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충무로에 부는 한국 만화 열풍 [5]
2006-09-20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스크린을 점령한 만화왕국

<나나> <허니와 클로버> 등 21세기 들어 만화의 영화화에 적극 나선 일본 영화계

일본에서는 매년 10편 이상의 만화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드라마를 합치면, 영상화되는 만화는 수십여편에 이른다. 대중문화의 중심이 만화인 일본에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만화의 영화화는 최근 들어서야 주목을 받는 상황이다. 21세기 전까지 만화의 영화화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지금과는 달리 일본 영화계가 침체기였던 탓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가 더 컸다. 만화를 영화로 만드는 것은, 의외로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특히 만화의 캐릭터가 유명할수록 실사영화로 만드는 것은 더욱 힘들다. 그림으로 그려진 캐릭터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만화 캐릭터를 실제 배우로 대체하는 것은 꽤나 험난한 일이다. <내일의 죠>라든가 <거인의 별> 등 일본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만화가 실사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다. 다카하시 루미코의 <메종일각>은 86년에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만화는 항상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다는 것도 이유다. 인기 만화의 애니메이션화는 확고한 공식이다. <내일의 죠>와 <거인의 별>도 애니메이션을 통해 열광적인 인기를 모았다. 60, 70년대 여성 독자에게 큰 인기를 누린 <어택 넘버원>과 <에이스를 노려라!>는 당시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지만, 드라마는 21세기 들어 하나씩 방영되었다. <에이스를 노려라!>와 <어택 넘버원>의 시청자는 과거 만화의 애독자와는 세대가 달랐고, 이미 세월이 흘렀기에 캐릭터가 새롭게 바뀌어도 별 부담감이 없었다.

만화의 실사 영화화는 21세기 들어서 유행

<데스노트>

과거에 만화의 영화화는, 제작자나 감독이 열광적인 애독자였던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다케나카 나오토가 컬트 만화가인 쓰게 요시하루의 <무능한 사람>을 영화로 만든다든지, 이시이 다카시가 자신이 직접 그렸던 만화를 각색한 <검은 천사>를 만드는 방식이 많았다. 반면 인기 만화를 주류에서 만드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원작료도 비싸고, 캐릭터의 이미지를 실제 배우로 대체하는 것도 어렵고, 긴 내용을 두 시간 남짓의 영화 한편에 압축하기도 힘들다. 일본의 만화가 가장 대중적인 오락이고, 엄청난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음에도 영화화된 작품이 많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다. 쇼치쿠에서 <남자는 괴로워> 같은 서민적인 시리즈물을 만들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낚시광 일기>(1988∼)는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가장 큰 이유는 특수효과의 발달이다. 할리우드가 슈퍼히어로를 스크린으로 끌어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특수효과를 적극 활용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발점은 만화가 아닌 특촬물의 리메이크 <가메라>였다. 1995년 가네코 슈스케가 만든 <가메라>는 괴수영화가 아이들의 유치한 오락을 넘어서 탁월한 재난영화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공포만화의 영화화도 줄을 이었다. 70년대 인기 만화였던 고가 신이치의 <에코에코 아자라쿠>가 90년대 중반부터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흑마술을 쓰는 미소녀가 등장하는 <에코에코 아자라쿠>는 컬트적 인기를 모으면서 5편의 극장판이 만들어졌다. 이토 준지의 만화는 1999년 <소용돌이>를 시작으로 <토미에> 시리즈와 <카카시> 등이 연이어 나왔다.

2002년 마쓰모토 다이요 원작의 <핑퐁>, 2003년 고야마 유우 원작의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이 등장한 이후 만화의 영화는 엄청난 기세로 번져갔다. 눈길을 끈 것은 나가이 고 원작의 <큐티 하니>와 <데빌맨>의 영화화였다. 외면당한 <데빌맨>과 달리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가 감독한 <큐티 하니>는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와 특촬물의 분위기를 마구 뒤섞은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이었다. <철인 28호>도 리얼리티 대신에 과거 만화의 복고적인 느낌을 그대로 재현한 독특한 실사영화였다. 반면 현대적인 이야기로 재구성한 <캐산>은 화려한 이미지 외에는 공허했다.

특수효과 발달로 만화 캐릭터들 스크린으로 비상

만화의 액션을 스크린에 옮기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할리우드와 달리, 일본 영화계는 다른 방식으로 만화에 접근했다. 즉 영웅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 만화들을 차례로 각색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뭔가 패셔너블한 스타일로 멋지게 그려내, 유행을 이끄는 젊은 여성들에게 어필한다. 2005년에 개봉해 40억엔의 수익을 올리며 흥행순위 7위에 오른 <나나>가 그런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나나>는 몇 가지 점에서 과거의 영화들과 달랐다. <나나>에서는 두명의 여성이 일과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진솔하게 그려, 동세대 여성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또한 이미 뛰어난 가수로 인정받았던 나카시마 미카를 기용하여 극중 뮤지션으로 나오는 주인공의 캐릭터를 잘 살려냈다. 자연스럽게 영화음악이 영화 이상으로 인기를 끌었다. <나나>는 원작, 배우, 음악, 패션 등 각각의 요소들이 독자적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 영화였다. 원작자인 야자와 아이도 주가가 올라 <하현의 달>이 영화로 만들어지고, <파라다이스 키스>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파라다이스 키스>는 방영과 함께 극중 인물들의 의상과 장신구가 실제 상품으로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고, 토미 페브러리가 부른 노래도 화제를 모았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 다룬 만화들 각색, 여성 관객 유혹

<나나>의 인기는 이미 예고된 것이기도 했다. 몇년 전부터 드라마에서 만화 원작이 부쩍 늘어났다. 조폭의 딸이 선생이 되어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고쿠센>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의료체계의 모순을 폭로하는 <헬로 블랙잭>, 해양 구조대의 활약을 그린 <해원>, 입시제도의 문제점을 자본주의적으로 타파하는 <드래곤 사쿠라>(<최강입시전설 꼴찌, 동경대 가다!>), 꽃미남들이 대거 등장하는 <꽃보다 남자> 등이 모두 호조였다. 또한 애니메이션에서도 <학원 앨리스> <오란고교 호스트부> 등 여성 취향의 애니메이션이 늘어났다. 한동안 일본영화는 아저씨들이나 보는 고루한 영화라고 여겨져왔지만,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이후 ‘순애’(純愛)가 대중문화의 키워드가 되면서 여성 관객이 일본영화의 주요한 소비자가 되었다. 세련되면서도 감성적인 영화들이 속속 제작되는 것은, 여성 관객을 겨냥한 것이다. 후카사쿠 겐타가 만든 멜로영화 <같은 달을 보고 있다>는 쓰치다 세이키의 만화가 원작이고, 도쿄타워가 세워지던 시절의 추억을 따뜻하게 그린 <올웨이즈 3초메의 석양>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최종병기 그녀>는 메커닉이 나오는 순정만화의 영화화라고 할 수 있다.

순정, 공포,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 만화 영화화 채비

<나나>에 이어 올해 주목받고 있는 만화 원작 영화는 지난 7월22일 개봉한 우미노 치카의 <허니와 클로버>다. 620만부 이상 팔린 <허니와 클로버>는 미대생 남녀 5명의 사랑과 일상을 그린 멜로, 아니 순정영화다. 행복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엇나가는 애절하면서도 상큼한 짝사랑을 그리고 있다. <허니와 클로버>는 지금 애니메이션도 방영 중이고 의류와 가방, 팬시상품은 물론 식음료까지 출시되었다. 또한 사신의 노트를 우연히 얻은 고교생과 천재 탐정의 대결을 그린 <데스 노트>가 2편의 영화로 만들어져 화제를 모았다. 그 밖에 올해 개봉하는 만화 원작의 영화는 순정만화를 각색한 <러브★콘> <사쿠란> <가장 아름다운 물> <웃는 대천사> <스트로베리 숏케이크>, <터치>에 이어 다시 아다치 미쓰루 원작에 도전하는 <러프>, 공포 만화가 우메즈 가즈오 원작의 <신의 오른손 악마의 왼손> 그리고 <하나다 소년사> <청춘 금속배트> <스케반형사> <신동> 등 모든 장르를 망라하고 있다. 또한 발레만화인 <스바루>, 도박만화 <아카기>, 오오토모 가쓰히로가 연출하겠다고 발효한 판타지 <충사>도 제작 준비 중이다.

<허니와 클로버>
<나나>

지금 일본에서는 만화 원작의 영화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동안 침체였던 영화와 달리 오랫동안 전성기를 누려온 만화는 개성적이고 기발하면서도 대중적인 만화들이 대중을 사로잡아왔다. 과거와는 달리 하나의 매체에 집착하지 않는 일본 관객은,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가 영화화되는 것을 누구보다 기다리고 있다. 만화가 다른 장르로 만들어지는 것이 오리지널의 훼손이나 변형이 아니라, 재창조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자유로운 발상이 지금 만화의 영화화를 부추기고 있고, 성공을 거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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