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9·11 테러는 할리우드를 어떻게 바꾸어왔나 [3]
2006-09-13
글 : 옥혜령 (LA 통신원)
9·11 이후 미국 대중문화 분석한 USC 영화이론학과 토드 보이드 교수 인터뷰

“9·11과 함께 미국은 끝났다”

토드 보이드 교수는 9·11 사태 이후, 이 사건과 미국 대중문화를 꾸준히 연관시켜 바라봤다. 현재 남가주대학(USC)의 영화이론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며 미디어 전문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미국 대중문화와 영화, 특히 미디어와 관련된 인종 및 계급, 성 정치학 분야의 전문가이다. 독특한 스타일과 대중적이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진행하는 ‘힙합 문화’, ‘미국 영화의 인종, 계급, 젠더 문제’ 등의 강의는 USC 학생들 사이에서 ‘필수’ 코스로 알려져 있다. 2005년 가을 학기에는 영화를 통해서 9·11 이후의 미국을 조명하는 ‘9/11 아메리카’라는 강의를 개설했던 그에게서 2001년 9월11일 이후 5년 동안 미국에서 일어난 문화적 변화에 관해 들어봤다.

-9·11 테러 이후 5년이 흘렀다. 9·11이 미국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문화는 특정 시대 사회상의 반영이다. 때에 따라 그 양상이 미묘하기도 하지만, 9·11의 경우 미묘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다. 미국사회에 끼친 9·11의 영향이나 함의는 한마디로 거대하다. 그리고 명백하다. 지금 5년이 지났는데, 이제야 이 사건이 미국 사람들의 의식이나 문화에 끼친 영향들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소화해서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어느 정도 역사적 거리가 필요하지 않은가. 최근에 <플라이트 93> <월드 트레이드 센터> 등의 영화가 쏟아져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 것 같다. 이제 충분히 비판적인 거리가 생겼으니 9·11이 음악, 텔레비전, 영화 등에 끼친 영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9·11이 미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 글쓰는 것, 음악을 듣는 데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LA타임스>의 기고문에서 9·11 이후 ‘종교의 부활’과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의 확대’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다.
=9·11의 직접적인 결과는 미국인들이 두려움에 빠졌다는 것이다. 신문도 읽지 않고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에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보통의 미국인들이 비행기가 빌딩을 들이받는 장면을 보고, 부시의 “우리가 그놈들을 토끼굴에서 몰아낼 거다”, “정의를 되찾을 거야” 등의 멜로드라마적인 선언을 들었을 때 겁에 질린 거다. 내 생각에 포스트 9·11 시대에 가장 악랄하고 기분 나쁜 정책은 ‘공포의 조작’이었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바로 그 시점에, ‘도덕적 정당성’이 필요한 시점에 구원책으로 등장했다. 종교가 하는 일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정부가 밀어줬고 승인했다. 종교가 포스트 9·11 시대에 미국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을 얘기하자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사례로 들 수 있다. 이 영화의 등장과 대단한 성공이 9·11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히 확신한다. 다른 분야에도 이런 사례들은 많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를 들 수 있는가.
=완전히 반대 진영에서 나온 <화씨 9/11>이 쉬운 예다. 이 두 영화가 같은 해에 나왔다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여러 면에서, 두 영화는 2004년 대통령선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화씨 9/11>이 진보 성향에 호소했다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우익 진영을 대변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영화가 1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마찬가지다. 미국 대중이 이 두 영화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다. 이 두 영화가 선거 기간 중에 양대 진영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입장을 대변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문화’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좀더 구체적으로 할리우드는 이런 사회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할리우드도 미국사회의 한 부분이다. 할리우드가 미국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굳어지긴 했지만, 단언컨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할리우드가 진보적 관점을 지닌 영화를 만든다면, 그건 영화가 어느 정도 팔리기 때문이다. 음반업계도 마찬가지지만 할리우드도 그간 많은 변화로 인해서 침체기를 겪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나 대중의 관람 형태의 변화 등이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개인이 미디어를 생산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있다. 유튜브에 가면 할리우드 간부를 상대하지 않고서도 혼자서 영화를 만드는 게 가능하다. 이런 변화를 겪으면서 할리우드도 앞으로 어떻게 비즈니스를 할 건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요즘 애니메이션이 유난히 많다. 알다시피 아이들이 영화를 보러 가려면 부모를 동반해야 한다. 티켓을 한꺼번에 두장 이상 팔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미디어 생산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유일하게 남은 시장인 셈이다.

-영화의 주제나 내용에는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우리는 9·11 사태를 ‘아이러니의 종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심각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아이러니나 풍자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할리우드도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사실 그렇게 호들갑떨었던 것만큼 큰 변화는 없었던 것 같다. 본질적으로 할리우드는 이익을 추구하는 비즈니스다. 뭐든지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만든다. 요즘 <플라이트 93> <월드 트레이드 센터> 같은 영화가 나오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비판적 거리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시간도 흐르고 수용할 관객층이 생겼기 때문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비판적으로’ 9·11 사태를 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더이상 정부의 설명대로 사건이 일어났다고 믿지 않고 나아가 음모론을 거론하기까지 한다. 당시에야 부시 정권의 고위 관리가 공개적으로 “위기의 시대에는 입조심해”라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각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말하기를 두려워했다고 보면 된다.

-<플라이트 93> <월드 트레이드 센터> 같은 영화는 봤나.
=보지 않았다. 나는 9·11을 ‘기념’하고자 하는 행렬에 동참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그 사건이 두려움을 무기로 삼아 미국인들을 이용하고 조종하는 데 사용됐다는 사실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9·11은 좀더 넓은 시각에서 논의가 필요한 이슈다. 어쨌든 그 영화들은 안 봤고 볼 생각도 없다. 타워가 무너지는 순간을 이미 라이브로 수도 없이 봤는데, 내가 그 사건 자체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게 더이상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루즈 체인지> 같은 영화는 어떤가.
=그 영화도 안 봤는데,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최근 들어 9·11이 정말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영화를 안 볼 거다. 나는 종종 <어 퓨 굿 맨>에 나오는 “당신이 진실을 감당할 수 있나”라는 대사를 인용하곤 하는데,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여전히 보통의 미국 사람들은 ‘미국은 결백한데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 우리의 자유와 라이프 스타일을 싫어해서 빌딩에 비행기를 들이받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무지하고 어리석다.

<화씨9/11>
<화씨9/11>

-80년대 레이건 시대에는 람보가 문화적 아이콘이었다면 부시 시대 혹은 포스트 9·11 시대에도 그런 아이콘이 있을까.
=<덤 앤 더머>? (웃음) 오리지널 람보는 나중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2편부터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대변인이 됐지만 1편에서는 베트남 참전용사였고 자살한 동료 친구 때문에 분노해 정부에 대항하던 인물이었다. 레이건은 배우였다. 그래서 이미지의 중요성, 영화의 파급력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영화산업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도 많다.

-부시 정권의 특별한 문화 정책은 없나.
=시대가 달라졌다. 레이건 때는 냉전 시대의 막바지였고, 따라서 <스타워즈>라든가 <람보>,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이 등장했다. 그리고 레이건은 배우였다. 부시도 배우지만 전문 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부시는 오늘날 미국 정치에서 중요한 건 ‘본질’이 아니라 ‘연기’라는 사실을 몸으로 대변한다.

-‘연기’가 중요해진 상황과 연관시켜서 슈퍼히어로 장르가 유행하는 것도 흥미롭다.
=이런 장르는 오래된 것이긴 하지만 최근 활발히 재활용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영웅은 실제가 아니다. 영웅은 공백을 채우기 위해 존재한다. 흥미로운 부분은 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실제적인, ‘리얼한’ 이 시점에 허구적인 영웅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도피하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껏 말했던 이슈들은 너무 무겁다. 대면하고 싶지 않은 거다. 아마도 이런 점이 슈퍼히어로 장르의 인기를 설명하는 한 요인이 되지 않을까 싶다.

-포스트 9·11 시대의 긍정적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 사이 테크놀로지의 발전이나 세계화, 이슬람 세력의 부상 등 새로운 문제들이 많이 등장했다. 미디어의 생산과 소비의 ‘개인화’라는 문제도 흥미롭다. 또 중국의 부상이나 새로운 지역 구도의 개편,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권의 등장 등 세계 정치적 파워 구도가 변화하고 있다. 지금은 미국이 파워와 부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미 세상은 바뀌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미국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도 언제나 외적인 변화들은 있었지만 미국인들은 무시했다. 하지만 이제는 개인들도 그 영향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변화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20세기에 미국은 잘나갔지만, 이제 끝났다. 9·11은 미국인들이 이 새로운 시대를 리얼하게 인식하도록 화두를 던져주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