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회 베니스국제영화제가 중반을 넘어섰다. 21편의 경쟁작 가운데 16편이 공개됐고 비경쟁부문과 오리존티 부문에 포진한 웬만한 기대작들도 대부분 뚜껑이 열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라인업으로 출발한 올해 베니스에서는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영화제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결국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안에서, 말 많은 기자들이 모이는 기자회견장 안에서 그리고 레드 카펫 위에서 벌어지는 일일 것이다. 경쟁부문, 비경쟁부문, 오리존티 부문 등 주요 부문에서 9월4일 현재까지 상영된 영화들을 중심으로 현지 분위기를 전달한다. 이곳에서 기자와 평론가들 사이에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어낸 영화 5편과 개막작 <블랙 달리아>, 비경쟁부문에 진출해 예상외로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낸 한국영화 <짝패>에 관한 소식을 첨부한다. 리도섬의 레드 카펫을 밟은 스타들의 사진첩도 덧붙였다. 베니스의 화제작들을 ‘시청’하지 못하고 ‘읽어야’ 하는 이들을 위한 디저트용이다.
누벨바그의 현재를 보다
알랭 레네의 <공공장소에서의 개인적 두려움>, 강력한 황금사자장 후보로 떠올라
누벨바그의 현재를 보다. 폐막까지는 아직 며칠이 더 남았지만, 이는 아마도 올해의 베니스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9월2일 알랭 레네의 신작 <공공장소에서의 개인적 두려움>(Private Fears in Public Places/ 120분/ 프랑스·이탈리아/ 경쟁)은 공식상영 이후 사람들의 환호와 함께 6분이 넘는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는 영화제 기간 중 최장시간 기립박수 기록을 남겼다. 거기엔 올해로 84살이 된 노장에 대한 존경이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화제 공식 데일리 <챠크>에 실리는 이탈리아 내 10개 일간지의 평론가 별점 그리고 이곳에서 만나는 각국 기자들의 평가를 종합하면 <공공장소에서의…>는 가장 강력한 황금사자상 후보 가운데 하나다. 현존한 누벨바그 거장의 신작을 모셔오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그 작품이 영화적으로도 화제를 낳았으니 영화제 집행위원장 마르코 뮐러는 무척이나 뿌듯했을 것이다. 9월2일 오후 기자회견장은 할리우드 스타의 출연작 기자회견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사람들로 빼곡했다. 6명의 주연배우들이 앞뒤로 보좌하는 가운데, 마르고 작은 체구의 알랭 레네가 등장했다. 검은 정장, 선명한 붉은색 셔츠, 깨끗한 은발이 도도하면서도 위엄있는 색의 조화를 드러냈고 기자들은 짧은 기자회견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괘념치 않으며 오랫동안 박수를 보냈다. 소란스러운 환호없이 숨죽여 치는 박수 소리가 기자회견장 가득한 감격을 역으로 방증하고 있었다.
일본영화는 침체, 아시아영화는 호평
발랄한 환호가 함께했던 기자회견장은 스티븐 프리어즈의 <더 퀸>(The Queen/ 97분/ 영국·프랑스·이탈리아/ 경쟁)이다. 역시 기자 및 평단, 일반 관객의 고른 호응을 얻어낸 <더 퀸>은 <공공장소에서의…>와 함께 황금사자상의 유력한 후보다. 영화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여왕 2세 역의 헬렌 미렌은 여우주연상 후보로도 점쳐지고 있다. 영화제 시작과 함께 기대를 불러일으켰던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파운틴>(The Fountain/ 미국/ 96분/ 경쟁)과 폴 버호벤의 <블랙북>(Black book/ 네덜란드·독일·영국/ 135분/ 경쟁)의 경우 전자는 허약하고 공허한 철학을 방대하게 부풀려놓았다는 점에서, 후자는 지나치게 평범한 전쟁멜로드라마라는 점에서 실망 속에 묻히고 말았다.
같은 아시아영화로 단일 국가로는 6편이나 초청받은 일본영화는 영화적인 힘에서 이슈를 만들기엔 역부족이었다. 살인사건을 쫓는 형사의 숨겨진 고독과 죄의식에서 비롯되는 <사케비>(Retribution/ 구로사와 기요시/ 일본/ 96분/ 비경쟁)의 공포는 지루하고 새롭지 않으며, <파프리카>(Paprika/ 곤 사토시/ 일본/ 90분/ 경쟁)는 인간의 꿈을 컨트롤할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한 인간들 이야기인데 무한한 상상력을 뽐내는 곤 사토시만의 이미지는 여전히 신비롭고 아름답지만 이야기가 지나치게 방대하고 복잡하다. 오시이 마모루의 독특한 애니메이션 다큐 <다치기시 레쓰덴>(The Amazing Lives of Fast Food Grifters/일본/ 104분/ 오리존티)은 면류로 대표되는 일본 패스트푸드의 발전을 전후 시기에서 현대까지 아우른다. 동시에 일본의 사회와 문화, 정치까지 건드리는 스토리텔링 방식이 매우 놀랍다. 그러나 감독이 끌어들이는 참조자료가 지나치게 많아서 일본 문화에 대한 일정 수준의 지식없이 따라잡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다치기시 레쓰덴>은 상영 도중 관객이 끊임없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마지막까지 남은 관객이 몇 되지 않았다.
고독한 화법을 구사하더라도 기자 및 평단의 강한 지지와 신뢰를 얻은 작품군이 있다. 오스트리아영화위원회가 주최하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탄생 250주년 기념 페스티벌 ‘뉴 크라운드 호프’(New Crowned Hope)에 소개될 영화들이다. 차이밍량의 <혼자 잠들고 싶지 않아>(I Don’t Want to Sleep Alone/ 대만·프랑스·오스트리아/ 115분/ 경쟁)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상 사타왓>(Syndromes and A Century/ 타이·프랑스/105분/경쟁), 인도네시아 영화계의 거장으로 불리는 가린 누그로호의 신작 <오페라 자바>(Opera Jawa/ 인도네시아/ 120분/ 오리존티)와 마하마트 살레 하룬의 <다라트>(Dry Season/차드· 프랑스·벨기에·오스트리아/ 96분/ 경쟁) 등 네편의 아시아영화가 이에 속한다. 인도네시아의 고전문학 <신타의 유괴>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통극 형태를 취한 <오페라 자바>는 비장미 가득한 아름답고 화려한 레퀴엠이며, 차드의 내전 이후 아버지에 대한 소년의 복수를 그린 <다라트>는 침착하게 휴머니즘에 도달하는 작품이다. 연기 경험이 전무하다는 아역배우 알리 바차 바르카이의 억눌린 표정은 복수의 대상이 폭발시키는 폭력과 대비를 이루며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미국사회에 대한 발언 두드러져
올해 영화제의 특징 중 하나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보하고 주목을 끄는 영화들이 유독 많다는 점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유력 일간지 <코리에레 델 라 세라>는 “9·11 테러가 터진 지 올해로 5년째”라면서 “<플라이트 93>도 있지만 베니스에도 9·11을 소재로 한 영화가 2편이나 왔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각 영화의 정치적 성격은 영화제의 정치적 입장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제의 흥행과 관련있다. (미국에서 이미 개봉한 작품을 무려 비경쟁부문으로 데려온) 올리버 스톤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World Trade Center/ 미국/ 129분/ 비경쟁)는 이 사건을 대하는 미국식 휴머니즘의 관점 때문에 상영 뒤 엄청난 야유가 터져나왔음에도 기자회견장은 미어터졌다. 영화가 바탕으로 삼은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들, 존 맥러플린 부부와 윌리엄 지메노 부부까지 베니스에 날아와 기자회견에 참석한 것이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알 수 없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산티아고 아미고레나 감독의 데뷔작 <9월의 몇일들>(A Few Days In September/ 프랑스·이탈리아/ 110분/ 비경쟁)은 미국 바깥에서 간접적으로 9·11에 대해 발언하는 영화다. 걸프전 이후 10년간 잠적했던 미국 스파이 엘리엇은 ‘엄청난 정보’를 들고 지인들 곁으로 몰래 돌아오고자 한다. 프랑스에 남겨둔 딸, 미국에서 재혼해 얻은 아들, 미국과 프랑스 양국을 위해 일하며 엘리엇과 동업했던 여자 스파이 등 엘리엇과 관련된 세 인물은 2001년 9월5일부터 일주일간 엘리엇이 돌아올 때까지 함께 지낸다. 이야기가 지닌 비유적인 힘과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로운 대사들, 시적으로 아름답게 세공된 화면 등이 돋보이는 뛰어난 데뷔작이다.
배우 출신 에밀리오 에스테베즈의 <바비>(Bobby/ 미국/ 120분/ 경쟁)는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사건이 벌어진 1968년 6월4일 하루의 이야기다. 바비 케네디의 온전한 모습은 뉴스릴로만 보이고, 대신 바비 케네디의 선거운동 파티에 모인 사람들의 사적인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매듭을 이룬다. 바비 케네디의 정직하고 올바른 신념이 인물들의 관계들 속에 바르게 투영되어 도덕적이며, 구성적으로도 흥미로운 데가 있다. 마지막 시퀀스 단 하나를 위해 120분이 존재한 이 영화의 상영이 끝나자 기자들의 박수는 주연배우들의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스파이크 리는 태풍 카트리나에 짓밟힌 뉴올리언스 흑인 서민들의 삶을 장장 4시간짜리 다큐로 찍어냈다(<잎새들이 부서졌을 때. 4막의 레퀴엠>(When The Leeves Broke. A Requiem in Four Acts/ 미국/ 255분/ 오리존티). 저널리즘적 성격에 매우 충실하고 직접적인 이 작품은 상업성이 떨어지는 다큐인 탓에 무기력한 부시 정부를 향해 충분히 흥미로운 발언을 하고 있었음에도 썰렁한 기자회견을 치러야 했다. 반면 <바비>의 포토콜 장소는 린제이 로한을 찍으러 몰려든 사진기자들로 장사진을 이뤄 일명 ‘마카로니 ID(특별한 취재진을 위한 ID)’의 특권을 받지 못한 기자들이 전부 퇴장당하고 말았다. 닉슨 정부에 대항한 투쟁가로서 존 레넌을 그린 위인전 스타일의 다큐멘터리 <미국 vs 존 레넌>(The U.S. vs. John Lennon/ 데이비드 리프·존 셰인펠트/ 미국/ 99분/ 오리존티)까지 포함해,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오직 미국사회에 대한 미국인들의 발언욕구가 넘쳐나는 장이기도 했다.
잦은 상영사고, 미숙한 운영은 문제
섣부른 결론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제63회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영화를 즐기러 온 관객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축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운영 면에서는 지난해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과 달리 지적받을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전세계 수많은 주간지·월간지 기자들을 홀대하는 데일리 프레스 스크리닝의 신설과 이 스케줄에 맞춘 기자회견 일정은 여전히 기자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 상영사고도 잦아서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도중에 1시간가량 상영이 중단됐고, 스파이크 리의 다큐멘터리 역시 기술상의 문제로 극장 안에서 1시간을 기다린 뒤 볼 수 있었다(덕분에 총상영시간은 5시간이 넘은 셈이 됐다). 공식 상영이 열리는 살라 그란데의 스크리닝 일정은 지나치게 여유로운 행사 진행과 배우들의 레드 카펫 도착이 늦어 늘 30분씩 지각 상영을 각오해야만 한다. 국제영화제라는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허술함과 불합리함을 자주 노출하는 터라 현지 기자들은 영화제 폐막 기사 때 꼬집을 대목들을 하나하나 꼽아놓고 있다. 기자들의 소심한 복수심을 달래줄 것은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데이비드 린치, 아오야마 신지와 오토모 가쓰히로의 영화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뿐이다.
스크린쿼터 1인 시위, 베니스에서도 계속된다
시위 중 경찰에 연행됐던 류승완 감독 1시간만에 풀려나
“일단 저쪽으로 가시지요.” 9월1일 오후 4시10분경, 류승완 감독이 이탈리아 경찰들에게 붙들렸다. 영화제 본부 건물 중 하나인 팔라초 델 시네마 앞에서 스크린쿼터 1인 시위 중이던 류승완은 피켓을 든 지 10분도 되지 않아 팔라초 델 시네마 4층의 경찰 사무소로 끌려가게 됐다. 류승완을 연행한 두 경찰은 “집회신고를 내지 않고 시위를 했다”며 연행 사유를 밝혔다. 영화제 기간 중 나흘 동안 있을 스크린쿼터 1인 시위는 당연히 영화제쪽 허가를 받아놓은 행사였다. 감독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사실이 알려지자 <짝패>의 배급사 CJ엔터테인먼트의 김희전 해외영업팀 대리가 달려왔다. 마침 근처에서 일을 마치고 나온 박찬욱 감독도 합류했다. 김희전 대리는 마르코 뮐러 집행위원장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뮐러를 대신해 온 비서의 중재로 류승완 감독은 1시간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이탈리아 경찰은 “레드 카펫이 깔린 곳은 영화제의 관할이지만 그외의 모든 장소는 경찰의 관할”이고 따라서 류승완 감독이 레드 카펫 행사장의 바리케이드 바깥에서 피켓을 든 행위는 범법이라고 설명했다. 1인 시위 허가를 내줄 당시 이 같은 부분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던 영화제쪽은 “대신 <짝패>의 미드나잇 공식 상영 때 집행위원장이 류승완 감독과 함께 레드 카펫 위에서 스크린쿼터 1인 시위 피켓을 함께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상황이 무사히 종료된 뒤 류승완 감독은 “영화제쪽과 이탈리아 경찰 사이에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벌어진 문제라고 생각한다”라며 “처음엔 굉장히 당황했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5월 칸영화제에 이어 베니스에서 있었던 스크린쿼터 1인 시위는 이날부터 9월4일까지 나흘간 계속됐다. 웃지 못할 해프닝에 휘말려야 했던 류승완 감독이 첫 번째 참가자였다. 둘쨋날에는 정두홍, 이범수, 영화사 외유내강의 조영지 기획실장이 함께했으며, 셋쨋날과 넷쨋날에는 양윤모 영화평론가협회장 등이 시위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