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최동훈의 <타짜> [1]
2006-10-02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타짜>가 드디어 패를 열어 보였다. 허영만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타짜>는 <범죄의 재구성>으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른 최동훈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조승우, 김혜수, 백윤식, 유해진, 김윤석 등 쟁쟁한 배우들이 함께 출연한다는 점에서 촬영 시작부터 화제를 모았다. 9월18일 서울 CGV용산에서 첫선을 보인 <타짜>는 로케이션 촬영이 많은 탓에 제작 기간이 다소 늦어졌고 결국 시사회 전날까지 믹싱 작업을 해야 했다. 서둘렀다고 허술한 만듦새의 영화일 것이라고 넘겨짚진 말 것. <범죄의 재구성>에 이어 또다시 범죄영화를 빌려와 인간들의 욕망 놀이를 들여다보는 최동훈 감독의 장기는 이번에도 여전히 흥미롭다. 능글맞고 노련한 배우들의 연기에 힘입어 캐릭터들이 빛나는 영화라는 게 시사회 직후의 중평. 데뷔작부터 함께 손발을 맞춰온 스탭들과의 협업이 볼 만한 비주얼을 만들어낸 것도 분명하다. 9월28일 개봉에 앞서 “장르영화를 즐길 줄 아는 감독”이라며 평소 최동훈 감독에 관심을 가져왔던 김봉석 영화평론가의 <타짜> 미리 보기, 후반작업에 매달리느라 몇 차례 인터뷰 제의를 거절해왔던 최동훈 감독과의 인터뷰, 그리고 최동훈 감독이 뒤늦게 털어놓는 ‘연기 타짜’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함께 싣는다.

도박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천국이나 지옥이 아니다. 얼마 전 ‘바다이야기’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주택가에 침입한 성인오락실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평범한 샐러리맨, 조신한 현모양처가 가벼운 ‘오락’을 즐기다가 인생을 송두리째 차압당하는 건 우리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일수록 도박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결국은 지옥을 맛보게 된다. 죽거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결코 헤어날 수 없다. 왜? <타짜>에서 말하듯, 도박은 희망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만 들어오면, 한끗만 높으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그만두지 못한다. 게임의 즐거움, 승리의 쾌감에서 출발한 도박은 결국 희망이라는 신기루를 좇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결코 예외는 없다.

하지만 ‘타짜’라고 불리는 전문 도박꾼들의 이야기는 또 다르다. <타짜>의 기술자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손모가지가 잘리기 전까지, 결코 도박을 그만두지 못할 거라고. 스스로 손목을 자르고 도박을 그만두는 놈은 보지 못했다고. 타짜들, 프로 도박꾼들은 승부의 쾌감에 중독된 인간들이다. 페어플레이가 아니라 온갖 기술을 사용하여 아슬아슬한 승리를 쟁취하는 순간의 짜릿함에 중독된, 인간들. <타짜>에는 다양한 타짜들이 등장한다. 수많은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고도 ‘단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는’ 악녀 정 마담, 기술 쓰는 타짜들을 잡아 손을 뭉개버리며 즐거워하는 사디스트 아귀, 남들 대기업 다니는 정도의 돈만 벌 수 있으면 만족한다는 소시민 타짜 고광렬 등등. 그들은 희망이 아니라, 욕망 때문에 도박을 그만두지 못한다. 마약보다도 짜릿한 승부의 쾌감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다. 손이 잘려도,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도.

능숙한 이야기꾼 최동훈

스타일리시한 범죄영화 <범죄의 재구성>으로 데뷔했던 최동훈은 <타짜>에서 프로 도박꾼들 이야기에 도전한다. 사기꾼들끼리 속고 속이는 복마전을 보여주었던 전작과는 다른 소재이지만, 테마는 동일하다. 허영만의 만화를 각색한 <타짜>는 보통 사람들이 도박에 빠져들어 아귀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고니가 어떻게 도박에 빠져들고 프로 도박꾼이 되었는지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건 서론일 뿐이다. <타짜>에서 중요한 것은, 최동훈의 말처럼 ‘욕망’이다. 훔쳐온 누나의 돈을 5배로 불리면 그만두겠다며 타짜가 되었지만, 그곳에서 멈출 수는 없다. 손가락을 자르려고도 해보았지만, 인생은 예술이라는데 한번쯤 폼나게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 욕망이 정 마담을 만나게 하고, 아귀를 만나게 한다.

최동훈은 능숙한 이야기꾼이다. 수많은 조연이 등장하고, 각각의 도박장마다 이색적인 일화가 존재하는 <타짜>를 2시간19분 동안 흥미롭게 끌어간다. 원작의 힘이기도 하지만, 다수의 캐릭터와 이야기를 교묘하게 짜놓았기 때문이다. <타짜>는 일단 캐릭터의 풍성함만으로도 보는 재미가 있다. 평경장, 아귀와 함께 3대 타짜로 꼽혔지만 아귀에게 귀와 손을 잘리고 몰락한 짝귀, 라이벌은 모조리 제거해버리는 잔혹한 건달 보스 곽철용, 정 마담의 주변에서 소리없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 해결사 겸 비서 빨찌산, 지금까지 본 어떤 악역 이상으로 카리스마가 넘치는 아귀 등 조연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영화 하나는 거뜬히 만들어질 정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연 캐릭터들이 아주 세다. 조승우가 연기하는 고니는 곱상한 얼굴과 달리 담대하면서도 능글맞은 캐릭터다. 최고수 평경장에게 기술을 배우면서도 꿀리지 않고, 잔인한 아귀와 맞서서도 기죽지 않는 강한 캐릭터. 고니가 어떻게 도박사로 살아가는지는, 조승우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원작과 가장 많이 다른 인물인 정 마담은, 전형적인 팜므파탈이다. 남자들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빼앗는 여인. 사랑하면서도, 자신에게 불리하다면 얼마든지 남자를 버릴 수 있는 여자. 하지만 더 사악했다면 좋지 않을까. 사랑하는 고니에게도 일관되게 사악하고, 과거의 원한 때문에 복수를 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재의 욕망만을 위하여 평경장과 아귀까지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면, 최고의 팜므파탈도 가능했을 것이다. 유해진이 연기한 고광렬도 흥미롭다. 어떻게 보면, 고광렬이야말로 가장 건실한 타짜가 아닐까? 큰 욕망없이, 그냥 자신이 할 수 있는 정도에만 만족하는 프로 도박꾼. 하지만 도박에서 득도를 한 평경장이나, 현실에 만족하고 물 흐르듯 살아가는 고광렬 역시 종착점은 동일하다. 그들 역시 손목이 잘리거나,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 타자들의 세계는, 보스의 힘이 약해지면 바로 밀려나는 야수의 세계와도 같다.

매력 넘치는 풍성한 캐릭터들

허영만의 원작은 원래 4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짜>는 그중에서 1부인 <지리산 작두>를 각색했다. 고니는 자신을 속인 타짜를 찾아 전국의 도박장을 떠돌다가, 우연히 평경장을 만나 도박 기술을 배우고, 연인이 된 정 마담과 함께 돈을 긁어모으다가 평경장의 죽음을 알고는 복수에 나선다. 그런데 <타짜>는 하나의 이야기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고니가 도박에 빠져들어 프로 도박사가 되는 성장과정도 보여주고, 그 와중에 만나는 도박중독자들의 씁쓸한 모습들도 보여주고, 도박사라기보다 사기꾼들이 호구의 재산을 낚아채기 위해 벌이는 정교한 ‘공사’도 보여주고, 고니가 평경장의 복수를 위해 벌이는 모험들도 보여준다. 거기에 고니와 화란의 사랑 이야기도 더해진다. 욕망, 승부, 복수, 사랑 등등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타짜>에는 다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것도 좋다. 허영만의 만화에는 언제나 ‘세태’가 그려져 있었다. <오! 한강>은 물론 <고독한 기타맨>이나 <카멜레온의 시> 등 80년대 후반의 걸작만이 아니라 <무당거미>와 <각시탈> 등 초기작에서도 허영만의 만화는 격동하는 역사와 그 안에서 꿈틀대는 개인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타짜>도 원작의 50, 60년대에서 90년대로 시대배경이 바뀌었지만 마찬가지다.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고니는 더이상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세상은 요지경이고, 타짜들은 그 풍진 세월 속에서 자신들의 욕망만을 위해 달리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타짜>가 오로지 도박 세계의 복마전을 보여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도 충분히 흥미롭다.

다만 <타짜>의 구성이 전반적으로 느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타짜>의 주인공은 고니이고, 고니가 도박을 배우고 복수하는 과정이 중심이다. 하지만 중심 줄거리는, 충실하고 흥미로운 주변 이야기들에 묻혀버린다. 평경장을 죽인 범인에게 복수하는 과정은, 화란과 곽철용, 그리고 고니가 가족과 절연하게 만든 동기를 준 타짜 박무석과의 얽히고설킨 관계보다 덜 흥미롭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모두 재미있는데, 관객의 시선을 하나로 집중시킬 장치가 부족하다. <범죄의 재구성>은 수수께끼와 트릭이 계속 중첩되면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다음 장면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타짜>는 각각의 장면들이 아주 재미있고, 정교하게 구성이 되어 있다. 도박장 풍경이나 습관 등 사소한 것들까지도 제대로 재현되어 있다. 톡 쏘는 농담과 기발한 상황들도 관심을 끈다. 하지만 그것들은 거의 연대기 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대부분 새로운 상황이 시작된다. 캐릭터에 빠져들지 않으면, <타짜>는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영화다.

<타짜>는 반사회적 인물들의 역사다

하지만 그것이 <타짜>가 실패를 했다는 말은 아니다. <타짜>는 <범죄의 재구성>과 동일한 테마를 다루면서도, 다른 방향으로 간다. <범죄의 재구성>은 일종의 퍼즐이다. 복수라는 명확한 동기가 있고, 복수를 위해서 한 걸음씩 전진하면서 얻은 단서를 마지막에 모두 끼워 맞추는 형식이다. <타짜>는 역사다. 최동훈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반사회적인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꿰어내는 역사다. 나는 <범죄의 재구성>을 보면서, 그들의 전사를 알고 싶었다. 그들이 어떤 사기를 치고, 누구를 배신하고, 얼마나 야비하고 치사하게 살아왔는지를 알고 싶었다. <타짜>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고니라는 인물이 단지 도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아수라장 속에서 어떻게 성장하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유장한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마틴 스코시즈의 <카지노>나 <좋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70년대 범죄영화 스타일로 풀었다고나 할까. 남성적이고 거칠면서, 불가해한 에너지가 들끓고 있는 영화로.

그러면서도 <타짜>에는 미묘하게 홍콩 카지노 무비의 흔적도 들어가 있다. <타짜>는 다큐멘터리 스타일이 아니라, 머리 좋고 싸움도 잘하는 영웅의 모험담으로 끌어간다. <타짜>에서 모든 이야기는 고니에서 출발하고, 고니로 마무리된다. 모든 뒤틀린 상황의 해결사는 고니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서 가능한 것은, 거물이었던 짝귀가 아귀에게 치도곤을 당한 뒤 몰락하는 것이고, 평경장이 아귀를 피해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고니는 곽철용을 몰락시키고, 정 마담과 아귀의 손길에서도 벗어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결한다. 그런 점에서 <타짜>의 마무리는 <스팅>이나 홍콩 카지노 무비에 더욱 근접해 있다. 결국은 해피엔드이고, 심지어 속편까지도 예감할 수 있는 엔딩은 어딘가 낯설어 보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단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카지노>는 라스베이거스라는 이름을 가진 한 도시의 역사를 말하지만, <타짜>는 뒤틀린 도박의 세계를 가상의 현실로서 보여준다. 세태를 보여주지만, 그것이 ‘평범한’ 세계의 역사는 아니다. <타짜>가 보여주는 것은, 고니라는 인물의 그럴듯한 역사다. 한 인물의 영웅담이고, 구전되는 전설 같은 것이다. 평경장, 짝귀, 아귀라는 3대 거물의 뒤를 잇는, 위대한 영웅 고니. 홍콩이라면 아마 ‘도신’이라고 불렸을 만한 인물의 연대기. <타짜>는 최동훈이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탁월하게 스크린 위에 펼쳐놓은 영화다. 의도와 나르시시즘이 너무 앞서는 요즘 한국영화들 틈에서, 이렇게 성실하고 자신의 쾌락에도 충실한 영화를 보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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