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자국 중심적인 시선에서 시작된다. 욘사마로 인해 국가의 이미지가 상승했고, 문화상품의 수출이 늘었다는 것이다. 결과에 집중된 외피적인 이야기가 자화자찬의 로맨스를 만들어낸다. <겨울연가>의 순수, 욘사마의 상냥함은 때늦게 금의환향을 했다. 하지만 한류는 팬들의 흐름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타를 보기 위해 공항까지 마중 나오는 일본 아줌마들이 한류의 실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류는, 곧 새로운 팬덤의 양상이다. 베트남과 중국, 대만과 일본은 문화상품의 수출국이기에 앞서 새롭게 등장한 팬층이다. 특히, 30대 이상의 여성들이 주를 이루는 일본의 국내 스타 팬층은 꽤 생소하다. 한류는 이제 무엇보다 팬질로서 이해돼야 한다. 팬질은 곧 팬심(fan心)이고, 팬질은 팬질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 좀더 다양하고 많은 사례가 팬심을 구성한다. 여기선 한류와 함께 가장 부각됐던 일본 아줌마들의 팬질을 소개한다.
욘사마의 공간을 체험하다
일본인들은 팬사이트에 매우 사소하고 개인적인 내용까지 글로 남긴다. 아니, 그 사적인 내용을 공유하고 싶어한다. 가령 배용준의 브로코리 커뮤니티에는 “‘거짓이어도 좋으니, 천국의 강에서 일년에 한번 약속하고 싶어…’, 오늘 출근을 하던 중 BGM으로 드라마 삽입곡이 흘러나왔어요. 차 안에서 이 노래를 들으니 준을 생각하게 됐죠. 준과의 약속이라니 지금도 가슴이 설레요”(rieko)라는 식의 글이 올라온다. 작품에 대한 감상평도 매우 사적이다. “오늘은 <외출>을 다시 한번 보았어요. 몇번을 보아도 같은 부분에서 눈물이 나오더군요. 사랑스러운 사람을 보는 눈, 사랑스러운 사람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느낌, 사랑스러운 사람의 손, 너무 애절해요.”(kazune) 속마음을 잘 표출하지 않는다는 일본인들이기에 다소 의아한 반응들이다. 또 다른 팬클럽 회원은 배용준이 일본에서 묵었던 호텔의 스위트룸 사진을 올린 뒤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방은 여러 개라고 하는데, 방 안에 침대는 하나네요. 그럼 밤에는 역시 혼자였다는 걸까요? 쓸쓸하진 않았을까요?”(epiokkuri) “이번 여름 휴가는 준과 함께 시작해서 준으로 끝을 맺었어요. 마지막 날엔 신오쿠보에 가서 한국 음식을 먹었죠. 준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휴가라~.”(치후유) 이쯤 되면 이들의 솔직함은 인터넷의 익명성보다는 ‘욘사마의 공감대’에서 나왔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스타의 이미지를 자신의 일상에 결부시키고 재미를 찾는 일, 이는 종종 놀이의 형태로 변형되기도 한다.
배용준, 007 사건
2004년 겨울, 배용준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007 긴급지령’이란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공항과 호텔까지 따라다니는 팬이나 언론 매체로부터 배용준을 보호하자는 제안이었다. 배용준과 유사한 사람들을 찾아 거리로 내보내서 기자나 팬들을 유인하자는 것이 지령의 골자다. 이 글에는 10시간 만에 총 185개의 답글이 달렸다. “우리 남편은 키는 조금 작고 체중은 오버네요. 도움이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 보정 속옷으로 수정하면 어떨까요?(room1952), “용준님 옷과 비슷한 코트를 구했습니다. 아들이 없기 때문에 사위에게 입힐 겁니다. 아케지마 방면으로 출동시키겠습니다.”(hsmy72) -<겨울연가와 나비환타지> 중
배용준에 대한 공감대는 곧 놀이를 위한 소재가 된다. <겨울연가>의 소비형태에 대해 조사한 책 <겨울연가와 나비환타지>는 이를 오미코시와 마쓰리에 비유했다. 오미코시는 마쓰리에 등장하는 일종의 가마다. 즉, 일본의 팬들이 배용준을 오미코시로 두고 놀이를 즐긴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놀이는 권상우 팬페이지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상우씨에게 가장 어울리는 음식은 뭘까요?”(HIROTA)라는 글 아래 “아무래도 놀이 공원에서 먹는 아이스크림? 조금 이상하지만, 전 <천국의 계단>을 보고 군침을 흘렸답니다”(쇼칭), “계란을 얹은 밥, 실은 제가 좋아해요”(히마와리노하나)라는 답글이 달린다. 이들에게 스타는 놀이의 소재이기도 하다.
권사줌의 마쓰리
2005년 4월24일, 신오쿠보의 한 한국 요리점에는 권상우의 일본 팬페이지 ‘Kwon Sangwoo Japan fan’s Page’(이하 KSJFP) 3주년 기념 오프회(오프라인 모임)가 열렸다. 오후 12시부터 시작된 이날 행사에는 50여명이 참석했다. 한국의 권상우 팬카페 ‘권사줌’의 회원이 만들어온 축하 영상이 상영됐고, 권상우를 주제로 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유카타와 게다만 입고 신지 않았을 뿐, 분위기는 마치 마쓰리(일본의 전통축제)와 같았다. 간단한 식사 뒤 선물 추첨이 시작됐다. 준비된 선물은 <신부수업> 포스터, ‘더페이스샵’ 화장품 등 12종. 선물을 받은 사람도, 받지 않은 사람도 모두 즐거운 모습이었다. -tallim의 리포트 중에서
자신의 한국 연예인 이력을 2002년부터라고 말하는 KSJFP 운영자 히로미는 2006년 현재까지 한국을 19차례 다녀간 권상우의 열렬한 팬이다. 히로미는 ‘권사줌’과의 교류를 통해 좀더 빨리 정보를 알아내고, 이를 일본 내 회원들과 공유한다. 항공사나 호텔 직원 혹은 그 관계자는 일등급 정보 출처다.
한국의 팬카페만큼은 아니지만 일본에서도 공식 팬클럽 이외의 팬커뮤니티가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배용준의 경우 공식 팬클럽없이 브로코리 사이트(배용준의 한국 매니지먼트사인 BOF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IMX가 운영하고 있다)의 커뮤니티만 수십개가 개설되어 있으며, 이병헌의 경우도 공식 팬클럽(한국쪽 매니지먼트사인 팬덤엔터테인먼트와 제휴 관계인 하쿠호도가 운영하고 있다)을 포함 커뮤니티, 블로그 형식의 팬페이지가 팬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사이트들의 주요 기능은 정보 공유와 친목 다지기지만, 일본의 특성상 팬페이지는 곧 축제의 장이 되기도 한다. 이들은 스타에 대한 감정을 놀이의 형태로 변형시키고,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축제로 완성해낸다. 히로미는 KSJFP의 3주년 오프회를 위해 영상을 직접 편집하기도 했다.
팬질은 추억을 남긴다
일본의 팬사이트에는 유달리 상품 관련 카테고리가 많다. 스타의 얼굴이 들어간 머그잔, 쿠션 혹은 스타가 작품 속에서 착용했던 스타일의 옷 등이 인기가 많다. 이병헌의 일본쪽 팬클럽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팬덤엔터테인먼트의 송완모 이사는 “일본이 유달리 캐릭터 상품에 대한 수요가 큰 것 같다. 이병헌의 경우도 쿠션 상품 등이 매우 잘 팔린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병헌의 한 팬사이트에는 “병헌씨가 <아름다운 날들>에서 입었던 옷이 어느 브랜드인가요? 제가 보기엔 랄프 로렌 같은데, 아시는 분 알려주세요”라는 식의 질문이 곧잘 올라온다. 배용준 투어로 한국을 방문한 마쓰시다 가오루(55·요코하마)는 “비싸기도 하지만, 일본인은 추억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이런 걸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KSJFP에서는 권상우의 생일을 맞아 권상우의 사진과 본 사이트의 이름이 들어간 와인을 직접 주문 제작하기도 했다.
‘배용준 투어’, ‘한류 로케지 투어’ 등의 관광상품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배용준의 의상 소품,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는 파크 비오에프는 일본인 팬들에게 유명한 관광장소다. 10월23일 이곳을 찾은 도모토 아사코(53·나라)는 “욘사마의 상냥함에 휩싸여 있는 느낌”이라며 “이곳에 안 오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광객인 가와사미 게이코(58·시즈오카현)는 배용준이 <외출>에 끼고 나왔던 ‘인수 반지’를 보여주며 “욘사마의 손을 잡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일본인들은 스타를 향한 애정을 개인의 추억으로 매듭짓는다. <신부수업> 촬영 때 대구까지 찾아갔다는 료코(요코하마)는 “상우씨는 가족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안티에 대처하는 팬들의 자세
‘겨울연가 이혼’(<겨울연가>를 본 주부가 남편이 싫어져 이혼하는 현사)과 ‘페’(배용준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욘사마 대신 사용하는 명칭). 언론에서도 곧잘 보도되는 혐한류, 안티 한류는 실제로 존재한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은 2005년 방한 당시 “욘사마에 몰려드는 일본 아줌마들의 모습은 정말 추악하다고 느낀다. 정말이지 추악한 그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그 대상이 누구이든지 간에 싫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조금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페?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건 정말 일부분이다. 단지 남자들의 젤러시일 뿐이다. 그런 말이 방송에 나오면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웃음)”(도모토 아사코), “일본의 80%는 욘사마를 좋아한다. 몸도 멋지고, 피부도 멋지고, 머리도 좋고. 나도 남편이 욘사마한테 다녀오라고 해서 온 거다”(료코), “이병헌이 CM을 하면, 상품이 팔린다. 아, 딱 하나. 자동차는 안 팔린다. 그건 몇 백만엔이나 하니까”(마쓰시다 가오루). 실제로 일본의 일간지 <아사히신문>이 2005년 한국의 연예인 X파일 중 배용준과 관련된 부분을 보도하자, 배용준 공식 일본 홈페이지에는 “배용준씨가 일본에 지진이 났을 때 기부한 사실을 보도하지 않으면서, 이런 소문을 보도하다니 참을 수 없다”는 글이 게시판을 도배할 정도였다. 최근 일본의 <도쿄스포츠>가 권상우의 술 취한 모습을 보도할 당시, 일본의 한 팬은 한국의 권상우 팬카페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일본의 보도에 대해 대신 사과드립니다. 이 때문에 상우씨가 일본을 싫어할까봐 걱정이에요.”
한번 욘사마는 영원한 욘사마
“욘사마에서 시작해요. 욘사마를 좋아하다가 비, 최지우, 이영애 등을 좋아하게 되죠. 욘사마가 저 위에 있다면 박용하, 권상우 등은 그 아래 있어요. 일본에서의 위치가 한국의 젊은 안성기 같은 느낌?” 마쓰시다 가오루는 현재 일본의 한류 스타를 위의 말로 정리했다. 이것이 정확한 진단은 아닐지라도, 일본 팬질의 경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말이다. 일본에서 한번 팬은 영원한 팬이라는 식의 생각이 강하다. 기무라 다쿠야, 소리마치 다카시 등의 팬클럽은 20년 넘게 운영되고 있다. 배용준의 경우도 이미 한때의 붐을 지나 정착화 단계에 들고 있다는 것이 팬들의 말이다. 가와사미 게이코는 “<태왕사신기> 머리는 안 어울려요”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욘사마가 제일 좋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이들에게 팬질은 추억의 도구이며, 일상의 연장이다. 이들은 스타의 일상에 침범하기보다는 스타를 자신의 일상으로 데려온다. 스타의 인기는 상승 곡선을 지나 팬들의 추억으로 남는다. 공항까지 마중을 나가는 것도 단지 “실제 모습이 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타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방식의 향유, 역시 한류는 팬질의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