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기 시작했을 때이다. 그때부터 이미 한강 둔치 안과 밖은 똑같이 현실의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고도로 인위적인 두개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분리된 공간을 만드는 시점부터 이미 <괴물>을 현실적인 이야기로 읽어주길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마지막 장면에서의 인위성은 바로 그 점(<괴물>을 현실적인 이야기로 읽어내지 말 것)을 일부러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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