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충무로에 부는 한국 만화 열풍 [4]
2006-09-20
글 : 김도훈
글 : 최하나

골동품에 깃든 혼령과의 대화

<분녀네 선물가게>

왜 만드나?
“판타지 장르는 한국 관객에게 여전히 낯선 분야다. 하지만 <분녀네 선물가게>에는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판타지영화의 가능성이 있다.”


분녀네 선물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당신은 두 세계의 경계에 발을 딛는다. 분녀가 팔고 있는 골동품에는 하나하나 사연 깊은 혼이 담겨 있으며, 그것들은 당신의 운명을 완벽하게 새로운 방향으로 데려갈 것이다. 2004년 1월부터 서울문화사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연재를 시작한 이후 두터운 팬층을 형성한 이은의 <분녀네 선물가게>는 순정만화와 판타지의 눈으로 바라본 인생 이야기다. 무당의 손녀인 분녀는 자신의 핏줄에 내린 ‘신내림’의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 물리학을 전공하고, 물리학조차도 핏줄의 운명을 막지 못하자 할머니와 계약을 맺는다. 조건은 할머니의 골동품을 모조리 팔아치우는 것. 마지막 물건이 팔리는 순간 신내림의 운명은 사라질 것이다.

연재 초기에 <분녀네 선물가게>는 아키노 마쓰리의 <펫숍 오브 호러스>와 하쓰 아키코의 <세상이 가르쳐준 비밀>과 비슷한 설정을 공유하는 관계로 표절 의혹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분녀네 선물가게>는 한국적인 소재를 통해 자신만의 화법을 풀어낸다. 여우등과 몽달귀신, 청상과부 귀신이 꼭 붙어 있는 죽부인 등 골통품에 스며 살아가는 혼령들은 할머니로부터 언젠가 들어본 듯한 존재들이며, 지금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또 함께 살아간다. 무속신앙과 순정만화와 판타지의 결합. <분녀네 선물가게>의 매력은 어울리지 않는 모든 것들의 조화다. 사실 <분녀네 선물가게>는 영화화가 용이한 작품이 아니다. 단절된 에피소드로 흘러가는 이 만화는 오히려 TV 미니시리즈로 만드는 것이 더 손쉬운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 서핑 도중에 우연히 <분녀네 선물가게>를 발견한 이가영화사의 이희주 대표는 “단편을 장편으로 만드는 어려움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이는 <분녀네 선물가게>의 각 에피소드가 단단한 자기 완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다양한 이야기 중에서도 이가영화사가 선택한 것은 초기 에피소드인 <여우등>이다. 세상과 벽을 쌓고 살아가던 여자가 분녀네 가게에서 여우등을 구입하고, 여우의 장난에 의해 또 다른 인생을 살아본 뒤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분녀네 선물가게>가 지닌 감수성의 집약체에 가까워 보인다. 현재 이가영화사는 <인어공주>의 송혜진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다듬는 작업을 진행중이며, 10월 즈음에 시나리오를 완고한 뒤 본격적인 영화화에 착수할 예정이다.

숫총각에게 붕어빵 딸이 나타났다?

<로맨스 파파>

왜 만드나?
“‘정자 기증’이라는 민감한 소재가 기획적으로 흥미로웠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 이야기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결벽증과 여성 혐오증에 사로잡힌 성형외과 의사 현상범. 수려한 외모에 풍족한 재산으로 화려한 솔로 인생을 구가하던 그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 10대 여자아이 하나가 자신의 딸이라며 불쑥 그의 앞에 나타난 것. 알고 보니 소녀는 의대 재학 시절 그가 정자은행에 기증했던 정자에서 탄생한 아이. 상범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소녀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그들의 낯선 ‘부녀 관계’가 시작된다.

<로맨스 파파>는 순정만화계의 중견작가 이영란의 대표작이다. 그는 황미나, 신일숙, 김혜린 등 판타지나 역사물의 형식에 진중한 이야기를 담아온 선배 작가군과는 달리 일상생활에 뿌리를 둔 이야기를 경쾌하게 구사해온 작가다. ‘정자 기증’이라는, 신문의 사회면에 어울릴 법한 소재를 풀어나가는 <로맨스 파파>의 화법 역시 발랄하다. 아버지와 딸이 벌이는 귀여운 승강이, 삼각관계의 로맨스 등 아기자기한 에피소드가 쫄깃하게 엮여 있고, 자신밖에 모르던 남자가 딸을 통해 변화해가는 과정은 가슴 찡한 감동도 선사한다. “정자 기증으로 만난 두 사람이 과연 가족이 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이 생기면서, 영화화하기 좋은 재료라 판단했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파격적인 소재를 부담없는 방식으로 가공하고, 동시에 대안가족이라는 하나의 화두를 던지는 것. 영화화를 결정한 필름매니아를 사로잡은 <로맨스 파파>의 매력은 그처럼 절묘한 균형감각이었다.

하지만 중학생을 타깃으로 한 만화인 만큼 하이틴 학원물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 하나의 드라마에 집중하지 않고 주인공들의 일상사를 일기장식으로 펼쳐 보인다는 점은 풀어야 할 난제였다. 2002년에 판권을 계약했음에도 아직 시나리오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필름매니아의 이경희 PD는 “원작 만화의 컨셉은 유지하되, 많은 부분을 새롭게 창작했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좀더 집중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10대 소녀의 시선에서 전개된 만화가 소녀들의 눈높이에 맞는 학원물이었다면, 영화는 30대 싱글남의 관점을 채택해 성인에게도 호소할 수 있는 드라마를 빚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로맨스 파파>는 내년 11월 즈음 극장가를 찾아갈 예정이다.

제주도엔 요괴들이 산다

<아일랜드>

왜 만드나?
“제주도를 판타지의 무대로 설정한 이면성(二面性)과 토속설화와 민담을 이용한 한국적 판타지의 매력에 끌렸다.”


어둠이 내리면 제주도는 귀(鬼)의 섬이 된다. 재벌의 외동딸이자 냉정하고 독선적인 성격의 미호는 제주도의 한 고등학교에 선생으로 취직한다. 하지만 제주도는 남국의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온갖 요물들이 미호의 목숨을 노리고, 미호는 요물들을 퇴치하기 위해 ‘반’이라는 음험한 퇴마사와 계약을 맺는다. 양경일과 윤인환 콤비의 <아일랜드>는 일본식 퇴마사 판타지를 한국으로 도입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한국적 판타지’에 대한 한국 만화계의 대답이다. 작가들은 제주도라는 지상낙원의 이미지를 마구 흔들어 민담과 설화에서 기인한 허구의 괴물들이 들끓는 근사한 지옥도로 다시 창조했다. 이가영화사의 이희주 대표가 <아일랜드>에 매력을 느꼈던 이유도 제주도라는 섬에 대한 “원작의 이면성(二面性)”에 있다. “제주도는 지상낙원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제주도는 나머지 한반도와 많이 다른 장소라는 점에서 한국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물론 “외국 판타지물들이 자국의 역사를 이용하듯 제주도의 토속설화나 민담을 절묘하게 이용하는 원작의 재주”를 빼놓을 수는 없다. 환상문학의 토대가 부족한 한국에서 <아일랜드>처럼 안성맞춤의 국산 재료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세계 15개국에 수출되며 90년대 말 한국 만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아일랜드>의 영화화는 열혈 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어왔다. 그러나 많은 팬들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 촬영 소식에 종종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이가영화사가 <아일랜드>의 판권을 구입한 것은 지난 2004년. 판권계약 단계부터 이가영화사와 대원씨아이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영화화를 진행하자는 데 마음을 같이했고, 올해 <괴물>이 성공하자 비로소 한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영화에 대한 투자자와 관객의 욕구가 생겨났음을 예감했다. 판타지 장르에 유난히 냉소적인 한국 영화시장의 변화를 노심초사 기다려온 이희주 대표는 “<괴물>의 성공이 마침내 자신감을 안겨주었다”고 말한다. 현재 이가영화사는 원작의 4∼7권에 해당하는 ‘또 다른 고향’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준비 중이며, 꼼꼼히 진행되고 있는 <아일랜드>는 한국적 호러-판타지 시장의 가능성을 점검하는 척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

외국 원작 만화의 영화화

만화에는 국경이 없다

만화대국 일본의 콘텐츠는 무한하다. 충무로 제작자들은 한국 만화계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일본 만화의 판권을 구입하는 데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대원씨아이와 학산문화사는 2~3년 전부터 일본 만화의 영화화를 타진하는 제작사가 많아졌다고 전한다. 이는 일본 만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가 영화계에 뛰어들고, 또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상업적, 비평적 성공을 거두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흐름으로 추측되고 있다.

올 12월 개봉예정인 <미녀는 괴로워>는 스즈키 유미코의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그러나 판권 구입으로부터 4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각색이 이루어졌다. 원작이 예뻐지고픈 욕망으로 성형수술을 한 주인공의 코믹한 일상을 담고 있는 데 비해 영화는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 성형수술을 감내하는 한나(김아중)의 성공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작사 KM컬쳐의 유은숙 실장은 “이를테면 빅마마가 이효리가 된다는 이야기”라는 말로 영화의 컨셉을 축약한다. “결국 원작에서 가져온 것은 모티브 정도밖에 없다. 해프닝으로 연결되는 원작에 비해 외부 조연들에 의한 코미디 요소도 늘어났고 음악적인 요소도 강해졌다.” <미녀는 괴로워> 외에도 시골 종갓집에 들어간 도쿄 며느리의 이야기를 다룬 오카다 리치의 <울랄라 며느리>, 10살 소년과 17살 소녀의 사랑을 다룬 야마다 난페이의 <어른이 되는 방법>이 신생 영화사들에 의해 판권이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안성기가 출연한 한·중·일 합작영화 <묵공>은 모리 히데키의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10만 대군을 끌고 연나라로 향하는 항엄중과 주인공 혁리의 대결을 다룬 이 작품은 일본인의 눈으로 바라본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새로운 해석이다. 보람영화사의 이주익 대표는 5년 전 원작을 읽자마자 <묵공> 참여를 결정했다고 한다. “영화화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도전하게 만든 계기”라고 회고하는 그는 “일본의 만화시장은 방대하다. 활자시장보다도 더 방대한 아이디어의 보고다. 앞으로도 한국 제작사들이 일본 만화의 판권을 계속해서 구매할 것 같다”고 전망한다.

물론 충무로의 식성이 비단 동아시아 만화계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괴물>의 봉준호 감독은 프랑스 만화가 자크 로부아 장 마르크 로셰트의 <설국열차>를 영화화할 계획이다. 기상이변으로 혹독한 추위가 닥친 지구를 배경으로 한 <설국열차>는 난방과 자급자족이 가능한 설국열차를 통해 인간 본성의 여러 가지 단면들을 들여다보는 작품으로, 상당한 양의 CG가 첨가되는 대자본 영화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크다.

해외 만화들이 충무로로 진출하는 반면에 한국 만화의 해외 영화시장 진출은 여전히 드문 것이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할리우드로 수출된 형민우의 무시무시한 뱀파이어 서부극 <프리스트>는 한국 만화의 십자군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악마 테모자레를 잡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신부 ‘이반 아이작’의 모험을 다룬 <프리스트>는 <아미티빌 호러>의 앤드루 더글러스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되어 내년이나 내후년에 전미 개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