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백제의 황산벌 전투를 배경으로 한 <황산벌>에서 전투다운 전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전부이다. 영화 곳곳에 백제와 신라 병사들간의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나, 이는 축구 서포터스간의 치열한 ‘응원 놀이’처럼 묘사된다. <황산벌>이 역사와 유희하며 교과서적 역사를 해체하는 발칙한 영화라 하더라도, 그것은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기존의 역사가 말하지 않았던 또 다른 진실을 포착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무엇보다 ‘거시기’로 대표되는 언어의 유희를 통해 적절히 드러나는데, 거시기라는 백제군의 사투리(패배자의 언어)는 승리자의 역사 서사(history narrative)의 허구성을 들추는 것뿐만 아니라, 현재의 ‘전라도 폄하증’이 어떠한 기제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알레고리였다. 마치 전라도 사람들의 꿍꿍이속은 알다가도 모를 것이라고 여기는 전라도 폄하증마냥 신라군은 끊임없이 거시기에 어떠한 대단한 의미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거시기는 그저 텅 비어 있는 기표에 불과하다. ‘기의없는 기표’인 거시기와 노닐면서 역사와 맞장을 떴던 <황산벌>의 특징은 이후 이준익 감독(그리고 <황산벌> 이후 줄곧 이준익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최석환 작가)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달리 말해 그가 역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삐딱하게 봄으로써 또 다른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던 밑바탕에는 ‘놀이의 힘’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영화를 이해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놀이의 힘
이준익 감독은 놀이를 통해 어떠한 진실이 표출되는 영화적 순간을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황산벌>에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영화 전체 맥락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놀이의 특징뿐 아니라, 김유신(정진영)이 백제군의 거시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이 깨닫는 순간 역시 계백(박중훈)과 ‘장기 놀이’를 통해서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전략은 <왕의 남자>에서 좀더 정밀하게 표현되는데, 폭군 연산(정진영)이 내면의 트라우마를 드러내며 관객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나,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이 눈먼 봉사의 삶에서 깨어나 진실을 응시하는 순간 역시도 놀이의 형식을 통해 드러난다. 이준익 감독에게 다양한 놀이의 형식은 유희의 도구이면서 진실을 전달하는 우편배달부인 셈이다.
‘놀이의 힘’에 대한 이준익 감독의 믿음은 <라디오 스타>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라디오 스타>는 한물간 스타 최건(박중훈), 그리고 그와 20년을 함께한 매니저 박민수(안성기)를 축으로, 무너진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스타의식에 젖어 있는 최건이 폐국 직전의 영월 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을 맡으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휴먼드라마의 형식 속에 담아낸다. 농촌의 전근대적 삶을 향수 정서나 순수함으로 포장함으로써 도시에서 좌절했던 인물이 다시 삶의 활력을 되찾는 이야기는 그리 새롭지 않다. 하지만 <라디오 스타>는 그러한 일련의 농촌영화와 확연히 구별되는 특별한 에너지로 충전되어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 ‘대중문화-놀이’라는 중심 소재에서 기인한다. 쌍팔년도에 가수왕까지 먹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프로그램에 무성의한 진행으로 일관하던 최건이 영월의 삶에 동화되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대중문화의 무한한 잠재력인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 <라디오 스타>에서 대중음악이 한 시절 유행하고 마는 휘발성 강한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그 속에 대중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중첩됨으로써 어떻게 상품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지를 적절히 보여준다. 추억이 포개진 음악이 단지 귀에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잊혀졌던 기억을 가슴에서 되살리며 현재와 공명시키는 것처럼, 최건은 자신이 라디오 DJ로서 들려주는 여러 음악(그의 대표곡인 <비와 당신>까지 포함해서)에 포개져 있는 대중의 사연이 지니는 정서적 힘을 경험한다. 이준익 감독은 그것이 바로 광대의 삶이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광대의 놀이 속에는 그것을 보고, 듣고, 웃고, 울고, 즐겼던 이들의 사연이 포개지게 마련이고, 그것이야말로 광대의 놀이가 언제나 열려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자 놀이의 궁극적인 힘이라는 것. 이러한 면에서 최건은 한물간 대중가수가 진정한 광대의 삶에 눈을 뜨는 또 다른 장생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라디오 스타>에서 인물들이 털어놓는 사연의 대부분을 ‘라디오 방송-놀이’를 통해 전달되도록 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중 압권은 모두가 외면해버린 20년 시간에도 끝까지 최건 곁에 머물며 그를 빛나게 해준 매니저 박민수에게 보내는 최건의 사연이다. 방송이라는 공적 소통 행위가 어떻게 놀이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영화 속 최건이 진행하는 <최건의 오후의 희망곡>을 직접 들어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마치 <황산벌>에서 교과서적 바른 어투의 공적 역사(public history)를 전복하는 힘이었던 카니발적 언어로서의 사투리처럼, <최건의 오후의 희망곡>은 공적 언어로 가공되고 포장된 방송을 냉소하면서, 진실을 소통시키고 대중의 정서를 울리는 일상어의 힘을 공적 방송에 되돌려주는 것이다. <라디오 스타>는 ‘소리의 힘’만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라디오 방송의 매혹, 바로 그것이다.
지배자의 놀이와 주변부의 놀이
<황산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김유신과 계백이 장기를 두며 신경전을 벌이는 대목이다. 그들이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놀고 있는 사이에, 무명의 병사들은 장기판의 말이 되어 죽어가야만 한다. 그것이 이준익 감독이 바라보는 놀이의 양가성인데, 그는 놀이를 민중의 것과 지배자의 것으로 곧잘 나누곤 한다. 민중의 손에서 놀이가 신명나는 한판으로 이어진다면, 이를 지배자가 자신의 것으로 전유할 때 파국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황산벌>에서는 다소 희미했던 이러한 놀이의 양가성이 <왕의 남자>에서 좀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광대들의 놀이와 그것을 흉내내는 연산(정진영)과 대신들의 놀이. 광대들의 놀이가 누군가의 죽음을 불러오기 시작하는 순간은 지배자가 그것을 정치적 수단으로 전유할 때이다. 이준익 감독이 놀이에 대해 한없는 애정을 보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지배자의 손에서 놀아날 때에는 그 반대인 셈이다.
<황산벌>에서 한 장수가 너무 더운 날씨를 불평하자, 이름없는 병사 거시기(이문식)는 “그래야 나락이 잘 익죠”라고 뜬금없이 대꾸한다. 이러한 지배계급과 민중 사이의 입장 차이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죽음을 자초하는 화랑과 그 아비를, 개별적 이름은 끝내 알려지지 않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거시기‘들’과 대조하는 것으로까지 확장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거시기 병사를 노랗게 익은 고향의 품으로 살아 돌아가게 함으로써 역사의 힘은 공명심에 빠져 있는 지배자(승리자)에게서가 아니라 그러한 역사로부터 주변화되었던 민중의 삶에서 비롯된 것임을 역설한다. <황산벌>과 <왕의 남자>가 권위와 권력에 가려져 있던 주변부의 민중을 역사(그리고 놀이)의 주체로서 되살려내는 작품이라면, <라디오 스타>는 화려한 비주얼을 앞세운 영상문화 앞에서 시대의 뒤안길로 밀려난 라디오처럼, 시간의 절대적 힘에 의해 문화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세대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한 작품이다. 특히 이를 전달하는 인물이 박중훈과 안성기라는 점은 영화 속 인물과 실제 배우가 공명하며 발생하는 또 다른 정서적 힘을 발휘하기에 충분하다.
이는 <라디오 스타>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인 최건보다 그의 매니저인 박민수의 정서적 울림이 더 강한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속 대사처럼 “별은 주변의 빛을 반사함으로써 빛날 수 있다”면, 이 영화는 박민수와 같은 조력자를 위한 응원가이자, 대중문화의 지형도에서 주류의 위치에서 밀려난 라디오 세대를 위한 위로곡이다. 아니 더 확장하자면 이는 쌍팔년도(이는 최건이 가수왕을 먹었던 해이다)를 한국사회의 정점으로 ‘소리없이’ 이끌며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유례없는 경제적 풍요를 선물했지만, 지금은 한없이 뒤로 밀려나 있는 ‘낡은 세대’에 대한 헌정 앨범이기도 하다. 비록 그것이 과거에서 현재로 시간적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라디오 스타>에서 이준익 감독은 여전히 ‘라디오 방송’이라는 아날로그 시대의 낡은 문화적 놀이를 통해 주변부에 대한 애정만세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놀이의 특징이야말로 그가 대중영화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일지도 모른다. 이준익 감독의 작품 속에는 예술가적 자의식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데, 이는 그가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탐내기보다는 대중의 광대로 머물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그의 영화에서 자주 반복되는 단점인 투박하고 거친 연출 스타일에 대한 변명이 되어서는 곤란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그의 능력은 작품의 미적 완성도에서 떨어져 있는 만큼 대중의 품에 가까이 서 있다는 점이다(이는 아직 이준익이 감독보다는 제작자에 가까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현재 한국의 주류 감독들이 서사를 파편화(혹은 서사의 빈곤화)하며 스타일을 과잉시키는 경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준익 감독에게 내러티브의 흐름을 가장 이상적으로 실어나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미학’이 구현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실제로 보이지 않는 미학을 구현했던 고전적 할리우드 시기의 감독들은 대중적 화법 속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낸 감독들이니, 그것이 예술가보다는 광대를 꿈꾸는 이준익 감독에게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