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6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결산 [3]
2006-09-22
글 : 박혜명
사진 : 이혜정
평생공로상 수상자 데이비드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

영화란 무엇인가를 묻는 퍼즐

<인랜드 엠파이어>

올해 베니스가 남긴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는 데이비드 린치의 173분짜리 신작 <인랜드 엠파이어>다. 영화 제목으로 쓰인 ‘인랜드 엠파이어’는 미국 LA 동부지역의 산 베르디날도 카운티와 리버사이드 카운티를 함께 일컫는 지명이다. 인구 400만 규모의 이 상류층 거주지역이 영화 <인랜드 엠파이어>의 공간적 무대다. 유명 여배우 니키(로라 던)는 고대했던 새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된다. 엄청난 기대감에 부푼 그녀는 상대 남자배우(저스틴 테루)와 함께한 첫 촬영 자리에서 감독(제레미 아이언스)에게 “이 영화가 실은 리메이크작”이며 “원작에 출연했던 두 주연배우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꺼림칙하지만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니키와 상대 배우는 영화를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왠지 불길하다.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남자배우는 “여기 누군가 있다”며 세트장 안을 뒤지지만 허탕을 치고 만다.

린치의 여느 작품들처럼 범상한 미스터리물인 척 시치미를 떼고 시작하는 <인랜드 엠파이어>는 곧 논리적인 관람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마론인형의 집 같은 세트 안에서 갈색 토끼탈을 뒤집어쓴 세 사람이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그중 한 토끼가 “지금 몇시지?” 하는 순간 TV쇼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객석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이어지는 장면은 TV를 보면서 철철 울고 있는 여자의 클로즈업. 니키의 이야기는 영화 속 영화 무대와 영화 속 영화 바깥의 무대, 그리고 그 경계 어디에선가 니키의 머릿속을 헤집는 기억의 무대로 갈린다. 철저하게 직관적인 사유의 흐름을 따라 이야기는 고속 질주한다.

반복되는 무대들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인랜드 엠파이어>의 내러티브는 몇 가지 이야기 틀이 겹친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니키, 영화 속 영화의 주인공인 니키, 그 둘 중 어떤 니키의 기억 속에 있는 니키 그리고 무의미한 대화를 주고받는 바보 같은 세 마리의 토끼들을 보고 있는 여자 시청자. 토끼 세 마리의 대화는 별 진전이 없고 그 진전없는 드라마를 보며 매번 우는 여자 시청자의 행위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반면 ‘니키’들은 온갖 사건을 다 겪는다. 불륜, 배신과 복수, 추적과 도망, 관계의 파탄 그리고 살인까지. 그러나 그런 이야기 틀간의 상위-하위 관계 질서는 일정하지 않다. 관계는 수시로 전복되고 위계는 완전히 허물어진다. A가 B를 감싸는 액자틀인 듯하다가도 어느새 보면 B가 A를 감싸고 있고, 최하위 구조처럼 보였던 C는 모든 이야기의 가장 바깥틀임이 드러난다. 린치는 그 어떤 질서 상태에도 머물려 하지 않는다. 벗어나고 또 벗어나면서 미친 듯이 그 질서를 해체한다. DV카메라에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된 저예산 다큐 스타일의 화면은 현실-극-기억의 경계가 무너질 때 더 강렬한 역설의 효과를 낸다. 결국 니키는 사립탐정인 듯 보이는 한 남자를 찾아가 이렇게 하소연한다. “뭐가 순서상 제일 처음인지 모르겠어요. 뭐가 먼저 일어났고 나중에 일어났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드라마를 스릴과 비극으로 이끄는 모든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인랜드 엠파이어>는 그 어떤 드라마도 완결짓지 않는다. 이야기의 틀과 틀 사이를 아무 강박없이 넘나들다가 ‘이 모든 것이 니키가 찍은 영화 속 상황이었다’로 마무리 짓다가 다시 그조차 새로운 악몽으로 연결짓다가, 놀랍게도 최종 시퀀스에서 로라 던과 기타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여 카메라를 정면 응시하고 키스를 날리고, 그렇게 영화 바깥으로 빠져나와 마치 영화 쫑파티의 한 장면인 듯 흥겨운 노래와 춤으로 모든 ‘상황’을 짜릿하게 마무리한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불변의 진리인 양 규칙에 얽매인 할리우드식 내러티브와 그것을 즐기는 관객의 수동적인 태도를 완벽하게 조소한 뒤 영화 관람의 순수한 쾌락(특히 해피엔딩에서 비롯되는 기쁨!)을 모두에게 선사한다. 감독은 우리가 어이없는 토끼들과 어이없는 여자 시청자를 보고 어이없게 웃을 것을 알았고, 우리가 비웃는 여자 시청자의 순진한 관람 행위가 곧 우리의 할리우드영화 소비 방식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을 것도 알았다(이 깨달음은 토끼 세 마리와 여자 시청자를 반복 경험하는 와중에 얻어진다). 그러나 그로 인해 관객이 참담한 심정으로 절망하는 것까지는 원하지 않았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우리가 영화적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의 결정체이자 그것의 안팎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놀라운 ‘생각’이다. 데이비드 린치는 지금껏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유하도록 이끌었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다! 이미지가 아니라 인상이다”

평생공로상 받은 <인랜드 엠파이어>의 데이비드 린치 감독

<인랜드 엠파이어>의 공식 상영 이튿날인 9월7일, 베니스 현지에서 감독과의 라운드테이블 인터뷰가 있었다. 10명 남짓한 각국 기자들은 이 인터뷰 자리가 3시간짜리 ‘심리적 서사판타지극’의 의미를 완벽하게 해독해줄 수 있는 기회라 믿었다. 감독을 물고 늘어졌지만 린치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답해주지 않았다. 논리적 이성의 힘보다 직관적 사유의 독창적인 힘을 믿는 린치는 ‘beautiful’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즐겨 썼다. 아래 인터뷰에서 린치가 한 말 중 ‘멋진’이라는 단어는 모두 ‘beautiful’을 옮긴 것이다. 그는 흔하디 흔한 단어 ‘great’를 딱 한번 썼다.

-듣기로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당신도 제작자로 참여하긴 했지만, 다른 제작자들이 영화 길이를 자르자고 말했다던데.
=(기자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어디서 그런 얘길 들었나?

-모르겠다. 그냥 어제….
=분명히 말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한테 그런 얘길 한 적이 없다.

-이번 영화를 DV로 촬영했다. 필름값이 들지 않는 훨씬 저렴한 수단이다. 당신 같은 경우 평소보다 훨씬 많은 분량을 찍었을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편집할 때는 좀더 고생을 했을 것 같은데.
=아니다. 그저 똑같이 영화를 찍는 프로세스일 뿐이다. 그러나 DV로 영화를 찍는 것은 그야말로 꿈이 실현되는 것과 같다. 40분짜리 테이크를 맘대로 갈 수 있고, 오토포커스에 카메라 무게는 초경량이다. 믿기지 않을 만큼 가장 멋진 자유가 주어진 것과 같았다. 물론 심도에서는 필름카메라에 비해 퀄리티가 좋지 않지만 그래도 정말 멋진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다시는 필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겠지만, 당신 영화는 언제나 의미 전체를 완성시키기 위해 퍼즐 맞추기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영화에서는 토끼탈을 쓰고 논리에 맞지 않는 대화를 나누는 세 사람의 등장이 흥미로웠다. 그 장면의 뜻은 무엇인가? 당신 영화를 관람하는 우리의 태도를 풍자하는 것인가? 당신의 영화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우리 노력이 헛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렇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럼 대체 뭔 뜻인가.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한 말에 내 말을 덧붙이자면, 그건 어떤 공간, 그러니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어떤 자유로운 공간(free space)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감정… (또 한참을 뜸들이다) 그러니까 순수함(innocence)의 감정이 있는 거라고 보면 된다.

-어떤 의미로 그 장면에 대해 순수함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인가. 이유를 설명해달라.
=싫다.

-왜 당신은 그렇게 자꾸 설명을 안 해주려고만 하나? 왜 그러나? 그런 설명이 당신 영화의 미스터리를 망칠까봐서인가.
=맞다. 내가 이전에도 수천번 말했지만….

-(시니컬하게) 오, 그런가? 아주 미안하게 됐다.
=괜찮다. 수천번 말했지만, 영화는 그냥 영화다. 당신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사람한테 그 영화는 이런 거야, 라고 설명하는 일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영화는 그저, 조크다. 어떤 책이 있다 치자. 작가는 100년 전에 죽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책을 읽고 자기 나름대로 직관을 발휘해 그 책이 품은 의미를 알아내고자 한다. 그리고 알아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대답하지 않는데, 혼자 그 뜻이 맞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거다.

-그러면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 영화를 보고 맘대로 해석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상관없다. 모든 사람들은 결국 자기만의 방식대로 이 영화에 접근할 것이다. 그중 어떤 접근은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이해방식과 가까울 것이고 다른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각자를 다 존중한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 방식대로 직관을 발휘해 내 영화의 의미를 해석하고 느끼고 말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 작업 자체가 매우 내적인 감각에 의한 거라 말로 옮기기가 정말 어렵다. 친구한테 꿈을 설명해주는 것과 같다. 친구한테 꿈을 설명해주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 친구는 당신의 꿈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화(cinema)라는 것 안에는 추상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무수한 것들이 존재한다. 대사가 그 의미를 다 전달하는 것 같지만 영화는 그 자체로 매우 아름다운 언어다. 언어로 다듬어낸 시와 같다. 모두가 같은 시를 읽어도 느끼는 건 서로 다르다.

-그래도 당신 영화니까 당신이 정해둔 의미는 있을 것 아닌가.
=의미가 아니라 말이 되도록 느끼는 것이다. 나는 내 영화에 대해 완벽하게 감지하고 있을 뿐(perfect sense)이다.

-(다른 기자) 난 그래도 당신 영화의 퍼즐에 대해 더 묻고 싶다. 왜냐하면 그 퍼즐이 나를 매우 당황시키기 때문이다(that puzzle really puzzles me a lot). 당신 영화 속의 퍼즐들은 결국 하나의 그림으로 완전히 맞춰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지들 사이로 자유롭게 떠다니는….
=(말을 자르며) 아니, 아니, 아니. 아니다. 아니다! 이미지가 아니라 인상(impression)이다. 인상이란 말이다. 당신은 내 영화의 퍼즐들이 어떻게 서로 맞아떨어지는지 알고 나면 지적 만족감을 얻겠지만 그 퍼즐들이 맞아떨어지고 의미화되는 것은 지적 작업이 아니라 인상에 의한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의 영화들을 보고 많은 유사점을 찾아낸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내 영화들을 개별적인 것으로 본다. 그들 사이의 유사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를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그것들 사이에 흐르는 기운이 있을 수는 있지만 내 영화들은 모두 그 자체로 고유한 것이라고 본다. 한집에서 난 자식들이 각자 부모와 비슷한 모양은 띨 수 있어도 각각 개별적 존재인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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