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팬클럽과 팬문화 [1]
2006-11-09
글 : 박혜명
사진 : 씨네21 사진팀

일반적으로 팬은 ‘스타에 열광하는 사람’을 말한다. 팬을 비하한 ‘빠순이’(또는 빠돌이)는 ‘스타에 열광하는 한심한 사람’이다. 팬들은 자신들이 빠순이고 빠돌이임을 인정하지만 남들이 그렇게 불러주는 것을 좋아하진 않는다. 팬이 아닌 이들에게 팬이란 늘 난폭하고 무식하고 격렬한 무리이지만 그처럼 열광적인 팬이 없다면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스타 산업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스타 산업의 주소비자는 누가 뭐래도 팬이다. 동방신기의 3집 앨범 사진반을 사고 3집 앨범 DVD반을 사고 일본 콘서트 실황 DVD를 살 사람은 동방신기를 좋아하는 팬 한명이지 동방신기를 대충 아는 일반인 세명이 아니다. 팬은 또 스타에게 있어 ‘언젠가 나를 배신할 갈대 같은 존재’이면서도 ‘지금은 나만 믿고 내 곁에 있어줄 존재’이기도 하다. 포털사이트 다음 커뮤니티 관계자는 “요즘은 연예인들 중에도 자기 팬카페에 가입해서 팬들하고 직접 얘기를 나누는 이들이 늘고 있다”면서 “그런 카페는 스타 가입 카페라고 해서 별도 분류한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말로는 팬관리이지만 스타들이 팬카페 게시판에 남기는 안부인사가 늘 그렇게 ‘관리용 멘트’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팬은, 같은 팬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소사회를 이루고 활동하는 일원이다. 팬 활동의 세계에는 그들만의 규칙이 있고 그들만의 생활 문화가 존재한다.

팬들이 모인 팬클럽과 그 사회가 만든 팬문화란 어떤 것인가. 영화계에서 두드러진 팬덤을 보유한 강동원의 팬클럽과 이준기의 팬클럽 마스터들을 만나 대담을 가졌고, 한때 ‘**폐인’이라 자타 칭해졌던 드라마·영화 팬들의 근황을 물었다. (해외 팬덤의 가장 큰 예로) 일본에 형성된 국내 스타에 대한 팬덤을 한류가 아닌 다른 말로 풀어보고자 했다. 팬덤과 팬문화에 관한 조금은 자세하고 편견없는 안내서이길 희망한다.

지금 팬질하러 갑니다

팬카페 운영자 대담에서 일본 팬의 활동까지, 팬문화의 모든 것

10월15일.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이 개봉하고 다섯 번째 주말에 서울 중앙시네마에서 조용한 행사가 치러졌다. <우행시> 전국관객 300만 돌파 기념 단체관람(줄임말로 ‘단관’). 주최자는 온라인 커뮤니티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식카페’(cafe.daum.net/wehappytimes), 말하자면 <우행시>의 팬카페다. 70여명의 회원들이 이날 영화를 보러왔다. 카페 운영진들은 상영관 앞에 테이블을 놓고 참석자들의 이름을 확인한 다음 좌석표를 건네고, 카페 공지에 알렸던 대로 티저 포스터와 본 포스터를 선물로 나눠주었다. 8일 뒤인 23일에는 이나영 공식 팬클럽으로 활동해온 ‘나영닷컴’(www.nayoung.com)과 ‘타조카페’(cafe.daum.net/tazo)가 신촌 아트레온 극장에서 연합 단관을 했다. 이 자리에는 배우 이나영이 살짝 인사를 왔다. 바쁜 일정 때문에 10여분 정도의 대화만 나누고 “너무 예쁜 나영 언니!” 혹은 “나영 누나!”는 총총히 사라졌다. 멍한 감격이 얼굴에 서린 팬들의 손엔,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카메라폰, 디지털카메라, 캠코더 따위가 쥐어져 있었다.

‘프리티보이 강동원’(cafe.daum.net/dongwon81)과 ‘동원사노모’(cafe.daum.net/dongwon25) 회원들은 9월21일 코엑스 메가박스 4관에서 연합 대관 행사를 가졌다. 강동원이 인사를 다녀갔다. 개봉 전에는 제작사 LJ필름이 팬클럽 시사회를 열었는데 감독 및 배우들이 참석했고 MC 이윤석이 사회를 봤으며 강동원 팬클럽, 이나영 팬클럽, <우행시> 팬클럽에다가 ‘파사모’(<파이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cafe.daum.net/failancafe) 회원들까지 모였다. 성대한 자리였다. <우행시>의 개봉일인 9월14일에는 이 모든 커뮤니티들이 일제히 서울 각곳에서 단관을 가졌다(지방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별뜻없는 날이었겠지만 강동원, 이나영, <우행시>의 팬들에게는 그날이 디데이였다.

팬들은 무엇이든 할 의지가 있고, 실제로 할 수 있다. <우행시> 팬카페의 마스터 정임선씨는 300만명 돌파기념 단관 행사를 끝내고 나서 “300만명이라도 들어서 다행이다. 그러니까 단관 두번으로 끝났지, 아니었으면 더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행시> 팬카페는 지난해 11월4일 캐스팅 기사가 뜬 직후 바로 만들어졌다. 강동원 팬 2명과 이나영 팬 2명이 주축이 된 이 카페는 송해성, 강동원, 이나영 그리고 공지영의 동명 원작이라는 네 가지 사실만 갖고 시작했다. “시나리오? 당연히 못 봤다. 감독과 배우만 보고, 믿고 기다린 거다. 영화가 좋으니까 응원하고 나쁘니까 버리고, 그런 게 아니다. 영화가 잘 나오도록 처음부터 내가 나서서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인 거다. 우리의 목표는 영화가 흥행이 잘되는 것이다. 영화가 잘돼야 배우도 잘된다. 우리에겐 배우 한 사람만 중요한 게 아니라 감독님과 스탭까지 영화와 관련된 모두가 중요하다.”

팬클럽은 더이상 ‘빠순이’가 아니다

팬클럽이 대상을 응원하는 방식은 언제나 적극적이고 구체적이다. 영화 촬영장에는 오빠와 팬카페의 이름으로 제작진을 위한 먹을거리를 챙겨보내고 ‘오빠가 요즘 몸이 안 좋으시다’는 정보를 입수하는 순간 보약재와 건강식품을 챙긴다. 생일이나 각종 기념일에 기백만원 상당의 선물을 보내는 일도 흔하다. 명품 옷, 명품 시계, 고급 가전제품, 수입 악기 등 스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과 취향까지 신중히 고려한다. 영화 팬카페는 영화사만큼의 적극적인 마인드로 영화 홍보에 열을 올린다. <우행시> 팬카페는 영화 개봉을 한달 반여 앞두고 방문이 급증한 일본 팬들을 위해 일본어 가능한 운영자를 추가 모집했다. 이곳 사이트에 가면 일본 팬들을 위한 자료게시판과 자유게시판이 마련돼 있다. 이제 <우행시>는 극장가에서 거의 내렸지만 팬카페가 나서야 할 일들은 아직 한참 남았다. DVD 발매, 연말 시상식, 무엇보다 제일 큰 일은 내년 4월 일본 개봉이다. “(국내 개봉 때처럼) 일본 개봉 때에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홍보할 계획”이라는 의욕을 정임선씨는 감추지 않는다. 애정에 기반한 ‘팬심’(fan心)은 늘 자발적이다. 그런 자발성이 모여 협력하는 것이 팬덤의 절대적인 원동력이다.

물론 스타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 보호, 추종이라는 점에서 팬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는 건 사실이다. 팬들 개개인의 팬심은 다양한 차이를 가질 수 있다 해도 그것이 팬클럽이라는 이름으로 모이면 팬심은 자기비판능력을 포기한 배타적인 집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애들은 쯔쯧, 하는 기성세대의 시각이 옳은 것도 아니다. 팬덤이 만들어내는 긍정적 효과는 팬덤이 끼치는 부작용을 상쇄하고 남음이 있다. 각종 대형 팬카페가 몰려 있는 포털사이트 다음의 커뮤니티 기획팀 강유나씨는 “요새는 팬카페들의 주요한 양상이 ‘우리가 이 사람이 너무 좋아해요’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을 좋아하니까 이런 식으로 문화를 만들어가자’는 쪽이다”라고 설명한다. “<번지점프를 하다> 팬카페나 <형사 Duelist> 팬카페에서 기념 상영회를 꾸준히 했었던 일이라든지, 이준기 팬카페에서 수재민 돕기 성금을 보낸 경우라든지, 그런 행사들이 모두 온라인 팬카페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 이뤄진 것들이다.” 이어 강씨는 “팬카페는 단순한 온라인 카페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집단이다. 이제는 기획사들도 그걸 알고 팬클럽과 같이 하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그룹 지오디 팬카페의 경우 불법음원 다운로드 금지 운동을 벌였었다. 그런 사회적 운동까지 자발적으로 벌이는 그들을 그저 ‘빠순이’라고 욕할 게 아니다. 그런 활동을 통해 그들이 남보다 먼저 사회생활을 배우고 체계를 배우고 직급을 배우고 성숙해지는 면이 있음을 존중해줄 필요도 있다”고 견해를 덧붙였다.

단순한 커뮤니티를 너머 ‘팬덤문화’로

팬들이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사회 활동과 문화는 팬클럽과 팬덤이 단순한 취향 집단의 존재가 아님을 방증한다. 팬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곧 대상의 이미지로 전이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이렇게 하면 누나/오빠가 기뻐하시겠지’의 소극적 자세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마디 잘못하면 그것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오빠의 이미지까지도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애정이 바탕에 깔린 팬들의 스타 소비는 단순한 소비 행태와 같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비 대상의 이미지에 역으로 영향을 끼치는 적극적인 주체도 될 수 있다. 기획사들도 이 점을 잘 인지하고 있다. 한 기획사 이사는 “팬사이트는 물론이고 팬들이 많이 다니는 세부적인 갤러리들이나 연예 관련 게시판에 수시로 들어가는 검색 인력을 둔다. 안 좋은 건 없애야 하고 좋은 부분은 배우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라도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반인 코스프레’란 말이 있다. 가수를 포함한 아이돌 팬덤 사이에서 매우 일반화된 이 말의 뜻은 ‘내가 00의 팬임을 숨기고 일반인인 척하기’이다. ‘팬’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말이며, ‘팬 아닌’ 사람들과의 괴리감에 스스로를 격리시키고자 하는 심리가 반영된 말이다. 팬덤이 집단적 속성이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 또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절대 이해받을 수 없는, 같은 팬만이 이해해줄 수 있는 팬심을 나누기 위함이다. 인터넷이 팬덤의 폐쇄적 성질을 심화시킨다고 보는 견해가 존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밤에 인터넷을 켜고 즐찾해둔 팬카페에 들어가 어제 직캠으로 찍은 오빠의 영상을 업로드해본다. 몇분 뒤, 다른 회원들이 댓글을 달아준다. ‘어머, 우리 오빠 너무 멋지심 ㅠㅠ’, ‘님이 직접 찍으신 거예요? 정말 잘 찍으셨어요. 좋은 영상 감사해요~’ 이런 식의 교감과 의사소통은 팬질의 장을 벗어나면 절대 불가능하다. 기획사가 내놓은 아이돌 상품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소비자이고, 오빠의 이미지를 위해 뜻깊은 사회적 활동을 하더라도 팬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는 일반인 코스프레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조직의 일부이면서 온라인 커뮤니티에 기생해 사는 쓸쓸한 네티즌. 팬이란 그런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