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한때 ‘다모 폐인’, ‘미사 폐인’, ‘왕남 폐인’으로 자타 일컬어지며 영화 또는 드라마를 향한 무한한 애정을 쏟았던 사람들 말이다. 드라마는 종영됐고 영화는 극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DVD란 형태로 여전히 팬들 곁에 남는다고 해도 그것들의 이야기와 그 속의 인물들은 지속되는 스타와 달리 종결된 존재다.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도,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그 이후 ‘폐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서 뒤져보니 팬카페들이 아직 존재하고 있고 활동도 이어지고 있었다. 매혹적인 세계 하나가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어 붐을 일으켰던 그 시절 이후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와 <미안하다, 사랑한다>, 영화 <형사 Duelist>와 <왕의 남자>의 팬카페 마스터들에게서 들었다. 구구절절한 행사들의 자취가 흥미로울 줄 알았건만 정작 듣는 이의 마음을 혹하게 한 건 그때 그 드라마가, 그 영화가 왜 당신을 사로잡았던가에 대한 이유였다.
‘네멋’은 인생의 터닝포인트
네멋대로해라+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 팬카페/ cafe.daum.net/mbc7
드라마 방영기간: 2003년 7월3일∼9월5일(총 20회)
카페 개설일: 2002년 5월20일
배우 이나영의 팬카페 회원 수를 3배 이상 늘려놓은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팬카페 ‘네멋대로 해라+’(이하 ‘네멋+’) 마스터 이완식씨는 포토숍과 동영상편집 프로그램이 대중적이지 않던 그 시절, 드라마의 명장면을 플러시로 밤새 만들어 하루 한개씩 게시물로 올리던 열성 회원이었다. 2004년, 2005년 전체 상영회를 열었던 것도 ‘네멋+’이 남긴 족적 중 하나이지만 그보다 활발한 것은 마스터 이완식씨가 고심해서 준비하는 정모와 MT다. 움직임의 계기를 튼 것은 2004년 ‘네멋 파티’. 한때 음악활동을 했던 이완식씨는 드라마 O.S.T에 참가했던 밴드를 초청해 공연과 파티를 겸했다. “다른 카페들과는 좀 다르게 하고 싶어서 색깔있는 모임을 많이 했다. 레크리에이션 강사 자격증이 있어서, MT를 가면 레크리에이션과 게임 위주로 혼자 진행을 한다.” 커플들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부러 남녀가 함께 어울리는 게임을 많이 준비하기도 한단다.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몇번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네 멋…>을 만난 거였다. 이 드라마를 본 뒤로 착해진 것 같다. (웃음) 아침도 꼭 먹고, 사랑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고. 미래만 걱정하면서 사는 편이었는데, 현재의 소중함을 많이 깨달았다. 가끔씩 명대사들을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사는 동안 살고, 죽는 동안 죽어요.’ ‘후회해도 좋을 만큼 좋아하는 사람한테 잘하자.’ 경이와 복수처럼 사랑하진 못하지만 그렇게 사랑하도록 노력하자, 그들처럼 살지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살아보도록 노력하자. 삶에 긍정적인 판타지를 얻은 것 같다.” 이완식씨는 비정기적으로 회원들에게 전체메일을 보낸다. 일상에서 떠오른 단상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이다. “내가 먼저 솔직해지니까 회원들도 마음을 열더라. 드라마도 좋아하지만 지금은 이 카페가 사람들에게 숨쉴 공간이 되는 것 같아서 좋다.”
미안하다, 아직도 사랑한다
미사가연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팬카페/ cafe.daum.net/sorrybutlove
드라마 방영기간: 2004년 11월8일∼12월 28일(총 16회)
카페 개설일: 2004년 9월7일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이하 <미사>)의 주인공 차무혁(소지섭)은 미혼모였던 엄마에게 버림받아 호주로 입양되었던 남자다. 그는 자신을 버렸던 엄마를 찾아내 그 곁을 맴돌지만 복수심과 애증, 그리움 사이에서 내내 힘겨워하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회원 수가 최대 7만~8만명까지 갔다가 현재 4만2천여명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미사가연’은 드라마 종영 이후 입양아 돕기 드라마 영상회, 성가정입양원 바자회, 성가정입양원 돕기 일일찻집 등의 행사를 꾸준히 열어왔다. ‘미사가연’ 마스터 ‘송은채’(닉네임)는 “드라마가 입양아를 소재로 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한 행사를 많이 해왔다”고 설명한다.
감독판 DVD 출시라는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드라마 DVD가 출시된다는 정보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미사가연’ 회원들은 감독판 DVD 발매 추진 사이트를 만들어서 의견을 올리기 시작했다. 서플먼트와 구성에 대한 의견들이 다양하게 올라갔다. 방송국과 DVD 제작사 관계자들이 들락이며 팬들과 직접 의사소통을 했다. 결과적으로 DVD 출시가 예정보다 늦어지면서 감독판이 발매됐다.
“일반적인 결말이라면 마지막에 무혁이가 친엄마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복수를 할 것이다. 최소한 아들임은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권선징악이고 드라마의 클라이맥스인데 그 예상을 깨버렸다. 어머니에게 받은 것을 복수로 되돌려주는 게 아니라 용서한 것이다. 그게 무혁이가 어머니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이었던 거다. 통쾌한 결말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와닿았던 메시지였고 그런 결말을 이끌어낸 게 작가의 능력이라고 보여 좋았다.” 가끔씩 ‘미사가연’ 회원들이 마스터에게 묻는다고 한다. 이 카페는 폐지 안 하고 놔두실 거죠? “영원히 놔두겠다고 얘기한다. 찾는 사람은 줄어들더라도 가끔씩 접속하는 분들은 있을 거다. 우리가 <미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감정을 공유했던 자리로서 그때 시간을 되새길 공간이니까. 그런 의미에서라도 이곳은 없어지지 않을 거다.”
보고 또 보고, 80회 관람
형사중독 영화 <형사: Duelist> 팬카페 cafe.daum.net/duelist
영화 개봉일: 2005년 9월8일
카페 개설일: 2005년 4월9일
‘형사중독’ 회원들은 지난 9월8일 코엑스 메가박스 1관을 대관해 영화 개봉 1주년 기념 상영회를 열었다. 준비기간은 2달. 개봉 중·종영 뒤에 가졌던 단체관람들은 회원들끼리의 행사였지만 1주년 기념만큼은 크게 하고 싶었다고. 영화사를 통해 스탭 리스트 및 연락처를 얻고 초청장을 돌렸다. 잡지광고까지 실었다. 현재 활동 중인 ‘형사중독’ 회원들 중엔 1주년 기념 상영 이후 뒤늦게 영화를 접하고 가입한 사람들도 꽤 있다. “2주년 때도 당연히 할 거다. 회원분들은 메가박스가 제일 좋다고 또 거기서 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형사중독’ 마스터 ‘형사중독’은 영화를 20번 정도 봤다. 회원들이 저마다 발견해내는 영화의 새로운 면들에 끌려 관람을 반복했더니 그렇게 됐다. 운영진들 중에는 60회 이상, 80회 이상 관람한 사람들도 있다.
“처음엔 영화를 보고 이해가 잘 안 됐다. 이해는 안 되는데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래서 극장에 가길 서너번 했다. 3주 만에 막을 내려서 더이상 볼 기회가 없었다.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다는 소식을 듣고 정보를 알아내려고 카페에 가입했다.” ‘형사중독’의 일원이 된 경위를 이야기하면서 마스터 ‘형사중독’은 “이제는 영화도, 카페도 일상이 됐다. 그냥 좋다”라고 지금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반 커뮤니티 기능이 강하다. 친한 회원들끼리 오프 모임이 굉장히 활발하다. 영화를 같이 보러 많이 다닌다. 영화 리뷰도 많이 올라오는 편이고. <형사…>를 좋아해서만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우리 모임이 오래가진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회원들끼리 사이가 좋아서 지금까지 커뮤니티가 이어져온 것 같다.”
‘왕남’에 아카데미를
왕의 남자 영화 <왕의 남자> 팬카페 cafe.daum.net/kingsman
영화 개봉일: 2005년 12월29일
카페 개설일: 2005년 7월19일
일명 ‘왕남’ 카페는 특정 배우 팬이 만든 영화 팬카페가 아니다. 최초의 마스터였던 사람은 모 연예정보프로그램에서 <왕의 남자>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재미있겠다 싶어 친분 목적과 서포터 개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소규모였고, 운영진들은 한과세트를 사들고 촬영장을 방문하곤 했다. 그야말로 특정 배우팬의 ‘경력’없이 영화 자체에 대한 애정이 팬카페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3만명의 회원 가운데 알짜배기를 솎아내서 현재 1만3천명이 남은 ‘왕남’은 4월19일 종영회 이후 카페 1주년을 기념 상영회와 DVD 발매 기념 상영회로 각각 가졌다. 지금은 12월29일에 있을 개봉 1주년 기념행사를 놓고 “친언니, 친동생들보다도 친한” 운영진들끼리 열심히 준비 중이다. 대종상 시상식에 참여했던 카페 마스터 ‘stage’는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우승을 했어도 이렇게까지 기쁘진 않았을 것”이라며 감우성의 남우주연상 소식에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던 기억을 털어놓기도 했다. 각자 개인적인 일로 일본, 영국, 미국 등 타국에 간 카페 회원들은 현지 홍보요원으로 활약할 것이다. “아카데미 기간이 되면 미국쪽 회원이 홍보를 열심히 뛸 거다. 간 지 얼마 안 돼 아직은 현지 적응 중이다. (웃음)”
‘왕남’의 마스터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잊고 있던 꿈을 되찾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전통극을 전공했는데, 그걸로 밥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포기하고 회사를 다녔다. 영화에서 그렇게 하라고 얘기한 것도 아닌데, 영화를 보고 나니까 잃어버렸던 꿈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연극을 다시 시작했다. 근데 우리 카페에 그런 사람이 많다. 이 영화 보고 나서 그림에서 손을 놓았다가 다시 그리기 시작했단 사람도 있고,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단 사람도 있다. 삶을 돌아보게 되고, 열정적으로 살 힘을 얻게 됐다. 정말 바쁘게 살고 있다. 회사 일도 그전보다 더 열심히 하고 있고, 연애도 하고 있고, 직장인 연극도 하고 있고, ‘왕남’ 카페 운영도 하고 있고. 1주일이 얼마나 바쁜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