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 때 본 게 마지막인데 굉장히 밝아진 것 같다. 무려 3년이 흐르긴 했지만.
=나는 맡은 캐릭터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데, 다행스럽게도 점점 더 외향적인 캐릭터를 맡게 된 것 같다. 처음보다. 그래서 그렇게 그들을 닮아가는 것 같다. <각설탕>이 아주 큰 작용을 했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최고 절정이 아닐까 싶다. 나조차도 하면서 이 정도까지 나 자신을 표현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영군의 캐릭터가 감정의 기복이 크다. 막 울다가 웃다가 화냈다가 좋아했다가. 그런 친구라 연기하면서 처음은 나와 많이 달라 걱정했는데, 하다보니 나도 모르는 내 부분들이 많이 발견됐고 무척 자유롭게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정말 즐겁게 촬영한 것이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다. 연기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라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조금은 그것을 떨쳐내고 나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래서 연기 자체를 즐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그전까지는 작품을 하면서 많이 긴장하고 부담을 느꼈던 편인가.
=그렇다. 아무래도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까가 가장 큰 문제니까 항상 고민으로 따라다녔던 것 같다. 영군은 사실상 지금까지 어떤 영화에서도 보여지지 않았던, 정형화된 틀이 전혀 없는 열려 있는 백지 상태의 캐릭터였기 때문에 내가 그려넣는 대로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고사 때 송강호 선배님이 격려차 오셨다가 얘기해준 게 있다. 내가 이 캐릭터를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배우 인생에서 이렇게 백지 상태의 캐릭터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드문 행운이고, 수정이 네가 어떻게 하든 간에 감독과 스탭들이 오케이하는 울타리 안에서 자유자재로 놀아도 되는 캐릭터다. 관객을 네가 하는 그것이 영군이겠거니 생각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캐릭터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모든 문제점이 해결됐다. 현장에서 그때그때 받아들인 느낌들을 다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연기를 해서 그런지 스스로 굉장히, 카타르시스도 많이 느끼고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을 많이 여는 기회가 됐었나보다.
=그동안 보여드렸던 임수정이란 배우는 작품의 색깔도 그렇고 캐릭터의 색깔도 그렇고 개인적인 모습도 그렇고 표현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배우인데 이런 역을 맡았으니, 처음엔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나. 근데 내가 마음을 그렇게 먹고 다가가니까 문제가 쉽게 해결되고 내 안의 많은 부분을 발견하게 된 작품이다. 예를 들면 내가 사람을 웃길 수도 있구나, 내가 이렇게 극도로 거칠어질 수도 있구나, 이런 것들.
-박찬욱 감독과 작업한다고 했으니, 우선 전작들을 봤을 테고 주위에서 해준 얘기도 있을 것이다. 본인 나름대로 어떤 사람이겠다 상상했을 텐데 현장에서 경험으로 알게 된 부분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감독님의 ‘복수’ 시리즈는 어둡고 차갑고, 뭐랄까 냉철하다. 실제로 만난 감독님의 개인적인 성품은 굉장히 따뜻했다. 천생 아저씨 같은. (웃음) 더 놀라웠던 점은 실제로 뵙고 친해져서 얘기도 하고 영화도 보러다니면서 알게 된 건데, 굉장히 아이 같은 부분이 있다. 즉각 떠오른 발상과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현실로 드러내놓고 싶어하신다. 감독님의 영화 안에서 남들이 생각할 수 없는 특이한 아이디어, 영감 같은 것들이 표현 가능해지는 게 그 때문인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 영군의 상상과 공상이 현실로 끄집어내어져서 그것들이 현실인 것처럼 보여지는 장면들이 꽤 있다.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한편의 만화 같은, 동화 같은 영화다.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감독님의 모습은 영화를 보실 때의 모습이다. 감독님이 영화를 너무너무 사랑하신다. 영화 보는 것도 너무 좋아하시고. 극장이 떠나가라 웃으실 정도이고, 표정은 TV 앞에 앉은 서너살짜리 아이처럼 행복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은 것도 아니고 이렇게 몸을 앞으로 죽 내밀고 있다. 새로운 영화를 봐서가 아니라 이미 봤던 영화들인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마냥 웃고 즐거워하시고 그 영화를 100% 다 받아들이시더라.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의 첫인상은 어떠했는지.
=감독님의 시나리오는 친절하지 않은 걸로 유명해서(웃음) 역시나 그 불친절한 시나리오를 보고서는 처음엔 이해조차 하기 힘들고 난해했다. 스토리가 자세히 보이는 형식이 아니었는데, 촬영하다보니까 숨은 연결고리들이 드러나더라. 감독님이 글로 표현하지 않았던 것들, 시나리오상에서 끊겨 있던 것들이 현장에서 다 연결되는 것을 알게 됐다. 놀라웠다. 감독님은 명확하시다. 본인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아주 명확하기 때문에, 심지어 안 찍어도 되는 장면들이 생긴다. 감독님 작품은 대부분 후반편집 때 들어내는 신이 거의 없다더라. 그 정도로 현장에서 굉장히 명확해서 배우들로서는 굉장히 좋고 편하다.
-지난해 <새드무비>를 개봉했고, 올해 두편을 개봉했으며 내년에는 <행복>이 있다. 쉴 틈이 좀 있었는지.
=사실 전혀 없었다. 공교롭게도 작품이 전 작품 끝나고 2주 만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내심 걱정을 했다. 전 작품에서 빠져나오기에도 부족한 시간이고. 다행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예전보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긴 것 같으니까. 예전 같으면 전 캐릭터에서 빠져나와 다음 캐릭터로 들어가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그 시간이 조금 단축된 느낌이 들더라. 연기에 대해 아주 조금은 익숙해짐과 여유로움이 동반되는 것이 가능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편한 캐릭터, 편한 작품을 해보자는 생각은 안 드는가.
=그런 생각을 전혀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연기하고 싶다라는 느낌은 꼭 그렇게 어려운 것에 온다. 그리고 아직은, 향후 몇년 정도 뒤에 내가 어떤 배우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나 스스로를 시험해보고자 하는 생각이 든다. 장르, 캐릭터, 흥행 구분없이. 조금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고 당돌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내가 조금 더 배우로 인정받고 싶은 시기는 30대다. 초반이든 후반이든 그때는 되어야 연기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고 나도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의 20대에는 뭘 해야 할까 생각했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사실 20대는 용기 아닌가. 그 용기를 불사를 수 있는 역할들을 골라서 내가 얼마만큼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을지 시험해보자는 것이다. 향후 2∼3년간은 그렇게 하지 않을까 싶다.
-주위에서, 본인을 믿어주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일단 부모님이다. 가족. 그리고 함께 일하는 스탭들. 그리고 함께 일해왔고 지금 현재 같이 일하고 있는 감독님, 배우들.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내가 있는 것 같다. 만남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너무 귀해서 잃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