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63회 베니스영화제 중간결산 [4]
2006-09-15
글 : 박혜명

100년의 시간을 보여주는 데칼코마니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상 사타왓>

토아 씨는 여의사 테이를 좋아한다. 테이는 시장에서 난을 파는 눔이라는 남자를 사모한다. 치과의사 플레는 이 치료를 받으러 온 젊은 스님에게 묘한 매력을 느낀다. 젊은 스님은 테이의 그런 의사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앓는 사랑의 증후군은 한 시절에서 끝나지 않고 100년이 지난 뒤 똑같은 모습으로 찾아온다. 작은 시골 병원과 가까운 미래의 초현대식 병원을 각각 무대로 삼은 <상 사타왓>은 데칼코마니 같은 형태의 영화다. 소소해 보이는 짝사랑과 일상에서의 조우들, 행복했던 찰나와 상실의 아픔이 한데 공존하는 삶을 영화는 100년의 간격을 두고 똑같이 보여준다. 같은 얼굴의 사람들이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대사를 주고받는다. 이 데자뷰의 경험은 그 자체로 묘한 쾌감을 남길 뿐 아니라 반쪽뿐이던 세계를 완성시키는 역할도 한다. 100년 전의 그때와 정반대의 위치에 놓이는 시선, 달라진 프레임, 달라진 상황. 감독은 언젠가 부모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고 <상 사타왓>은 그런 개인적 소망이 이루어진 결과물이기도 하다. 흙과 풀, 숲이 있는 자연적인 배경에서의 이야기가 어머니의 것이며, 하얀 벽과 시멘트 건물이 있는 도시적인 배경에서의 이야기가 아버지의 것이다. 이 커다란 구조에서뿐 아니라 매 순간 영화는 짝을 맞추고 데자뷰를 부르고 데칼코마니를 이루어간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 중 하나는 서로 마주보는 방향으로 달리기를 하던 두 그룹의 아이들이 똑같이 운동화 끈이 풀어져 묶는 순간이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지나치지만 소년과 소녀는 똑같이 운동화 끈이 풀어졌다. 그리고 같은 자세로 고쳐 맨다. 아핏차퐁은 삶의 사소한 순간들과 사소한 기억들에 애정을 갖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매우 잘 알고 있다.

“많은 이들이 함께 춤추는 것을 통해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 기자회견

-영화가 두 부분으로 나뉘면서 반복되는 구조가 독특하다.
=하나는 엄마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아빠의 이야기이다. 엄마를 생각하며 만든 앞부분은 희생과 순수함에 관한 표현이고 아빠를 생각하며 만든 뒷부분은 복잡함과 냉정함에 대한 표현이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면 입맛이 떨어져서 먹기도 힘들고 잠도 잘 오지 않는다. 그러면서 다른 호르몬을 만들어내는데 나는 그것이 신드롬이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 모두 병원에서 일어난다. 당신에게 병원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인가.
=병원은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어렸을 때 내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고, 나의 부모님이 계셨던 곳이기도 하다. 내 부모님은 의사였고 나는 12년 동안 병원이 가까운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일하는 조그만 동네 병원에서 제공해주는 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서 자랐다. 엄마는 날 병원에 자주 데려가셨다. 엄마의 사무실에 있으면 소아과병동이 보였고 그 방은 내 놀이터였다. 병원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언젠가 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환경을 배경으로 내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영화는 내게 보물과도 같다.

-영화 앞부분에서 전원의 풍경을 오랫동안 담아낸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당신에게 로케이션(배경이란 뜻으로 쓰였음)은 어떤 의미인가.
=내게는 로케이션도 하나의 캐릭터다. 시나리오를 쓸 때 특정한 로케이션을 염두에 두기도 하고, 촬영을 하기 전에 마음에 떠오른 이미지와 가까운 로케이션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내가 생각지 않았던 훨씬 좋은 장소들을 발견할 때도 있다. 그러면 그 로케이션을 영화 속에 담기 위해 시나리오를 고친다.

-영화 후반부에 여자가 남자에게 도시풍경을 담은 사진을 건네는데, 그 사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사진에 등장한 도시의 모습은 내가 살고 있는 방콕의 한 면이다. 방콕은 도시화가 된 곳이고 어떤 면에서는 미래적이기까지 하다. 지금의 방콕 모습에서 미래의 한 모습을 그려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맨 마지막 장면을 보면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 다 같이 (에어로빅에 가까운) 춤을 춘다. 화면 한쪽에서는 다리가 없는 사람이 기구를 이용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은 해피 엔딩인가.
=당연히 해피엔딩이다. 다리없는 사람이 걸어가는 연습을 하는 장면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는 것도 그렇다. 그런 모습들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다 함께 춤을 춘다는 것은 인류 전체가 행복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의 종말을 막기위한 싸움

알폰소 쿠아론의 <인간의 자식들>

아이들이 없으면 희망도 없다. <인간의 자식들>은 남자들의 생식기능 이상으로 종말 위기를 맞은 인류의 미래 보고서다. 무기력한 공무원 테오는 전세계 최연소자였던 18살의 아이의 사망을 계기로 지구상에서 인류 종말을 막고자 하는 임무를 어쩔 수 없이 떠맡는다. 아무 의지도 없던 그는 테러리스트 집단 리더가 되어 있는 아내와 재회했다가 그녀의 죽음을 목격하고서 태도가 바뀐다. 테오는 이제 한 흑인 소녀가 밴 아기를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걸고 뛰어든다. <인간의 자식들>은 2027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택하고 있긴 하지만 SF라고 보기 어렵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20여년 뒤의 미래는 2006년의 현실보다 나아진 문명이 아니다. 인간이 흔적을 남긴 곳마다 폐허로 변했고 세상은 잿빛이다. 정부는 무능력해졌으며 도시는 테러와 범죄로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직면해 있다. 영국 작가 P. D. 제임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인간의 자식들>은 사실적인 프로덕션과 핸드헬드를 동원한 촬영으로 인류의 디스토피아를 다큐멘터리적인 리얼리티를 통해 제시한다.

이 야박한 리얼리티 위에 알폰소 쿠아론이 입히는 것은 특유의 낙관적이고 순수한 판타지다. 아이들이 없어 폐허가 되어버린 학교 안에서 크고 통통한 사슴 한 마리가 불쑥 뛰어나오는가 하면, 내전 중인 도시를 연상케 하는 난민캠프촌 한 구석으로 하얀 양떼가 흙을 뒤집어쓰고 우르르 뛰어간다. 출산이 가까워진 소녀와 테오가 어두운 계단을 오를 때 테오의 손에 쥐어진 등불은 어둔 세상을 밝힐 구원자처럼 따스하게 둘을 감싼다. 감독은 무조건적인 비관이나 냉정한 현실의식 아래 미래를 묻어버리지 않고 낙관론으로 가기 위해 애를 쓴다. 생명의 위대함, 휴머니즘 그리고 인류애. 이런 것들에 대한 믿음에 어떻게든 도달하고자 한다. <인간의 자식들>은 절대적 가치에 대한 신념과 신비한 상상력이 어우러진 근미래의 전설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 기자회견

-이 영화가 미래를 그리는 방식은 매우 정치적이다. 또 매우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전쟁이 등장한다.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어떻게 그런 부분들을 견지해갈 수 있었는가.
=난 이 영화에서 미래에 대한 상상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현재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애초부터 전형적인 SF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전쟁이 나오는 미래영화라고 하자 유니버설의 프로듀서들이 이 영화가 로봇이 나오는 뻔한 SF일 거라고 생각하고 실망했다가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좋아했다. 전투신의 폭력장면들을 우리 모두 걱정하기는 했지만 이 영화에서 폭력은 영화를 이루는 기본 요소가 아니라 인물이 살아남기 위해 사용하는 방어의 수단일 뿐이다.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현재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추가로 묻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는 리얼리티와 SF의 관계는 무엇인가.
=나는 이 영화의 이미지를 전형적인 미래의 이미지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컨셉 아트를 작업한 사람들이 처음 그려낸 이미지들은 발전한 미래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각종 언론에서 보여진 현대사회의 이미지들을 끌어오고자 했고 그들에게 팔레스타인과 보스니아 내전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미래를 다룬 이 영화의 이미지가 현실을 상기시키기를 바랐다.

-이 영화는 저예산으로 보인다.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드는 재주가 능한 것 같다.
=예산이 많이 들었다. 저예산영화처럼 보이고 싶었고, 다큐멘터리의 스타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간단하게 만든 영화 같지만 영화 속에 보이는 하나하나를 일일이 돈을 들여 제작한 것이다.

-사운드트랙이 전형적이지 않고 매우 주의깊게 선택된 것 같다고 느꼈다. 이탈리아 작곡가 바티아토의 음악이 쓰였던데 감독 자신이 직접 고른 것인가? 아니면 음악감독이 고른 것인가.
=나와 티모시 섹스턴, 데이비드 아라타가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 때 음악감독 존 타브너가 바티아토의 음악을 추천했다. 시나리오를 완성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의 음악을 듣고 즉시 결정을 내렸다. 존 타브너가 워낙 자기 역할을 잘해주어서 나는 특별히 관여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오리지널 스코어를 작곡하기보다 대부분 기성곡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타브너가 직접 작곡한 스코어는 극히 드물다.

-당신의 영화는 언제나 아이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 영화는 희망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갇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마음이 희망을 품으면 나는 어떤 것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 누군가가 현재의 희망을 짊어질 것이다. 그 희망을 짊어지고 풀어갈 이들이 바로 미래를 살아갈 지금의 아이들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건다.

취재지원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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