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9·11 테러는 할리우드를 어떻게 바꾸어왔나 [2]
2006-09-13
글 : 문석

9·11 음모론에 관한 다큐 <루즈 체인지>의 반향

하지만 징후는 징후일 뿐이다. 할리우드가 9·11의 징후를 영화 안에 살짝 새겨넣는 세공술에 몰두하는 동안 미국 바깥과 독립영화계는 9·11의 본질을 캐물었다. 2002년 선보인 옴니버스영화 <2001년 9월11일>은 대표적인 경우다. 이마무라 쇼헤이, 켄 로치 등 세계적인 감독 11명의 11분9초1프레임짜리 단편을 모은 이 영화는 9·11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보여준다. 또 다른 9·11, 즉 칠레의 피노체트가 아옌데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1973년 9월11일을 그리는 켄 로치처럼 각각의 감독들은 자신의 개성에 따라 9·11을 해석했다. 독립영화계도 노엄 촘스키와의 대화를 담은 <권력과 테러>를 비롯해 주로 9·11 테러가 발생한 진정한 이유와 그것이 일으킨 파장, 그리고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의 부도덕함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내놓았다. 결국 올해 열린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는 이라크 전쟁에 대해 비판적 시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가 한꺼번에 주목받기도 했다.

9·11에 관해 가장 저돌적인 ‘독립영화’는 바로 딜런 에이버리의 <루즈 체인지>다. 2005년 4월 오리지널 버전이 DVD와 인터넷 파일로 등장한 이래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온 이 영화는 올해 1월 ‘개정 증보판’인 <루즈 체인지 세컨드 에디션>을 통해 더욱 많은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펜타곤에 부딪혔다는 AA 77편은 왜 아무런 잔해를 남기지 않았는가’, ‘세계무역센터는 왜 한층씩 차례로, 그것도 자유낙하 속도에 가깝게 붕괴됐는가’, ‘왜 클리블랜드시의 고위 간부는 펜실베이니아 들판에 떨어졌다는 UA 93기가 클리블랜드 공항에 착륙했다고 말했나’ 등 숱한 의문을 제기하는 이 영화는 결국 9·11 테러가 부시 정부의 자작극이라고 단언한다. 인터넷을 통해 젊은이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진 이 영화는 ‘9·11 진실운동’의 뇌관 역할을 하고 있다. 에이버리의 팬들은 <루즈 체인지>를 <매트릭스>의 ‘빨간 약’에 비유하며 ‘현실-진실’ 속에서 함께 살아갈 것을 외친다. <루즈 체인지>는 확실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데, 올해 6월 조그비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인의 42%가 “미국 정부와 9·11 조사위원회가 9·11 공격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와 모순되는 결정적 증거를 은폐하거나 조사를 거부하고 있다”고 답했다.

물론 <루즈 체인지>의 음모이론은 허술한 점이 많다. 그러나 만약 ‘영화는 그 당시의 사회를 반영하고 사회와 함께 호흡해야 한다’는 윤리적 덕목을 주장할 수 있다면, <루즈 체인지>는 최소한 9·11과 그 이후의 현실과 정면으로 맞서려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타임>의 영화평론가 리처드 콜리스는 9·11 이후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전쟁영화는 고작 2편이며 이라크 전쟁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30∼40년대 할리우드가 독일군을 사디스트로, 일본군을 미친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프로파간다영화’를 제작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상황이라면서, “최소한 40년대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그들의 시대를 규정한 전쟁을 무시하진 않았다”라고 꼬집는다. 우파적 사고를 가진 누군가라면 ‘할리우드는 왜 2차대전 때처럼 국가를 위해 영화를 만들려 하지 않냐’라고 캐물을 수도 있겠지만, 21세기에 그건 너무 순진한 질문이다. 2003년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회장이던 프랭크 피어슨은 한 토론회에서, 30∼40년대에는 스튜디오들이 한 가족에 의해 경영됐기 때문에 자신들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거나 돈을 잃을 것을 뻔히 아는 영화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스튜디오가 주주들의 이익을 생각하는 기업적 존재가 되면서 돈이야말로 유일한 최우선 과제가 됐다”고 말한 바 있다. 결국 문제는 돈이다. 리처드 콜리스는 “영화제작자들은 우리의 욕망뿐 아니라 우리의 공포로부터 이윤을 뽑아내길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커다란 공포는 꺼린다”고 말한다.

‘안전제일주의’ 전략으로 접근한 할리우드의 9·11 프로젝트

그렇다면 할리우드가 올해 들어 2편의 9·11 영화를 발표한 것은 이 소재가 이윤 창조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플라이트 93>이 개봉을 앞두고 올해 3월 예고편을 내보냈을 때, 그리고 개봉 초기만 해도 관객은 “너무 일러”(too soon)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지난해 올리버 스톤이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연출한다는 발표가 나왔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JFK> 같은 영화를 통해 음모이론의 대가로 등극한 그였기에 9·11을 숭고하게 보존하고자 했던 네티즌은 강력히 반발했다. 지난 5년간 할리우드가 우려한 바는 현실로 나타나는 듯 보였다. 상당수 미국인들은 “국가적 비극인 9·11을 상업적인 목적에 이용하려 한다”며 스튜디오를 맹비난했고, “많은 사람들은 할리우드가 지금 이 시대에 관한 의미있는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왜 그런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우리를 비판하냐”는 마이클 섐버그(<월드 트레이드 센터> 프로듀서)의 볼멘소리는 그 비난 속에 묻혔다.

<플라이트 93>

하지만 막상 두 영화가 공개되자 반감은 누그러졌다. 두 영화 모두 이 민감한 주제를 지극히 조심스럽게 다뤘기 때문이다. <플라이트 93>은 대상과 시종 거리를 두는 다큐멘터리적 방법론을 선택했다. 감정 개입을 최대한 자제한 채 관객을 비탄스럽기 짝이 없는 당시의 시간과 공간으로 묵묵히 인도한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정치적 발언을 최소화한다. 사실 올리버 스톤의 9·11 영화에 대한 우려는 2001년 10월 뉴욕영화제의 한 토론회에서 본격화됐다. “나는 테러리즘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것은 <알제리 전투> 같은 영화가 될 것이다. 통상적인 영웅을 찾지 않고 리얼하게 표현된다면… 당신은 아랍과 미국 양쪽을 모두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당시 올리버 스톤이 밝혔던 ‘계획’과는 정반대의 영화다. 영화는 이 빌딩에서 사망한 3천명이나 함께 구조작전에 투입됐다 목숨을 잃은 10여명의 경찰관 대신 극적으로 살아난 두 사람의 인간승리에 초점을 맞춘다. 아랍의 흔적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 보수언론의 대명사 <폭스뉴스>의 한 진행자조차 “최고의 친미국인 영화이자, 친가족적 영화이고, 친남성적인 영화”라고 칭찬했을 정도다. 두편의 영화로 미뤄볼 때, 결국 할리우드는 ‘안전제일주의’ 전략을 통해 9·11 프로젝트의 스타트라인을 끊는 데 성공한 셈이다. 이 다소 밋밋한 프로젝트들은 당장의 이윤에 도움이 안 될지 몰라도, 미래의 다른 9·11 영화가 만들어낼 이윤에는 단단한 버팀목이 될 것이 틀림없다.

본질적으로 불변한 9·11 이후 할리우드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 할리우드는 진정 세계무역센터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에서 벗어났는가. 9·11을 소재로 한 영화에 관해서 말하자면, 할리우드는 5년 전 드리워진 무거운 커튼을 아직 힘있게 들추지 못했다. 물론, <플라이트 93>과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할리우드가 최초로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 <그린베레>(1969)와 비교하는 것은 결례일 것이다. 존 웨인을 내세워 ‘힘있는 미국’을 한껏 강조한 이 영화와 두편의 포스트 9·11 영화의 품격을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9·11 버전의 <디어 헌터>나 <지옥의 묵시록>, 또는 <플래툰>의 이라크 전쟁판이 나오기까지는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다. 미국은 여전히 9·11에 관한 자유로운 발언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 탓에 현재 할리우드가 준비 중인 9·11 프로젝트가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룰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9·11을 전면적으로 다루는 영화가 아니라 ‘일반’ 할리우드영화에 관해 얘기한다면, 9·11의 그림자는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할리우드와 워싱턴은 환상을 생산해 대중으로부터 돈과 권력을 거둬들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고, 서로의 생존을 위해 일시적인 제휴를 맺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노선이 전적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아니라고? 누군가는 9·11 이후 만들어진 보수적 정세를 반영하는 폭스의 TV시리즈 <24>가 존재하지 않냐고, 누군가는 9·11 이후 사회적으로 부각된 영웅주의를 담은 <수퍼맨 리턴즈>가 있지 않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과연 그것이 9·11 이후 부시 정부의 암묵적인 압박과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만일까.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할리우드가 세계 정세에 공정했단 말인가. 007은 정말 인류의 평화를 위해 북한에 침투했던 것인가. 인종과 계급 차별에는 관대함을 보였을까. 설마 람보가 베트남 군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M-16 안에 콩알이 들어 있었겠나.

정말이지 9·11 이후 할리우드는 거의 바뀐 게 없어 보인다. 그건 할리우드가 더이상 수십년 전처럼 프로파간다영화를 양산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다행이겠지만, 타자에 대한 관대함, 미국 중심주의의 탈피 같은 9·11의 진정한 교훈을 여전히 충분하게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선 크나큰 불행이다.

<루즈 체인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다큐멘터리가 되어버린 픽션

세계를 뒤흔든 이 초대형 음모이론은 2002년 5월 뉴욕의 한 레스토랑에서 시작됐다. <루즈 체인지>의 감독 딜런 에이버리는 당시 18살로 ‘바인’이라는 레스토랑의 공사에 참여했다가 개장 파티에서도 일을 돕게 됐다. 바로 그날 그는 <소프라노스>의 제임스 갠돌피니를 만나 몇 마디를 나눌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갠돌피니는 그에게 “성공적인 감독이 되려면 세계에 대해 뭔가 할 말이 있어야 돼”라고 말했고, 에이버리는 바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애초 에이버리가 구상했던 <루즈 체인지>는 9·11 테러가 미국 정부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믿는 세명의 음모이론가에 대한 픽션이었다. “영화에 관해 조사를 거듭하는 동안 그 주제가 완전한 픽션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는 꾸준히 9·11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결국 영화는 픽션에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바뀌었다. 2004년 5월 에이버리는 아예 워싱턴 DC로 이주했고, 다음해 1월에는 <루즈 체인지>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DJ 스쿨리가 에이버리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DJ 스쿨리는 에이버리에게 사운드트랙뿐 아니라 녹음 장비까지 제공했다. 그리고 에이버리는 9·11에 관한 음모이론을 다루는 사이트 ‘Letsroll911.org’의 필 제이한의 재정적인 도움을 바탕으로 마침내 2005년 4월 <루즈 체인지>의 DVD 초도물량 1천장을 생산했다. <루즈 체인지>의 제작비는 편집기로 사용한 노트북 값을 포함해 2천달러 정도였지만, 인터넷에서는 발매 초기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에이버리와 여자친구 제시카는 DVD를 직접 손으로 포장하고 주소를 적어 일일이 보내기 시작했다. 폭주하는 주문 때문에 결국 나중에는 우체국 안에 포장 라인을 별도로 만들기에 이른다. 에이버리는 이내 “좀더 강고하고 대중이 소화하기 쉬운” 2차 버전의 제작에 돌입했고 결국 2006년 초 <루즈 체인지 세컨드 에디션>이 나오게 된다. 딜런 에이버리는 최근 <배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5만장의 DVD가 팔렸고, 1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온라인으로 봤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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