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숨결을 담은 세밀화
한국 영화의 오늘 파노라마 상영작 <사과>
20대 후반의 평범한 회사원 현정(문소리)은 오래된 남자친구 민석(이선균)과 여행길에 올랐다가 난데없이 이별 통보를 받는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고, 삶은 끝난 것 같다. 그즈음 상훈(김태우)이라는 같은 빌딩에서 근무하는 순박한 남자가 나타나 현정에게 구애를 하고, 현정은 조금씩 그에게 마음을 열어 결혼에 이른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결혼하는 것을 꼭 영화 중간에 넣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남편 상훈과의 결혼생활은 다른 갈등을 위한 시작이다. 상훈이 일 때문에 한 본의 아닌 거짓말이 불씨를 만들고, 아이 낳고 지친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현정도 옛 애인 민석을 다시 만난다. 현정에게 세상은 다시 서럽고 미안한 사막이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 삶은 그래도 계속될 태세다.
강이관 감독은 영화아카데미 출신이며, <나의 일기> <소년의 시> 등의 단편 작업을 했고,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의 조감독을 거쳐 장편 데뷔작 <사과>를 만들었다. 직장을 찾는 젊은 남자의 이야기에서 선회하여 연애와 결혼에 관한 한 시기에 대한 영화를 데뷔작으로 만들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여자주인공을 따라 전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의 생각에 “한국에서 결혼 적령기라는 시기에 처한 우리나라 남녀의 연애 방식은 너무 이상한데”, 그것을 “개인의 욕구와 사회적 통용이 부딪치는” 어떤 지점에서 풀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그 인물들이 “기구한 운명도 아니고, 비참한 운명도 아닌 평범한 사람”인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영화를 해보고 싶었다. 단, 삶이 아니라 극에서 나오는 건 재미없다”는 다짐을 거듭 되새기면서.
배우들의 선명한 연기, 간결하게 살아 있는 대사, 지인들의 사전 인터뷰를 참조로 상상해낸 일화와 감정들, 그것들의 신중한 선택과 배치, 그리고 여운과 미련으로 채워진 신과 신 사이의 운용, 드라마의 고저를 대체하는 정서적 고저 등이 흥미로운 긴장감을 자아낸다.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존속해나가는, 누구나 그러한 것 같아 쉽게 말 못하거나 하려고 해도 투박하게밖에 표현해내지 못하는 삶의 귀여우면서도 잔인한 보편적 숨결을 영화는 과욕없이 결을 따라 포착해내고 있다. <사과>는 그 ‘평범한 삶의 성질’에 천착한 흥미로운 세밀화다.
“<사과>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인 이야기다”
<사과>의 강이관 감독
-관객은 <사과>라는 제목에 궁금해할 것이다
=<사과>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먹는 사과,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사과다. 영문 제목도 <SA-KWA>라고 지었는데, 어차피 두 가지 뜻 모두를 표현하는 적당한 영어가 없는 바에야 소리나는 대로 쓰는 게 맞다는 생각을 했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필요해져 제목을 먼저 지었다. ‘강이관의 여름 프로젝트’나 ‘1번 영화’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웃음)-특별히 고민한 장면이 있다면.
=엔딩이다. 일종의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여주인공 현정이 상훈과 민석 중 누굴 선택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여러 버전의 엔딩을 구상했고, 찍은 것도 여러 개다. 편집에서 최종 결정했다. 지금 엔딩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여러 의견을 내놓았다. 내 경우에는 여주인공이 나름대로 자기 정리가 있어서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한다.-지금 단계에서 어떤 바람이 있다면
=새로운 대중영화로 공감을 얻어보자는 것이 처음 취지였다. 지난해 개봉하려다가 못하고, 외국영화제에 많이 나가면서 ‘아트’로 찍혔는데, 개인적으로는 ‘안 아트’라고 생각한다. (웃음) 이 영화는 영화적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봐도 어려울 게 없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인 이야기다.
이국 땅에 던져진 십대들의 슬픈 성장드라마
크리틱스 초이스 상영작 <방황의 날들>
한 소녀가 두터운 외투를 꼭 여민 채 눈 위를 걷고 있다. 소녀의 얼굴을 집요하게 따라붙는 카메라. 말없이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는 혼자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과 선댄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방황의 날들>은 캐나다에 이민 온 한국인 소녀 에이미의 이야기다. 영어가 서투른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같은 한국계 남자아이 트란과 어울리는 것. 에이미는 트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의 모호한 태도는 둘의 관계를 예상치 못한 지점으로 몰고 간다.
“12살 때 가족을 따라 LA로 이민을 갔다. 내가 10대에 겪었던 혼란스러운 경험들이 영화의 밑바탕이 됐다.” <방황의 날들>로 감독 데뷔전을 치른 김소영 감독은 대학에서 퍼포먼스와 실험영상을 전공한 뒤, 비디오 아티스트로 활동해왔다. 그런 그가 영화연출을 생각하게 된 것은 영화감독인 남편 브레들리 러스트 그레이의 작품을 위해 아이슬란드로 이주하면서다. 낯선 땅에 도착한 그는 10대 시절의 막막한 감정을 되살렸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2년의 시간을 거쳐 시나리오가 완성됐지만, 그 다음에는 작품에 맞는 배우를 찾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직접 미국과 캐나다를 돌아다니며 한인타운을 샅샅이 뒤졌고, “표정이 풍부해 보이는” 김지선과 강태구를 발견했다. 두 사람 다 연기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일반인이었다.
“그냥 자신의 삶을 살아가듯 꾸밈없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다. 현장에서 대사를 주지 않고, 상황만을 설명한 뒤 느끼는 대로 행동하라고 했다.” 모험과도 같은 선택이었지만,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방인이 되어버린 에이미와 트란.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두 사람은 캐릭터에 빠져들었고, 가공되지 않은 대사들은 삶의 단면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진정성으로 이어졌다. 낯선 이들의 사진과 편지를 몰래 가져와 보관하는 에이미, 에이미가 잠든 틈을 타 슬쩍 가슴을 만지는 트란 등 감독이 구축한 에피소드들은 이국에서의 외로움,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십대들의 성적인 긴장감 등 복합적인 감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굳이 극적인 사건을 만들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일상의 사소해 보이는 순간에 담긴 미묘한 심리를 드러내고 싶었다.”
영화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 홀로 눈밭을 걸어가는 에이미의 모습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를 상징하는 이미지와도 같다. 희미한 온기를 전하던 관계는 막을 내리고, 소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나가야 한다. <방황의 날들>은 이국 땅에 던져진 십대들, 그 혼란스러운 내면의 보고서인 동시에 슬프도록 사실적인 성장의 드라마다.
“세상에 섞여들지 못한 에이미의 내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방황의 날들>의 김소영 감독
-<방황의 날들>은 답답하게 느껴질 만큼 대다수의 장면들이 클로즈업으로 촬영됐다.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바깥세상에 섞여들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는 에이미의 내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이국의 사람들이 아닌 자신과 트란의 존재뿐이다. 그래서 두 사람을 주로 담았고, 내밀한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클로즈업을 선택했다. 촬영감독이 사라 레비라는 미국인으로,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사람이다. 한국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함에도 등장인물의 정서를 굉장히 잘 잡아냈다.-주인공 두명이 모두 비전문 배우인데다가 현장이 즉흥적으로 진행됐다. 예상치 못한 순간들도 많았을 것 같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트란이 에이미에게 섹스를 하자고 말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다. 지선이에게는 영화장면 중 하나라는 언질을 주지 않은 채 태구에게 가서 말을 하라고 했다. “이 변태 자식아” 하는 에이미의 대사는 지선이가 실제로 태구에게 내뱉은 말이다. (웃음)-차기작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간략한 설명을 부탁한다.
=<나무 없는 산>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 떠난 어머니가 자매를 시골의 고모에게 맡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번 영화 역시 내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됐다. 내년 여름 즈음 부산에서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