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충무로에 부는 한국 만화 열풍 [3]
2006-09-20
글 : 김도훈
글 : 이영진

인터넷 만화의 최강자

강풀의 만화 4편-<바보> <순정만화> <타이밍> <26년>

왜 만드나?
“강풀 만화는 어떤 작품이든 한줄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 명확함이 상업영화의 원작으로서는 큰 장점이다.”

안병기 감독의 <아파트>가 미지근한 흥행성적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강풀 원작 영화의 제작은 쾌속질주 중이다. 현재 <순정만화>와 <타이밍>은 시나리오 준비 단계에 있으며, 차태현과 하지원이 캐스팅된 <바보>는 최근 촬영을 종료하고 겨울 개봉을 목표로 후반작업에 돌입했다. 네티즌간에 공방을 불러일으키며 인터넷 세상에 불을 지른 광주민중항쟁 정치스릴러 <26년> 역시 연재가 채 종료되기도 전에 제작사 청어람에 판권이 팔린 상태다.

<바보> _ 하얀 도화지같은 ‘바보’가 있었다

<바보>

올 겨울 개봉예정인 <바보>의 동명 원작은 악한 세상을 선하게 살다 간 바보의 이야기다. 승룡(차태현)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지능이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바보’다. 승룡의 협소한 세상 속에는 네명의 소중한 인간이 살아간다. 승룡의 초등학교 동창 지호(하지원), 조폭 친구 상수(박희순)와 술집 종업원 희명(박그리나), 승룡이 자신의 오빠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동생 지인(박하선). 강풀은 다섯 인간의 중첩된 관계를 통해 현대에 도저히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인간의 순수를 절절히 노래한다. 사실 <바보>는 강풀이 만든 가장 직설적인 ‘신파’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와이어투와이어가 영화화를 결정한 것은 <바보>에서 신파 이상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보>는 신파인 동시에 인간관계에 대한 작품이다. 어떤 인간관계에도 개인의 입장이라는 게 있고, 강풀은 같은 상황에서 개개인의 입장을 마이크로적인 시각으로 잡아채 명확하게 정의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는 것이 유재혁 이사의 설명이다. 물론 모든 캐릭터의 입장을 골고루 안배하는 강풀의 원작은 영화화가 용이한 편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김정권 감독(<동감> <화성으로 간 사나이>)과 제작진은 승룡과 지호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순정만화> _ 사랑의 방정식은 뭘까

<순정만화>는 강풀 신드롬이 시작된 강풀의 첫 연재작. 여고생 한수영과 띠동갑 노총각인 회사원 김연수는 출근길 아침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며 연정을 쌓는다. 그리고 또 다른 로맨스가 겹친다. 남고생 강숙은 연상의 여자 하경을 사랑한다. 하지만 과거의 상처를 안은 하경은 쉽게 강숙에게 마음을 내주지 않는다. <순정만화>의 매력은 두 커플이 몇 가지 에피소드를 경계로 아슬아슬하게 비켜가고 겹치는 인연의 방정식에 있다. <순정만화>는 영화화가 가장 먼저 결정된 강풀의 작품이기도 하다. 렛츠필름 박혜진 PD는 “강풀이 가진 정서적인 울림이 가장 잘 녹아 있는 것이 <순정만화>”라고 자신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정서적 울림이란 마치 성선설을 믿어 마지않는 듯한 강풀 만화의 ‘착함’이다. “강풀의 작품에는 동일한 정서들이 있다. 특히 한국 사람에게 편안하게 다가오는 ‘착한’ 정서 말이다.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쩔 수 없는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렛츠필름이 <꽃피는 봄이 오면>의 류장하 감독을 선택한 이유와도 관계가 있다. 류장하 감독 역시 “감독님의 정서와 상통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제작사의 말에 동감하며 영화로 풀어내는 모험에 뛰어들었다.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시나리오는 회사원 김연우를 주인공으로 부각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타이밍> _ 시간을 조정하는 히어로들

‘한국형 슈퍼히어로 만화’인 <타이밍>은 10분 뒤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장세윤,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있는 김영탁, 미래의 불길한 사건들을 꿈으로 보는 박지기, 시간을 되감아 10초 전의 과거로 갈 수 있는 강민혁과 <아파트>에 등장한 저승사자가 학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을 막기 위해 모인다는 내용이다. 다분히 서구적인 슈퍼히어로물을 한국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아이디어와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두뇌를 회전하도록 만드는 다중 구성은 작가 강풀이 단순한 ‘정서’만으로 지금의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멋지게 입증해냈다. 문제는 강풀 만화 중에서도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플롯이다. 공감영화사의 이군선 대표는 “원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인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양날의 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토로한다. 시간을 예지하고 멈추고 되감는 주인공들의 능력을 영화적으로 소화하지 못한다면 영화 <타이밍>은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군선 대표는 “원칙은 하나”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원작에서 가장 재미있어했던 요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만 지킨다면 영화적으로 더하거나 버리는 작업은 충분히 가능해질 것이다.” 내정됐던 <여고괴담>의 박기형 감독은 스케줄 관계로 하차했다. 이제는 장르적인 감수성을 가진 감독이 프로젝트에 올라앉는 일만 남았다.

<26년> _ 다시 쓰는 광주민중항쟁

청어람이 판권을 구입한 <26년>은 대담한 프로젝트다. 2년을 쉬겠다는 선언을 스스로 깨고 나온 강풀이 다음에 연재 중인 <26년>은 전두환을 암살하는(혹은 ‘암살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광주민중항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이 26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다. 사격선수와 경찰, 조각가, 조폭. 그들은 5·18 당시 학살군에 복무했던 기억으로 고통받는 어느 재벌을 중심으로 전두환을 암살할 계획을 차곡차곡 실현해나간다. 광주민중항쟁의 역사를 올바른 세계관에 입각해 규모있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가져온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는 강풀의 <26년>을 보자마자 영화화를 결정했다. 하지만 과연 영화화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청어람의 이진숙 이사는 정치적 논란은 당연히 예상하고 있다고 말한다.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적으로 풀 생각이다. 여러 인물들이 독수리 오형제처럼 팀을 이루게 되는 작품인 만큼 액션 오락적인 장르로, 이를테면 <오션스 일레븐>처럼 접근할 생각이다.” 무거운 주제를 무겁지 않게 흥미로운 장르영화로 풀어낸다, 그것이 청어람의 목표다.

충무로 제작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강풀 만화의 장점은 ‘명확함’이다. 할리우드가 좋은 상업영화 시나리오의 기본으로 꼽는 ‘단 한줄의 문장으로 이야기가 설명될 것’이라는 원칙에 강풀의 만화는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이군선 대표는 그 같은 명확함에 더해진 한국적 현실감각을 강풀의 또 다른 장점이라고 말한다. “명확함 하나만 가지고 매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타이밍>은 현실로부터 붕 떠 있는 소재다. 그런데도 강풀은 그 소재를 현실로 끌어내려 기막히게 바닥에 딱 붙여놓는다.” 인터넷 만화의 전성시대를 연 강풀의 차기작은 아직 어떤 작품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충무로의 제작자들은 강풀의 차기작이 보리차 끓이는 법에 대한 실험 만화라도 지갑을 열어젖힐 것이다.

낮엔 형사, 밤엔 해결사

<더블캐스팅>

왜 만드나?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손에 땀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장르영화들처럼. 복수를 위해 스스로 표적이 된다는 <더블캐스팅>의 설정이라면 가능할 거라 봤다.”

컬트 독자들이 신영우의 만화에 뜨겁게 반응하는 이유는 웃음을 주입하는 방식 때문이다. 신영우는 웃을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 유머를 이식한다. <키드갱>을 보자. 형사의 아이를 유괴한 조폭들은 졸지에 보모 혹은 양부모가 되면서 곤란에 빠진다. 폭력과 유머를 섞는 건 <더블캐스팅>도 못지않다. 빠르게 세를 넓혀가는 신흥 폭력조직 피너츠. 정체를 숨기면서 피너츠를 이끄는 무시무시한 보스는 어릴 때 실수로 잃어버린 쌍둥이 동생을 17년 만에 찾지만, 동생은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형의 눈앞에서 누군가의 총탄에 맞아 허망하게 죽는다. 보스는 동생 장만수로 변장해서 서부지역 특수범죄 전담반에 배속되지만, (생전에 어리버리했던) 동생의 경찰학교 선배 강미나의 샌드백이 되는 등 산전수전을 겪는다.

<수>

그렇다면 <더블캐스팅>을 원작으로 한 최양일 감독의 <수>는 코믹액션? 독특한 유머를 기대한 독자와 관객은 어쩌면 아쉬움을 토로할지도 모르겠다. “낮엔 형사, 밤엔 해결사”로 살아가는 태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수>는 원작에서 웃음기를 걷어낸 정통 복수극이기 때문. 제작사인 트리쯔클럽의 신범수 이사는 “설정 자체로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며 “기획 단계에서부터 정체성을 다루는 하드보일드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는 두 마리 토끼를 쫓지는 않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만화의 장점을 모두 다 살릴 수 없다면, 과감하게 한쪽을 포기하겠다는 것. 실제 <수>는 각색 과정에서 원작의 코믹한 캐릭터와 상황들을 절단했다. 보스의 조력자이자 방해자인 강미나를 배제하는 대신 영화에는 죽은 동생의 여자를 등장시켜 멜로 라인을 추가로 만들었다.

“국내에서 하드보일드를 만들어온 감독은 많지 않다. 처음부터 일본에서 활동해온 최양일 감독을 떠올렸다”는 신 이사는 “연쇄살인을 뒤쫓는 형사들의 리얼한 모습이 드러나 있는”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 “극한으로 내몰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 <10층의 모기>, 그리고 <막스의 산>에서 드러나는 “스타일리시한 연출” 등을 이유로 최양일 감독에게 맨 먼저 <수>를 제안했고 흔쾌히 허락을 받았다. 현재 50% 촬영을 진행 중인 <수>는 “웃음을 버리되 원작의 설정이 한편으로 품고 있는 클래식한 비극성을 최대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제작진은 “기교를 부리기보다 힘으로 밀고 가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귀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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