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뉴스]
[현지보고] 드래곤의 대륙, 신화가 깨어난다!
2006-12-20
글 : 김도훈
판타지영화 <에라곤> 월드 프리미어
<에라곤> 출연배우들. (좌로부터) 지몬 혼수, 에드 스펠리어스, 존 말코비치, 시에나 길로리, 제레미 아이언스, 로버트 칼라일

원래 브리튼 섬은 성(聖)조지가 불뿜는 도마뱀을 잡아 족치는 드래곤의 대륙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파되는 순간 켈트 문화는 사라졌고, 미스터리한 이교도들의 영력이 사라지면서 드래곤 사냥꾼들도 폐업 간판을 걸고 구전 영웅담 속으로 숨어들고 말았다. 하지만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을 열어젖히면서 브리튼 섬에서는 또다시 드래곤의 전성시대가 열리는 듯한 인상이다. 지하에 숨어 있던 드래곤을 불러내 지구를 멸망시키는 B급 액션영화 <레인 오브 파이어>는 웃고 넘어가자. 페이크다큐멘터리 <드래곤 판타지>(Dragon: A Fantasy Made Real)는 심지어 드래곤이 실존했다는 증거를 찾아낸 런던 박물관의 젊은 고생물 학자의 여정을 시침 뚝 떼고 보여준다. 이처럼 드래곤의 종주국으로 또다시 영화를 누리려는 브리튼 섬 주민들에게 <에라곤> 역시 보통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듯하다. <에라곤>의 월드 프리미어 행사가 진행되는 런던 레이세스터 광장의 오데온 극장 앞에는 오슬오슬 살을 에는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백명의 팬들이 모여 환호성을 지르고 있고, 해리 포터를 쏙 빼닮은 소년은 원작 소설을 소중하게 껴안고 원작자를 기다린다. 이들을 달래려는 듯 오데온 극장에 특별히 설치된 화염 방사기가 5분 간격으로 허공에 불을 뿜는다.

익숙하나 질리지 않는 모험담

사실 <에라곤>은 J. R. R. 톨킨이나 C. S. 루이스 같은 세기 전의 영국 남자가 아니라 15살 미국 소년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중간계 이야기다.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의 팬이었던 15살짜리 미국 소년 크리스토퍼 파올리니가 3부작 유산(Inheritance)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로 펴낸 <에라곤>은 2003년 이후 87주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머물렀고, 북미에서만 2500만권을 팔아치웠으며, 한국을 비롯한 38개국에서 발간됐다. 그러나 영화 <에라곤>의 감독 스테펜 팽메이어는 거대한 베스트셀러의 후광 아래서 피터 잭슨처럼 골똘히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소년이 창조한 <에라곤>의 세계는 간결하게 한편의 영화로 각색할 수 있는 영웅담이다.

인간과 요정과 드래곤이 평화롭게 살던 알레게이지아는 갈바토릭스(존 말코비치)라는 야심가의 탄생으로 암흑기에 접어든다. 암흑기가 오래가면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는 것이 중간계의 법칙. 삼촌과 함께 살아가던 소년 에라곤(에드 스펠리어스)은 사냥을 나갔다가 반짝이는 푸른색 돌을 발견하게 되는데, 값비싸 보이는 돌멩이는 사실 엘프족 전사 아리아(시에나 길로리)가 갈바토릭스에게서 훔쳐 달아나던 중 순간이동으로 날려보낸 용의 알이었다. 알에서 깨어난 드래곤 사피라(레이첼 바이스)는 에라곤을 자신의 ‘라이더’로 지목하고, 갈라토릭스는 측근인 마법사 더자(로버트 칼라일)에게 에라곤을 죽이라 지시한다. 이제 에라곤은 스승을 자처하고 나선 브롬(제레미 아이언스)의 도움을 받아 아지하드(자이몬 혼수)가 족장으로 있는 반란군의 본거지를 향해 위험한 여정을 재촉한다.

<에라곤>은 어디선가 십수번은 들어본 듯한 모험담이다. 삼촌에 의해 길러진 에라곤이 스승인 브룸을 만나서 드래곤 라이더로 성장하는 과정은 루크 스카이워커의 출세담을 자연스레 연상시키고, 거대한 선과 악의 전쟁은 톨킨의 중간계를 빼닮았다. 엘프의 언어를 이해해야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설정은 <게드전기>로 영화화된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차용했음이 분명하다. 프리미어에 앞서 열린 인터뷰에서 스테펜 팽메이어 감독이 “원작자 파올리니가 수많은 영화와 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명백하지 않은가?”라는 말로 기자들의 선수를 친 것도 그 때문이리라. “레퍼런스가 많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고 힘있게 이야기를 끌고나가려 했다. <글래디에이터>를 보는 모두가 <벤허>를 굳이 떠올리지는 않는다.” 감독의 언급처럼 판타지의 전통으로부터 뼈대를 짓고 <스타워즈>를 비롯한 현대의 신화들로부터 살을 붙인 <에라곤>은 익숙한 세계이기 때문에 손쉽게 즐길 만한 오락거리이기도 하다. 자그마한 세계에서 살던 소년은 운명과 우연을 통해서 남자로 자라고, 그의 여정에는 엘프와 스승과 드래곤이 함께한다. 이것은 <반지의 제왕>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애니메이션과 닌텐도의 롤플레잉 게임으로 수없이 반복되어온 <드래곤 퀘스트>식 영웅담이기도 하다. 영원히 반복되어도 세상 모든 소년 소녀들의 로망은 쉽게 질리지 않는다.

사피라의 시각적 성찬

슬로바키아, 헝가리와 캐나다의 풍광을 빼곡히 담아낸 <에라곤>의 시각적 쾌감은 의외로 규모의 경제학에 기대고 있지 않다. <에라곤>의 스펙터클은 오히려 드래곤 ‘사피라’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퍼펙트 스톰>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 <쥬라기 공원>의 시각효과를 담당한 스테펜 팽메이어 감독이 수천만 기가바이트를 바쳐가며 공들인 사피라는 시각적 괴물이라 할 만하다. 10년 전의 영화 <드래곤하트>의 ‘드라코’가 <쥬라기 공원>으로 갓 태어난 시각효과의 힘과 숀 코너리의 성대를 빌려 근사하게 호령을 내리며 허공을 가로질렀다면, 사피라는 주인공을 태우고 곡예에 가까운 전투를 벌이면서 레이첼 바이스의 성대를 빌려 명석한 영국 악센트를 또박또박 구사한다. “사피라는 보통의 CG 캐릭터가 아니라 한명의 주인공 중 하나”라는 팽메이어 감독의 말처럼, 웨타와 ILM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사피라는 <에라곤>의 가장 몸값 비싼 스타로서 제몫을 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시간40분의 비교적 짧은 시간 속에 꼭꼭 집어넣은 사피라의 시각적 성찬이 왠지 부족하게 느껴진다면,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의외의 성격파 배우들 명단이다. 제레미 아이언스는 볼이 움푹 들어간 피곤한 듯한 얼굴로 1만8천 대 1의 경쟁을 뚫었으나 근사한 영국 악센트 외에는 조금 평범한 인상의 금발의 에드 스펠리어스를 든든하게 보조하고, 간교한 웃음을 겔겔거리며 동과 서에 번쩍하는 마법사 더자 역의 로버트 칼라일의 악역은 스스로도 즐기고 있음이 분명한 연기다. 자이몬 혼수와 존 말코비치의 캐릭터는 카메오에 가깝다. 앞으로 만들어질 후속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설 인물들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15살 소년이 아버지의 서재에서 써낸 책으로부터 시작되어 1억5천만달러짜리 블록버스터로 태어난 <에라곤>은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 사이의 중간계 어디쯤 위치한 판타지영화다. “지구 온난화, 테러 등 지구에서 벌어지는 부정적인 일들 때문에 사람들은 판타지를 원한다. 간결하게 선과 악이 나누어지는 세계를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라는 팽메이어 감독의 말은 그래서 가장 적확한 해석으로 들린다. 확실히 <에라곤>은 간결하게 나누어지는 선과 악의 영웅담과 그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특수효과의 마법에 의해 선배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목으로 울려낸다. 소년과 드래곤의 모험이 협소한 장르의 팬덤을 넘어 대중적 판타지영화의 전성기를 열어주길 바라는 제작진의 기대는 2007년 1월11일 국내 개봉과 함께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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