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인의 사내가 질주하오, 길은 황야가 적당하오
<달콤한 인생>을 완성한 김지운 감독은 프랑스 칸을 시작으로 영화제를 순례하며 여섯 대륙을 주유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또 다른 여행의 아퀴를 짓는 중이다. 호러(<장화, 홍련> <메모리즈>), 코미디(<조용한 가족> <반칙왕>), 누아르(<달콤한 인생>), SF(<천상의 피조물>) 역을 거친 장르 역정의 종착지를 만주 웨스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가제)으로 작정한 것이다. 옴니버스 <인류멸망 보고서>의 에피소드인 <천상의 피조물>은 편집을 끝낸 상태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시나리오는 80신 언저리까지 펜을 달렸다. <좋은 놈…>은 김지운 감독의 영화사 그림의 첫 작품이며 바른손 엔터테인먼트가 투자한다.
김지운 감독의 혈관에 광야의 바람이 든 것은 오래된 일이다. 여러 해 전 배낭여행 길에 스페인 그라나다를 기차로 지나던 그는 가장자리도 보이지 않는 광대한 벌판에 홀려 인적없는 간이역에 내렸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바람이 보였다. 무릎까지 술렁이는 억새풀을 이리저리 가르며 바람은 길을 내는 동시에 지웠다. “툭 터진 땅은 바다와 달라요. 수평선은 관조할 뿐이지만 광야는 걸을 수 있어요. 혼자 그 벌판에 머무른 세 시간 동안 정신적 오르가슴 같은 것을 느꼈어요.” 그러고 보니 <달콤한 인생>의 이병헌은 <황야의 무법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비슷한 수난을 겪었다. 제대로 사랑도 못할 여자 때문에 일을 어그러뜨리고 박해받고 일당백의 사투를 벌였다. <반칙왕>의 임대호가, <달콤한 인생>의 선우가 양다리를 굳게 딛고 전의를 다졌을 때 휑하니 불어온 바람은 웨스턴의 휘파람이었다.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안장이 불타오르도록 달릴 황야는 일제강점기 만주와 연해주다. <조용한 가족>의 산장, <반칙왕>의 체육관, <장화, 홍련>의 이층집, <달콤한 인생>의 스카이라운지. 김지운 영화에는 언제나 현실 맥락에서 튕겨져나온 공간이 있었다. <좋은 놈…>에서 그 어디에도 없는 장소는 아예 대륙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제목의 ‘놈’이라는 정겨운 하대가 암시하듯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쫓겨난 약자들이다. 커피 테이블에 비를 등지고 앉은 김지운 감독은 (카페인 중독자로서는 매우 느린 말투로) 그들이 역사의 광포한 힘에 의해 고향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사람들이고, 자조할지언정 질기게 살아갈 방도를 찾는 남자들이라고 소개했다. 추적이는 빗줄기 너머로 말발굽들이 먼지를 피워 올렸다.
-지난해 9월 미국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IWP)에 <남극일기> 임필성 감독과 한달 남짓 다녀온 걸로 안다. 아무 강제가 없는 프로그램이라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 아니었나.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에 집 한채만 덩그러니 있는 풍경의 고장이었다. 동네 한복판에 학생들이 몰려나오는데 전부 금발이었다. 하루는 로데오 구경을 갔더니 거기 모인 약 만명의 백인이 나랑 임필성 감독을 일제히 외계인 보듯 쳐다보더라. 숙소 전등은 창백하고 밤이면 오래된 가전제품이 왜애엥, 우우웅 소리내며 돌아갔다. 새벽에 방문 열고 나가보면 길쭉한 빗자루를 든 청원이 긴 복도 저 끝에서 날 가만히 보고 서 있곤 했다. 데이비드 린치가 그린 공포와 악몽을 고스란히 체험했다. 아니나 다를까, DVD숍에서 어느 재킷 사진이 동네 풍경과 똑같아 영화 제목을 보니 <아메리칸 고딕>이더라. (웃음) 세계 곳곳을 많이 돌아다녔지만 미국이 제일 기괴한 나라다.
-다채로운 악몽의 일인자다. <장화, 홍련> 때는 “콩쥐팥쥐인지, 장화홍련인지 맞혀보라”고 쫓아오는 소녀들이 꿈에 나왔고 <달콤한 인생> 무렵엔 <주먹이 운다>를 같은 날 개봉한 류승완 감독이 다리를 물어뜯는 꿈을 꿨다고 말했다. 전부 사실인지 몰라도….
=전부 사실이다. 장편 준비부터 개봉까지 특히 꿈이 많다. 생각이 많으면 꿈도 많은 거다. 새 장편 시나리오를 쓰는 요즘도 이상한 꿈을 자주 꾼다.
-담배 디자인을 했다는 소식도 들리더라.
=KT&G의 ‘시즌’ 담뱃갑 디자인을 의뢰받았다. <달콤한 인생>의 콘티가 들어간 누아르 버전, 꽃문양의 <장화, 홍련> 버전, 사계(四季) 주제의 퀼트 스타일 세 종류다. 오는 부산영화제에 맞춰 제품이 나온다고 한다.
-전작들을 DVD로 다시 봤는데 <달콤한 인생>과 <장화, 홍련>은 DVD 서플먼트를 비평에 대한 반박의 장으로 활용하려는 의욕이 두드러지더라.
=그게 목적은 아니었다. 다양한 부가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일념 아래 이런저런 코너를 만들다보니 들어간 내용이다. 감독에겐 DVD가 제2의 개봉이란 의미도 있고 영화에서 못다 한 말을 넣는 장도 된다. 수긍가는 비평을 따로 언급하지 않았을 뿐 비평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스토리텔링과 문학적 기준으로 영화를 규정하는 비평이 답답했다. 실험영화, 전위영화의 경우 내러티브가 없어도 말하려는 주제는 다 있지 않나. 영화에서 주제가 꼭 스토리로만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절에서 일하는 로봇이 등장하는 단편 <천상의 피조물>
-새 영화가 두편이다. 일단 SF 단편 옴니버스 <인류멸망보고서>(제작 루씨필름) 중 <천상의 피조물>이 2007년 초 먼저 개봉한다(한재림 감독의 <크리스마스 선물>, 임필성 감독의 <멋진 신세계>와 묶였다). 세 감독의 단편 모두 종말을 전제한 이야기인가.
=본격적으로 인류가 망하기 시작하는 것은 임필성 감독의 좀비 영화 <멋진 신세계>부터다. (웃음) <천상의 피조물>은 종말의 전조일 뿐이다. 다 같이 종말을 그리자고 작정한 건 아닌데 감독들끼리 대화하다보니 불안과 공포의 미래담이 많았다. 그저 영화적인 표현을 위해 미래를 어둡게 그리는 것은 아닐 거다. 현재에서 실감하는 암담함에서 미래를 유추하는 거지. 또 하나, 로봇 영화를 하고 싶었다.
-<천상의 피조물>은 절에서 일하는 로봇이 종교적 깨달음에 다다르는 이야기다. 스스로 사이보그라고 믿는 인간이 등장하는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는 반대방향 아닌가.
=그럴지도. 나의 로봇은 무척 괴로워한다. 피조물이 창조자와 같은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위기의식과 사건을 그린 영화다. 나로서는 처음 쓴 원작 있는 시나리오기도 하다. 2, 3년 전 <동아일보>의 과학기술문예창작공모전에서 심사를 보다 전년도 수상 작품집에서 <레디메이드 보살>이라는 단편을 발견하고 감명을 받아 캐릭터와 이야기의 살을 붙였다.
-<커밍아웃> <메모리즈> <사랑의 힘> 등 단편 연출에 열성적이다.
=단편만 찍고 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 장편에서는 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단편은 마냥 즐겁고 행복하다. 단편 만들 때는 악몽도 안 꾼다. (웃음) 하지만 <천상의 피조물>은 어쨌든 최초의 로봇 영화인데다, 그것을 CG가 아니라 모두 메커닉으로 작업해서 힘들었다. 예산은 14억원이다.
-<스타워즈>의 C3PO처럼, 배우가 기계 껍질에 들어가 연기하는 방식은 고려하지 않았나.
=그러면 현장은 원활할 것 같았지만 어딘지 옹색한 기분이 들었다. 쇠붙이 기계덩어리가 정서를 유발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로봇을 만들었다. 거기 사물이 진짜 있는 것과 CG는 다르다. 얼마 전 <매드 맥스2>를 재발견했다. 그 아날로그 작업이 주는 생짜의 압도적 힘은 <매트릭스>와 <나쁜 녀석들>의 디지털 자동차 추격전이 아무리 완벽해도 따라오지 못한다. <천상의 피조물>의 주인공 RU-4는 <괴물>의 장희철 디자이너가 디자인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 극의 흐름에 따라 슬프게도 기쁘게도 해석이 가능한 불상과 같은 인상을 주문했다. 로봇이 한번 뜨면 촬영장이 가관이었다. 예컨대 세상에 절망한 로봇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의기소침하게 복도를 걷는 장면에서는 유압으로 수족을 움직이는 조종석의 두명, 조종석을 미는 사람이 두명, 목과 손가락을 무선으로 움직이는 스탭까지 모두 아홉명이 달라붙어야 했다.
<좋은 놈…>은 <소오강호>의 웨스턴 버전
-만주 웨스턴이라고 장르를 밝힌 차기 장편의 가제가 무려 <좋은 놈,나쁜 놈, 이상한 놈>이다. <석양의 무법자>의 원제(<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를 상기시킨다. 전작을 돌아보면 서사적 재미가 강한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이 한쌍을, 결정적 인상과 심리를 파고드는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이 한쌍으로 묶인다. <좋은 놈…>은 이야기가 날쌔게 움직이는 역동적 영화로 짐작되지만, 그렇다고 <반칙왕>의 세계로 돌아가진 않을 듯하다. 김지운 영화의 제3장인가.
=나는 항상 새 영화 들어갈 때 장르부터 생각하고 거기 어떤 이야기를 넣을까 궁리했다. 현대 장르영화는 주제와 이야기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장르의 선택은 주제의 선택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감독으로서 미진하지만 장르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했다. 호러, 누아르를 했고 살짝 부끄럽지만 SF도 <천상의 피조물>로 경험했고 남은 장르가 웨스턴과 뮤지컬이다. 그런데 뮤지컬은 요즘 많이들 만들어서 흥미가 반감됐다. <좋은 놈…>은 장르부터 다짜고짜 생각하고 들어가는 나의 마지막 영화다.
-그럼 차라리 ‘청색시대’의 마지막 작품?
=그리고 입체파로 넘어가는 건가. (웃음) 내가 나이를 먹어도 내 영화는 안 늙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르영화를 안 한다는 게 아니라, 다음 영화는 누아르건 호러건 이야기부터 생각하고 적합한 장르를 찾을 거다. <좋은 놈…>은 무엇보다 대륙활극이다. 이 장르에는 나를 매혹하는 요소가 잔뜩 있다. 거침없이 광활한 평원, 바람과 흙먼지, 그리고 동물 중에 내가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 말이 있다. 말의 균형감과 군살없는 몸을 좋아한다. 누아르가 도시 남자의 고독과 로망스라면 서부극은 자연 안에 선 남자들의 그것이다. 서부극은 미국영화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에드윈 포터의 <대열차 강도>가 최초로 극 형태를 갖춘, 장면이 나뉜 영화였으니까. 웨스턴은 그래서 미국이 전유한 장르처럼 여겨졌지만, 우리에게도 광활한 대륙에서 근대적 드라마를 펼칠 수 있는 장은 일제강점기의 만주가 있다. 1960년대 이만희, 임권택, 신상옥, 정창화 감독님이 모두 만주 액션·만주 웨스턴을 찍었다. 일제강점기 만주에는 김좌진, 김종진, 사회주의자 김혁 등 많은 항일운동가와 혁명가가 활약했고 꽃다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한때 만주에서 연해주까지 달렸던 대륙과 연계를 잃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보면, 만주 웨스턴은 우리에게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에 관한 이야기도 될 듯하다.
-혹시 호연지기에 관한 영화라면 뜻밖이다.
=나처럼 호연지기 안 되는 사람이 이런 말을! (웃음) 요즘 독도나 동북공정 논쟁을 보면 왜들 이렇게 시비를 걸어오는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열강들의 국토 간섭과 침략이 그때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한다.
-제목의 세 주인공 가운데 ‘이상한 놈’은 송강호 배우로 결정됐다고 들었다.
=기본적으로 만주의 조선 마적단 이야기다. 마적이면서 열차털이범인 사내- 이상한 놈이다- 가 있고, 살인청부업을 겸하는 악랄한 또 다른 마적이 있다. 여기에 또 한명. 일제의 억압을 피해 만주로 쫓겨 올라온 전직 백두산 사냥꾼으로서 수배된 마적단을 잡으러 다니는 현상금 사냥꾼이 나온다. 따지고 보면 다 ‘나쁜 놈’이니 제목을 <극악무도 삼인전> <3인의 악당전>으로 할까 싶기도 했다. 현재 80신을 썼는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좋은 놈이 나쁜 놈이 되기도 하고 캐릭터들이 계속 움직인다. 셋 중 하나가 청나라가 망할 때 어딘가에 묻었다는 보물의 지도를 우연히 손에 넣으면서 세 남자가 얽히고 만주에서 연해주에 걸쳐 쫓고 쫓기는 활극이다. 아주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소오강호>의 웨스턴 버전이라 봐도 된다.
끊어졌던 대륙활극의 맥을 잇는 영화
-<달콤한 인생>을 시작할 무렵에도 서부극을 향한 동경을 언급하며 “하지만 불가능하니까”라고 말을 줄인 적이 있다. 가능하다는 판단으로 옮아간 과정은 무엇인가.
=오지를 즐겨 찾는 조남룡 포토그래퍼가 몽골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의욕을 냈다. 또, 회고전에서 본 이만희 감독님의 <쇠사슬을 끊어라>도 힘을 주었다. 어쩌면, <매드 맥스>와 <매드 맥스2>가 같은 시리즈지만 전혀 다른 영화인 이치와 반대로 <좋은 놈…>은 전혀 다른 <달콤한 인생>일 수도 있다. <달콤한 인생>의 원형이 복도나 길을 걷는 남자의 뒷모습 이미지였다면 이 영화는 광야의 태양을 향해 말을 타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가는 남자들의 뒷모습이다.
-아니, 오토바이라니.
=송강호가 말을 못 탄다고 해서. (폭소) 임수정도 타는데 왜 못 타냐고 했지만… (마침 김지운 감독의 손전화가 울린다. 송강호다. 귀신이다) 오토바이를 타는데 또 총은 쌍권총을 든다. (웃음)
-서부극과 무협을 함께 언급하니 당장 <킬 빌2>도 생각나는데.
=전혀 무관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 그것도 멀다. 캐릭터로 본다면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건맨>, 배경과 이야기를 쫓아가는 방식은 이만희 감독님의 <쇠사슬을 끊어라>, 인물 군상은 <소오강호>와 닮은 점이 있다. 아주 어려서부터 존 포드, 앤서니 만,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정통 서부극을 많이 봤지만, 자연 앞에서 타락한 인간을 캐릭터와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방식은 세르지오 레오네가 단연 매력있다.
-멕시코 혁명을 배경으로 계급투쟁과 웨스턴을 결합한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갱>은 서부극으로 시작하지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나 <1900년>에 근접한 형태로 끝났다.
=시나리오가 미완이라 이 영화가 <석양의 갱>과 비슷한 방식으로 역사와 만날지는 아직 모른다. 망명하건 쫓겨나건 결국 조국을 잃고 마적질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의 발버둥이다. 그러므로 인물의 현실 자체가 역사의 단면일 수도 있다. 묵직한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여성 캐릭터는 전혀 없나.
=남자 영화에 억지로 여성 캐릭터를 넣어 억지 로맨스를 만드는 일은 끔찍하다.
-지배적 정서를 뭐라고 하겠는가. 유머도 많을 듯하다.
=대륙활극으로 작정하고 만드는 영화고 <달콤한 인생>보다 훨씬 상업적이고 오락적이다. 미완의 시나리오를 본 사람들이 많이 웃긴 했다. 쫓고 쫓기는 모험담이라서 그런지 <캐리비안의 해적>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머는… 이런 식이다. 송강호 캐릭터가 보물지도를 찾으러 아편굴에 들어가 이러쿵저러쿵 떠드는데, 주위에 아편 연기가 피어오르니까 자꾸 정신이 혼미해져서 말이 오락가락한다. (폭소) 지금까지 쓴 80신이 분량은 70%지만, 감정 흐름으로는 절반쯤 왔다.
-<좋은 놈…>을 지배하는 쾌감은 무엇인가.
=끊어졌던 대륙활극의 맥을 잇는 영화의 재미다. 모든 걸 차치하고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만 봐도 재미있게 따라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기도 하다. 액션은 <달콤한 인생>에서, 몰아치는 액션을 해보았으니 좀더 창의적이고 아기자기한 액션을 고민 중이다. 나로선 현대 한국영화에서 다루지 않은 역사적 배경과 공간을 들여온다는 점, <반칙왕> <달콤한 인생>에서 구도와 원형을 조금씩 구사한 서부극 장르에 본격적으로 임한다는 점에 기대를 건다.
황량한 평원에 카메라를 세워 놓으면 가슴이 복받칠 듯
-로케이션 촬영 비율을 어느 정도로 잡나.
=3월에 크랭크인해서 몽골, 만주,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로케이션 촬영한다. 아무래도 2.35:1 화면비율일 거다. 가능하면 실내 세트 분량을 포함한 국내 촬영분을 40%까지 늘려보려고 한다. 4∼5개월 찍어 내년 연말이나 이듬해 초에 개봉할 예정이다. 촬영감독은 <장화, 홍련>을 함께한 이모개 기사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중국과 러시아 영화인들을 만나 좋은 인력을 소개받으려고 한다. 음악은 달파란, 장영규와 접촉하고 있다. 집시풍 음악도 어울릴 거다. 요즘 <세계의 포크 음악>이라는 음반을 듣고 있는데 신나면서도 서글픈 것이 그만이다.
-작업 방식에 있어 전에 없는 시도가 있나.
=3D 동영상 스토리보드 애니매틱스를 만들 거다. 액션이 치밀해야 하는 이유도 있지만 해외 촬영에서 시간과 제작비 낭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림 콘티를 아무리 그려도 움직임을 통해 시퀀스를 보지 않으면, 뭘 찍고 어디서 힘을 줘야 할지 모른다.
-아무래도 러닝타임이 길어질 것 같다.
=간도 철도, 조선인 부락, 아편굴, 속칭 ‘귀시장’으로 불리는 암시장 등 공간 수가 많으므로 영화도 길어질 수 있다. 의상도 강하고 세야 할 것 같다. <황야의 무법자>의 긴 코트처럼, 그 자체로 임팩트가 강해야 한다.
-서구 평론가들은 타이 감독 위시트 사사나티엥의 <검은 호랑이의 눈물>에 ‘톰양쿵 웨스턴’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주었다. <좋은 놈…>의 경우는 어떨까.
=된장 웨스턴인가? (웃음) 영화제에서 차기작을 묻는 외국 영화인들에게 ‘만추리안 웨스턴’이라고 하니 잘 못 알아듣고 ‘오리엔탈 웨스턴’이라고 설명하니 끄덕였다. 웨스턴과 무협의 느낌을 즉각 같이 받아들이며 재미있어했다. 웨스턴이라는 흥미로운 장르가 최근 십수년간 좋은 작품을 내놓지 못해서 서양 영화인들도 재미있는 서부극을 많이 기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찍는 동안 지독하게 추울 텐데.
=추위를 몹시 타는 체질이다. 그런데도 걱정보다 대륙의 그림이 궁금하고 즐거움이 앞선다. 황량한 목초지와 평원에 카메라를 딱 세워 놓으면 가슴이 복받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