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는 말이 없는 사람이어서 자기 마음이나 생각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그처럼 말없이 상처를 표현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듯하다.
=내가 연기했던 캐릭터 중에서 가장 대사가 적었기 때문에 몸으로만 무언가를 표현해야 한다는 문제를 많이 고민했다. 그냥 보기만 했는데도 사연이 묻어나는 것 같은 사람이 있지 않나. 나는 모니터를 보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집중을 하고 감독이 컨트롤하는 대로 따라가려고만 했다. 주변 사람도 관찰했고. 스탭 중에 내가 ‘가을이’라고 부르는 친구가 있었는데 정말 가을 느낌이 나는 사람이었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궁금하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외로워 보이고 사연이 많아 보였을까.
-아직도 모니터를 보지 않는 건가. 좋은 점도 있겠지만 불안할 때도 있을 텐데.
=그건 내가 개발한 나만의 방법이다. 나는 내 얼굴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이런 표정을 하면 여자들이 죽었지(웃음), 하는 걸 모두 기억한다. 하지만 그렇게 매이기 시작하면 새로운 인물을 창조할 수가 없다. 나는 편집실에도 들르지 않고 그냥 한번 가서 밥 사고 나온다. 그래서 지금처럼 빨리 영화를 보고 싶어 죽겠지만, 배우는 연기를 하며 불안해해서는 안 된다. 답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연기에는 답이 없어서 열두 가지도 넘는 경우의 수가 있어서, 나는 연기를 좋아한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정호는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내놓는 것이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을 텐데 시나리오 초반에 정호가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어 자살하려는 남자를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정호에겐 저런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때마다 얼마나 짜증스럽고 고통스러웠을까. 하지만 죽음을 막는다고 하여 그 남자에게 해답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정호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를 고민하다가 얻은 결론으로 연기를 하는 거다. 그리고 불안해지면 내가 연기로 밥먹고 살 때는 신이 내게 그만큼의 재능을 주셨을 거라고 믿으려고 한다. (웃음)
-<조용한 세상>에서 현상과 인화를 하는 장면도 나오던데, 사진작가가 익혀야 하는 기술을 연습했던 건지.
=<살인의 추억>을 찍으면서 형사들과 같이 지내지는 않았지만 직업적인 기술이 필요하다면 연습을 하는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사진에 취미를 붙였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기대를 완전히 깨뜨렸지. (웃음) 필름 카메라로 포커스를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나. 마침 사진을 배울 때가 겨울이었는데 포커스를 맞추려고 하면 손이 덜덜 떨리는 거다. 그리고 나는 원래 여행 가면서도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사진을 찍을 텐데, 나는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은가보다. 기억을 붙들고 있어서 뭐하겠는가.
-정호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인물로 설정돼 있다. 하지만 그것이 초능력인지 혹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모호한 면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리얼리즘 계열이다.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화려한 휴가>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처럼 사실에 가까운 영화들. 그래서인지 정호도 초능력자로 보이진 않았다. 나도 사람을 보면 성격이나 감정의 변화를 읽어내곤 한다. 누군가가 아주 미세하게 머리를 잘라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나는 그걸 혼자 눈치챈다. 사람들이 아르바이트로 점집 차리라고 할 정도다. (웃음)
-수연 역의 한보배는 극중 나이보다 성숙해 보여서 정호와의 관계가 다소 미묘하게 느껴진다. 촬영하면서 그런 분위기를 염두에 두었던 건가.
=굳이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알 듯 모를 듯한 감정이 있었으면 했다. 나도, 조의석 감독도. 정호는 첫사랑이 자살한 다음 마음을 닫고 살다가 수연이를 만나 처음으로 마음을 열게 되는데, 그걸 표현하려고 처음엔 보배에게 살가운 인사 한번 한 적이 없다. 후반부에 가서야 친한 척을 했고. 그러고 보니까 아이한테 미안하네. (웃음)
-며칠 전에 <화려한 휴가> 촬영을 마쳤다.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도 광주민주항쟁은 워낙 무게가 있는 사건이어서 실화가 소재인 다른 영화들과는 느낌이 달랐을 것 같다.
=촬영을 준비하면서 망월동 묘지에 갔는데 눈물이 너무 나는 거다. 아마 지식인이나 정치적인 인간을 연기하라고 했다면 거절했을 텐데, 내가 맡은 인물은 평범한 택시기사였다. 돈을 벌어 집 한채 사는 게 꿈인,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정말 행복했다. 광주에 80년 거리를 재현한 세트를 만들었는데 유가족협회에서 나온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더니 눈물을 흘리는 거다. 고생 많다면서, 세트를 둘러보며 내가 저기서 시체를 수습했었다고, 이 사건을 세상에 많이 알려달라고. 그럴 때면 발끝에서부터 호르몬이 쫙 올라온다.
-영화를 자주 찍는 편이 아닌데 이번에는 고된 한해를 보냈다. 쉬면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일단 집을 치워야 한다. 광주에서 올라오니까 몇달 전에 이사간 집에 짐하고 빨랫감이 너무 많아서 그냥 피해다니며 살고 있다. (웃음) 등산도 하고 싶고 여행도 가고 싶다. 배우에겐 세상과 격리되어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일단은 홍상수 감독이나 다른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서 지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얼마 전에 <해변의 여인>을 봤는데 영화가 너무 좋아 홍상수 감독에게 전화를 했더니 토론토에서 받더라고. (웃음) 나는 이미지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해변의 여인>을 봤더니 홍상수 감독이 그걸 아는 것 같았다. 술 한잔 하면서 내가 했던 한 작품 한 작품을 다시 느끼고 이야기하며 서로 위로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