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고독이 피워낸 사랑
차이밍량의 <혼자 잠들고 싶지 않아>
샤오캉은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의 한 골목에서 깡패들에게 당한다. 쓰러져 있던 샤오캉을 데려와 간호하던 라왕은 점점 그에게 마음을 붙인다. 커피숍에서 일하는 아가씨 치이도 샤오캉을 맘에 들어한다. 치이가 일하는 가게의 여주인까지도 샤오캉을 좋아한다. 집없는 샤오캉은 그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않고 라왕과 치이와 가게 여주인의 품을 번갈아 떠돈다. 모두에게 관심을 받고 있지만 샤오캉은 늘 외로워 보이기만 한다. 샤오캉의 외로움이 짙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이강생이 이 영화에서 1인2역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치이를 괴롭히는 가게 여주인에게는 뇌사상태에 빠진 아들이 있는데 이강생은 그 아들 역도 함께 맡고 있다. 때문에 이강생은 두눈을 부릅뜨고 있는 뇌사상태의 환자와 가게 여주인의 자위를 해주는 청년의 모습을 오가게 된다. 제목이 알려주듯, 인물들의 혼자 잠든 모습이 하나같이 쓸쓸한 이 영화는 심지어 대사가 거의 없다. 간혹 화면 주변부에서 소음처럼 말소리가 오가기는 해도 화면 가운데에서는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는다. 인물들은 혼자 자고 싶어하지도 않으면서 속시원히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 차이밍량이 그려내는 고독과 소외의 깊이는 이 영화에서 독하다 싶을 정도로 깊어져 있다. 말소리가 없어진 만큼 다른 소리와 화면의 아름다움은 더욱 눈부시다. 차이밍량이 숙고해 선택한 말레이시아 옛 가요 노랫가락들은 인물들의 정면을 슬프게 침범하고, 콸라룸푸르 푸두 감옥 곁에서 찾아냈다는 짓다 만 폐허는 거기 고인 물 안으로 인물들을 빠뜨려 죽일 것처럼 외롭다. 그러나 여백과 비좁음, 빛과 어둠이 정확하게 자리를 나눈 텅 빈 화면들 속에서 인물들은 결국 서로를 구원한다. 차이밍량은 이번 기회로 자신의 영화인생 처음으로 고향 말레이시아에서 영화를 찍었다고 했다. 그리움에라도 젖었던 탓일까. 말 한마디 못할 정도로 고독이 깊었던 만큼, 이 영화의 결말은 차이밍량의 그 어떤 영화에서보다도 따뜻하고 감동적이다. 그들이 함께 잠들기 때문이다.
“영화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얼굴이다”
차이밍량 감독 기자회견
-당신의 영화에는 왜 항상 물이 등장하나. 그리고 이번 영화는 말레이시아에서 찍었다.
=나는 물을 좋아한다. 내가 베니스를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영화의 배경은 말레이시아이고,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났다. 이 영화의 테마는 내 과거 속의 많은 기억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영화라 더욱 애착이 간다.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대만으로 이민 간 경험이 나에겐 영화를 만들도록 하는 힘이었다.-이 영화에 삽입된 음악들이 정말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어떻게 음악을 선택했나.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관객도 들었으면 했다. 영화에 삽입된 음악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들었던 음악들이다. 음악은 늘 내 삶 속에 있었다. 나는 10대를 말레이시아에서 보냈고 그 당시 내가 들었던 음악들을 지금은 말레이시아에서 더이상 찾기 힘들다. 특히 이강생이 등장할 때 쓴 음악 중에 제목이 ‘헤매다’라는 뜻을 가진 노래가 있다. 그 음악은 이강생의 캐릭터가 지닌 의미와도 비슷하다.-주인공 샤오캉은 가게 여주인과 섹스를 나누는 대신 자위를 해준다. 왜 섹스를 나누지 못하나? 자위 행위의 이유는 무엇인가? 덧붙여서 당신의 영화를 정신적 자위행위(mental masturbation)라고 불러도 되나.
=자위행위에 대해 그렇게 깊은 생각을 해주어서 고맙다. (웃음) 나는 대만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자위행위를 영화에서 다뤘다. 두 번째 영화 <애정만세> 때 대만영화제 위원장이 그러더라. 세계가 모두 자위행위에 대해 말하는구나. (웃음) 손은 중요하다. 손은 어떤 힘을 갖고 있고 결과를 만들어낸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라왕이 샤오캉의 손에 키스를 하는데 이는 말레이시아에서 당신을 용서한다는 뜻을 가진 행동이다.-노먼이라는 새로운 배우가 등장했다(노먼 아툰은 이 영화에서 라왕 역을 맡았다). 마지막 부분에서 샤오캉을 찾아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의 연기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연기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감독으로서 새로운 배우와 작업하면서 그같이 어려운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는가.
=노먼은 이강생 이후 나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준 인물이다. 선택할 때는 영화의 미학적 이유로 외모 때문에 선택하게 됐다. 인도인이나 방글라데시인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 한달쯤 지나면서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됐다. 그의 풍부한 호기심이 나를 자극했다. 나는 그에게 따로 무엇을 가르치지 않고 세트에 데려갔다. 그는 아주 작은 제스처 같은 것을 해보여서 나를 놀라게 했다. 그 때문에 시나리오를 수정하기도 했다.-예전에 상을 받았던 영화들은 웃기는 장면이 꼭 있었다. 이 영화에서는 웃을 수 있는 장면이 없다. 심지어 대사도 거의 없다. 당신에게 변화가 생긴 것인가.
=흥미롭게도 내가 지금까지 만든 9편의 영화가 모두 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되었다. 어떤 관객은 내가 최근에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더욱 깊이가 있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바꾸고 싶은 생각도 있다. 나에게 영화는 얼굴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얼굴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어떤 사람일까?
스티븐 프리어즈의 신작 <더 퀸>
영국 감독 스티븐 프리어즈의 신작 <더 퀸>은 여왕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를 궁금해하며 만든 영화다. 초상화 속의 인물처럼 상징적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인간이기도 엘리자베스 여왕의 면모를 쪼개기 위해 감독은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사망한 직후부터 일주일의 시간을 시간적 배경으로 택했다. 1997년 8월30일,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파리에서 파파라치를 따돌리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가 온 나라를 슬픔에 잠기게 한다. 여왕만 빼고. 여왕은 “다이애나 개인의 일이다”라고 국장을 반대한다. 총리로 임명된 지 3개월이 조금 넘은 블레어는 그런 여왕의 완고함에 여론의 반감이 심해지는 것을 걱정한다. 왕실에 불명예를 가져다주기도 했던 며느리에 대해 시어머니는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석고상처럼 하얗게 굳은 얼굴을 한 헬렌 미렌의 여왕은 표정도, 행동도, 목소리도 가짓수가 많지 않다. 그러나 아늑한 침실, 홍차를 즐기는 거실, 말 잘 듣는 강아지들과 걷는 산책로에서 여왕은 움직이지 않는 벽화 속 정물이 아니라 감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 되고 그런 섬세한 순간들이 먼 발치에서 보여진다. 블레어의 부인은 블레어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그 나이였겠군요.” <더 퀸>은 영국 총리 블레어의 캐릭터로부터 현실 세계에서 구축된 모든 정치적 색깔을 지워냄과 동시에 의회와 왕실의 관계를 부모-자식의 것에 가깝게 해석한다. 그러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해서 여왕에 대해 다 아는 척 경솔하게 굴지도 않는다. <더 퀸>은 대중적인 화법으로 친근함과 즐거움을 유발하지만 대사와 화면의 움직임은 정중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여왕은 절반쯤 미지의 존재로 남는다. 각성효과를 줄 수 있는 장치들을 프리어즈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영화는 우아하고 흐트러짐 없는 대중영화의 모범이다.
“여왕은 우리의 정신적인 풍경이다”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헬렌 미렌 기자회견
-우리 모두 오늘 아침에 영화를 봤다(질문을 시작한 <보스턴 헤럴드> 기자는 이 말을 중의적 의미로 썼다. ‘우리 모두는 오늘 아침에 여왕을 봤다’는 뜻이기도 했다. 헬렌 미렌, 웃음) 헬렌 미렌 당신을 만나게 되어 정말로 기쁘다. 엘리자베스 여왕 2세의 연기를 멋지게 보여준 것을 축하한다. 역할을 위해 실제 여왕과 어떤 친밀한 관계를 가졌는가?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만나봤다든지.
=헬렌 미렌: <더 퀸>은 나에겐 매우 두려운 프로젝트였다. 두려웠고 끊임없이 망설였다. 현존하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그 사람을 잘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도 그 사람 자체를 뛰어넘을 수는 없으니까. 자료를 많이 찾아봤다. 다큐멘터리도 보고 그림도 찾아보고,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자신이 초상화의 한 부분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웃음) 정치적인 면보다는 인간적인 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처럼 일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나 역시 두려운 프로젝트였다.-이런 영화를 만들기로 한 이유는 무엇인가.
=스티븐 프리어즈: 세상은 변하고 이것은 긍정일 수도 있고 부정일 수도 있다. 감독으로서 대조되는 것을 좋아한다. 젊은 공주와 여왕의 대조, 공인과 개인의 대조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작업했다.-영화 속에서 토니 블레어와 엘리자베스 2세가 모자관계인 것처럼 묘사되는데 실제로도 그렇다고 확신하나? 블레어에게 여왕은 엄마 같은 존재인가.
=스티븐 프리어즈: 문자 그대로 엄마라 느끼지는 않겠지만 여왕은 토니 블레어 이전에 9명이나 되는 총리를 대해왔고, 나이로도 블레어의 엄마 또래와 비슷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 엄마와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토니 블레어 총리가 여왕을 엄마처럼 느꼈을까?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블레어를 연기한 배우는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도 같다.
=헬렌 미렌: 여왕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영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말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녀는 우리 영국인들에게는 어느 한순간에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늘 존재하는 사람으로서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녀가 젊었을 때, 그녀가 학생 시절일 때, 그녀가 갓 태어나서 걸음마를 배우던 시절들이 모든 영국인들의 마음속에 이어져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왕은 정말 특별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여왕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결국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왕은 우리의 정신적인 풍경이기도 하다.-여왕이 이 영화를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스티븐 프리어즈: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