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충무로에 부는 한국 만화 열풍 [1]
2006-09-20
글 : 김도훈

충무로에 한국 만화 열풍이 부는가. 오랫동안 침체일로를 걸어온 한국 만화계가 충무로의 새로운 아이디어 뱅크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몇년간 충무로 제작사들은 치열한 물밑 경쟁을 벌이며 인기 한국 만화의 판권을 구매하는 데 열중해왔고, 2006년은 최초의 결과물들이 속속들이 관객을 찾은 원년으로 기록될 듯 하다. 이미 강풀 원작의 <아파트>와 B급달궁 원작의 <다세포 소녀>가 개봉했고, 허영만 원작의 <타짜>와 강풀의 또 다른 만화를 각색한 <바보>가 올해 안에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현재 충무로에 불고 있는 한국 만화 열풍을 진단하고 향후 몇년간 관객을 찾을 한국 만화 원작영화 프로젝트를 한자리에 모았다. 그에 더해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이 21세기에 들어와 만화의 영화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일본 영화계의 움직임을 전한다. 만화연구가 김낙호의 글은 양질의 한국 만화를 찾아나선 충무로 제작자들과 독자에게 풍요로운 리스트를 선사할 것이다.

대원씨아이 OSMU(원소스 멀티유즈) 사업부의 오태엽 부장은 일주일에 두세통의 전화를 끊임없이 받는다. 영화화하고 싶은 만화가 있는데 판권을 어떻게 살 수 있냐는 충무로 제작사들의 문의다. 실질적인 계약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서너해 전에 비하면 문의 자체가 부쩍 늘어난 편이다. 학산문화사 국제부의 손지연씨 역시 최근 들어 한달 평균 다섯건의 판권 문의 전화를 받는다. 그에 따르면 1년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아진 수치다. 영화 제작자들이 직접 방문해 좋은 소재가 있으면 소개해달라며 요청하는 경우도 꽤 있다. <궁>과 <풀하우스>로 재미를 본 드라마 제작국이 실질적인 계약진행에는 더 적극적이지만, 요즘 들어 충무로가 만화를, 특히 한국 만화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충무로에 바야흐로 만화 열풍이 불고 있다. 인터넷 만화 신드롬을 일으킨 강풀은 다음미디어에 지난 3년간 연재한 작품들을 모조리 팔아치웠고, 열혈팬들을 거느린 인터넷 만화가 강도하의 <로맨스 킬러>와 <위대한 캣츠비>도 판권이 팔려나갔다. 오랫동안 제작 소식이 들려오지 않던 양경일, 윤인환의 <아일랜드>, 이영란의 <로맨스 파파> 같은 작품들도 서서히 본격적인 기지개를 켜고 있으며, 신영우의 <더블캐스팅>은 최양일 감독의 손에 의해 <수>라는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대가 허영만의 대표작인 <각시탈> <타짜> <식객>이 줄줄이 영화화되고 있는 것은 오랜 만화팬들에게는 꽤나 감격적인 소식일 것이다. 강풀이 다음에 연재 중인 <26년>의 판권을 구매한 청어람의 이진숙 이사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작품의 판권을 구입하는 것은 분명히 모험이다. 그러나 만화 콘텐츠를 둘러싼 영화사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한 것도 사실이다”고 말한다.

강풀·강도하는 연재중인 작품까지 판권 팔려

한국 만화를 향한 충무로의 새로운 연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제작자들은 강풀의 인터넷 만화가 한 페이지당 수백만건의 페이지 뷰를 기록하면서 만화라는 매체의 대중성이 재평가받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충무로가 눈독을 들이는 것은 인터넷 만화만은 아니다. 90년대 이후 침체일로를 걸어온 출판 만화시장에도 충무로의 서광은 비치고 있다. “종종 만화가게에 가서 요즘 제일 잘나가는 만화가 뭔지 물어보곤 한다”는 싸이더스FNH의 김미희 대표는 “충무로가 소재 기근에 시달리다 보니 그런 것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충무로 제작자들을 포함한 오랜 만화팬들은 인기리에 장기간 연재되어온 만화들이 충무로에 떠도는 수많은 기획영화의 시나리오들보다도 더욱 질좋은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순정만화>를 제작 중인 렛츠필름의 박혜진 PD는 “만화 매체의 상상력이 영화보다 훨씬 넓어지면서 평소 오리지널로 기획했던 아이템도 이미 만화로 나와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만화 원작을 찾는 데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할 생각”이라는 청어람의 이진숙 이사 역시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것보다는 이미 공인된 양질의 원작을 가지고 가는 편이 더욱 수월하고 생산적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허영만의 <각시탈>을 준비 중인 나비픽쳐스의 조민환 대표는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충무로의 만화 열풍은 조금 더 포괄적인 문화적 변환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영화 자체의 화법이 점점 만화적 감수성으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90년대 중반 왕가위의 <중경삼림>이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는데. 사실 그 영화가 나오기 2, 3년 전부터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의 소설들이 한국에서 먹히기 시작했다. 지금의 현상도 그것과 비슷하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주인공들은 과거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캐릭터이며, 엄밀하게 보자면 만화 캐릭터와 닮아 있다.”

충무로의 힘이 만화적 상상력의 현실화를 불러오다

물론 이 같은 만화 원작의 열풍 이면에는 블록버스터 시대를 맞이하면서 자본력과 기획력을 급격히 키워낸 충무로의 힘이 자리하고 있다. 충무로 제작사들은 만화적 상상력의 현실화를 더이상 불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강풀의 <타이밍>을 준비 중인 공감영화사 이군선 대표의 말처럼 “4~5년 전만 해도 자유롭게 만화를 영화화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영화계 규모가 급성장하면서 현실적으로 만화 콘텐츠의 영화화를 받쳐주는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충무로가 자본력을 키우면서 다양한 장르를 포섭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역시 만화 원작의 영화화를 가능케 만든 원동력 중 하나다. 이가영화사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성공함으로써 비로소 2년간 묵혀두었던 호러판타지만화 <아일랜드>의 본격적인 제작을 진행하게 됐다. 한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장르에 대한 투자자와 관객의 포용력이 넓어지면서 만화의 상상력 또한 스크린에서 기지개를 켤 수 있게 된 셈이다.

<다세포소녀>
<아파트>

충무로의 한국 만화를 향한 러브콜은 만화계에도 새로운 활로를 안겨주고 있다. 대원씨아이가 3년 전에 OSMU 부서를 꾸린 것도 이 같은 충무로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오태엽 부장은 만화계의 새로운 움직임을 “만화의 양날개론”이라는 멋들어진 단어로 설명한다. “만화가 출판시장이라는 한쪽 날개로만 날았다면, 이제는 다른 미디어의 원작시장으로서 또 다른 날개를 다는 거다. 날개가 두개가 되면 홍보도 되고 인지도도 확대될 것이고, 침체일로를 걸어온 만화 산업 역시 활기를 얻게 될 것이다.” 대원씨아이에 따르면 오랜 침체기에도 불구하고 한국 만화의 질과 양이 90년대보다 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 만화는 꾸준히 질적, 양적 성장을 거듭해왔다. 이제는 만화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원작 기지로 확대함으로써 산업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학산문화사 역시 “출판 만화만 가지고 언제까지나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니다”라는 점에서 대원씨아이와 의견을 함께한다. 그래서 만화 출판사들은 충무로 제작자들을 위한 판권 구매 가이드를 갖춤과 동시에 직접적인 콘텐츠 홍보에도 알게 모르게 힘을 쏟아왔다. 2004년에 <아일랜드>의 판권을 사서 오랫동안 제작을 검토했던 이가영화사의 이희주 대표는 “판권 구매가 쉬워서 좋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영화화를 통한 수익의 다각화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제작사의 입장에서 느끼는 만화계의 움직임을 전한다.

‘침체일로’ 만화계와 ‘소재 기근’ 충무로의 윈윈을 향해

사실 모든 것이 장밋빛 전망으로만 포장된 것은 아니다. 한국 만화가 소재 기아에 시달리는 충무로의 새로운 식량창고로 남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가장 큰 문제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상업영화들이 아직까지는 흡족한 대중적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데 있다. 올해 큰 기대를 모았던 안병기의 <아파트>와 이재용의 <다세포 소녀>는 만족스러운 흥행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충무로 일각에는 만화라는 매체의 영화적 변환에 의문을 표하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 한국 만화의 영화화를 진행 중인 제작사들 역시 영화적 변환의 까다로움을 잘 알고 있다. 공감영화사의 이군선 대표는 “만화는 영화와 비슷해 보이지만 굉장히 다르다. 그래서 원작을 흐트리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상업영화로서의 뼈대를 만들 것이냐는 고민을 항상 안고 갈 수밖에 없다”며 고민을 토로한다. 소설이나 실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만화의 대중적 인기도가 영화의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도 위험요소다. 이가영화사 이희주 대표의 말처럼 “원작의 힘이 얼마나 크냐가 아니라 결국엔 영화가 얼마나 재미있느냐가 관객에게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활로를 서로에게 불어넣고 있는 한국 만화계와 충무로의 연정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향후 몇년간 예정된 프로젝트들이 믿을 만한 결과물을 관객에게 제시한다면, 한국 만화와 충무로는 행복한 상생의 길을 오래오래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이전 한국만화 영화화의 간추린 역사

만화를 원작으로 한 최초의 한국영화는 1926년에 반도키네마사가 제작한 <멍텅구리>로 알려져 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된 심산 노수현 화백의 4컷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를 각색한 이 작품은, 부모로부터 재산을 상속받은 한량이 한양 기생 신옥매를 짝사랑해 기생집을 드나들다 재산을 탕진한다는 내용을 담은 희극영화. 인사동의 조선극장에서 상영해 관객의 열광적인 인기를 모았다는 기록이 전해지지만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한국 만화와 충무로의 본격적인 연정이 시작된 것은 대본소 만화가 전성기를 누렸던 지난 80년대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원작으로 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 1986년에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면서 시작된 한국 만화 영화화 열기는, 이후 박봉성 원작의 <신의 아들>(1986), 허영만 원작의 <카멜레온의 시>(1988), 강철수 원작의 <발바리의 추억>(1989) 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들이 졸속으로 제작된 기획영화의 한계를 드러내며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90년대 들어서면서는 허영만의 원작을 영화화한 <비트>가 새로운 관객층을 흡수하며 청춘영화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비천무>(2000)처럼 상당한 자본으로 만들어진 작품마저 관객과 원작 팬들의 욕구를 전혀 만족시키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이는 만화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제대로 스크린에 옮기기에는 충무로의 제작 능력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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