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홍보를 위해서 <유재석·김원희의 놀러와>에 나간다고 들었다. 이런 TV 오락프로그램은 처음 아닌가.
=처음이다. 영화사에서 나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줬다. 빼도 박도 못하게. 이번에는 영화가 보여지고, 대화 내용도 영화 위주라니까 나가는 거다. 그런 홍보가 어딨냐. 그리고 두 작품 연속해서 망하다보니 방송만한 매체가 없겠더라.
-<열혈남아> <사랑을 놓치다> 같은 영화들이 흥행이 안 돼 지난해엔 속상했겠다.
=어쩔 수 없는 거다, 뭐. 지난해 상황에서 어떤 영화가 흥행을 했겠냐. 내 운이 거기까지인데. 개인적으로는 지난해까지 너무 안 좋아서 이게 2007년을 시작하는 의미의 영화이기 때문에 무조건 잘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건 흥행을 말하기에 너무 미안한 영화다.
-그래도 흥행이 될 것 같나.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민감한 작품 같다. 예전에는 관객에게 ‘영화를 많이 봐줘서 범인을 잡자’고 말하곤 했는데, 이것도 곡해하면 속 보이는 말 같다. 결국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말 같아서 조심스럽다. 굳이 말한다면 이거야. 영화를 보러 오십시오. 무거운 마음으로는 오지 마시고. 보고 나서 가슴이 끓어오르면 그땐 범인을…. 이런 거다.
-살이 너무 빠졌다.
=<그놈 목소리> 하면서 여기 어깨 뒤쪽 살이 빠졌다. 손도 좀 빠졌고. 아니, <역도산> 할 때 붙은 살이 이제 빠지니까 얼마나 좋아. 지금 72kg이다. 영화 찍을 때보다 더 빠진 것 같다. 골때리는 게 스포츠센터 갔더니 다 뭐 준비하냐고 묻더라. 어제는 로커룸에서 양동근을 만났다. “형, 뭐 또 준비하세요” 이러더라.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그때가 <너는 내 운명>을 찍기도 전이었는데, 이유진 영화사집 대표가 이형호군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주면서 제의를 했다. 그런데 나는 <죽어도 좋아!> 끝난 뒤부터 박진표라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출연하기로 했다.
-왜 관심이 많았나.
=그냥. 징글징글한 사람이 나는 좋다. 그래서 궁금하더라. 박진표 감독님은 2002년인가 부산영화제에서 처음 봤는데, 말도 없고 낯도 가리고 쭈뼛쭈뼛하더라. 내가 개인적으로 막 자신있게 떠벌리고 이러는 사람에게 거부감이 있나보다. 그러던 차에 궁금했던 사람에게서 자료가 오니까 나는 좋지. <죽어도 좋아!> 보면 아주 징글징글하게 만들 것 같지 않나.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그 많은 이야기를 2시간 몇분 내에 압축해야 하는데 진액이 안 나오면 안 된다. 그 사람은 왠지 진액이 나올 것 같더라고. 내가 도움을 받을 것 같더라. 배우로서 나도 뭐 하나 건져야지. 좀 나아졌다는 말보다 후퇴하진 않았다는 이야기는 들어야지. 요새 내 화두가 그거다. 후퇴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말자.
-시나리오는 언제 받았나.
=박진표 감독님하고는 언제부턴가 술 한잔 하자, 밥 한번 먹자 했는데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주먹이 운다> VIP 시사 끝나고 딱 만났다. 감독님이 대뜸 “할 거냐” 묻더라. 그래서 “아, 한다”고 했다. 진짜 거기서 끝났다. 그리곤 <열혈남아> 끝날 때쯤 시나리오를 받았다. 근데 내가 앵커인지는 몰랐지.
-그럼 무슨 역할인 줄 알았나.
=그냥 아버지인 것만 알고, 아무것도 몰랐다.
-허걱했겠다.
=앵커인 걸 보고 살짝 허걱했다. 그런데 결국 앵커라는 직업이 중요한 게 아니고, 감정이 중요한 거라 생각했다. 내가 데스크에 앉아서 멘트를 하면 앵커 아닌가. 이런 앵커도 있고, 엄기영 앵커 같은 분도 있고 한 것 아닌가. 그래서 누군가를 모델로 삼고 그 사람처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었다. 나는 원래 어떤 역을 해도 모델에 대한 부담감은 없으니까.
-그래도 나름 앵커답게 보이기는 해야 하잖나.
=감독님 주문이 얼굴이 하얘서 창백한 지식인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촬영 전에 피부과 다니면서 잡티를 제거하고, 생전처음 선블록을 바르고 다녔다. 뷰티케어도 받았다. 얼굴이 진짜 호강했다.
-이번에 맡은 한경배라는 캐릭터처럼 지적이고 럭셔리한 역할은 처음 아니었나.
=하긴 직업이 검찰이라고 해도 깡패 같은 검찰이었고…. 처음은 처음이지. 얼굴 하얗게 나온 것도 처음이고. 빗질 단정하게 하는 것도 그렇고. 이 사람은 대통령과 사진도 찍었고 화목한 가정에 산다.
-시나리오의 느낌은 어땠나.
=난 굉장히 세게 읽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일종의 도발인데, 그건 영화를 봐라. 하여튼 범인을 잡고 싶다는 감독의 의지가 굉장히 강했다. 감독님은 “범인을 잡아야 이 영화가 완성된다”고 말했다. 그런 얘기를 계속 촬영하면서 하더라. 그런데 나 또한 거기에 동화가 되더라. 남주씨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찍었다는데.
=대개의 장면을 이형호군이 유괴돼서 유괴범과 부모가 접선한 실제 장소에서 찍었다. 63빌딩, 올림픽대로가 그렇고, 대한극장은 건물을 새로 지어서 맞은편 극동극장에서 찍었다.
-실제 장소에서 찍었다는 게 배우 입장에서 다른 영향을 줬나.
=뭔가 다르다. 뭐라고 말은 못하겠는데 다른 것 같다. 이를테면 실제 유괴사건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놀이터에서 발생했는데,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촬영을 반대해도 감독님은 거기만은 포기 못하겠다고 하시더라고. 결국 안수현 프로듀서와 이유진 대표가 끈질기게 주민을 설득해서 겨우 놀이터에서만 촬영 허락을 받았는데, 기분이 묘했다. 거기 그네가 있는데 그 그네에서 아이가 없어진 거다. 그 장소, 뭐라고 말은 못하겠다. 괜히 섬뜩하고 싫은 게 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이 뭔가.
=부모의 마음을 정말 모르겠더라. 아무리 헤아려도 떠오르지 않았다.
-실제로도 아버지인데도 이해가 안 되나.
=생각이 충돌한다. 내 아이가 유괴됐다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동시에 말도 안 돼, 나는 싫어, 이런 생각이 치밀어오르는 거다. 차마 내 아이의 일로는 생각을 못하는 거다.
-그러면 연기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
=그냥 몸을 학대하는 거다. 이 상황은 마케팅팀에서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해서 미안한데, 아주 감정적으로 극한으로 치닫는 장면이 하나 있다. 실제 영화에서는 편집됐는데, 하여간 촬영지가 제천이었다. 나는 애초에 서울에서 가까우니까 당일 일찍 내려가려고 생각했는데, 전날 진표 형한테 전화가 왔다. 그런데 그러는 거다. “야, 여기까지 부모가 맨 정신으로 왔겠냐.” 그냥 툭 한마디 던졌는데 나는 뻥 맞은 거다. 그래서 바로 내려가서 분장을 하고 옷을 입은 다음에 진표 형이랑 술을 마셨다. 시간이 늦어져서 진표 형은 먼저 재우고 숙소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환해지니까 쪽팔리더라고. 그래서 방으로 돌아와선 매니저를 앞에 앉혀놓고는 “너, 나 자게 하면 죽는다”라고 하고선 밤을 꼴딱 샜다. 술도 덜 깨고 몸도 피곤하고 완전 폐인이 된 거다. 그리곤 생각할 틈도 없이 촬영이 진행됐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막막했는데 한 10분쯤 지나고 나니까 내 안에 뭔가 꽉 차오르더라. 정말 묘한 경험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랬나.
=그 장면은 목동 방송회관에서 이틀 동안 찍었는데, 첫날 촬영 때는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 그래서 촬영을 접고 다음날 일찍 하기로 한 다음 술을 먹었다. 대가리를 비워야겠더라. 그때 제천에서 찍었던 게 생각이 확 났다. 술을 먹고 최대한 몸을 학대해보자. 나는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 몸이라도 완전히 깔아지게 만들자. 이미 그 전날도 밤을 꼬박 샜기 때문에 이틀 동안 잠 안 자고 술에 취해서 새벽에 촬영장에 간 거다. 그러고 나니까 또 뭔가가 차오르더라.
-그건 일종의 잔머리 제로 상태인가.
=제로는 안 되는데 생각을 많이 안 하게 되더라. 그냥 냅두게 되더라. X까라 마이싱.
-박진표 감독은 배우를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이라고 하던데.
=굉장히 편하게 해주는데 실상은 쪼는 스타일이다. 자기가 알아서 하자는 스타일이라고. 배우에게 최대한 자유를 주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 자유가 자유가 아니다. 모든 것을 내가 고민하고 책임까지 져야 하는 거다. 어유, 근데 나는 그 부모의 심정을 모르니…. 그냥 내가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을 느껴보려고 한 거다. 그래도 몇 퍼센트나 되겠냐.
-아직도 그때의 고통에 시달리나보다.
=아니, 심지어 어제 꿈을 꿨는데, 범인이 나타났다. 서울극장에서 무대인사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데, 범인이 나타난 거다. 칼을 들고. 누군가를 쑤시고 나랑 싸우는데, 손이 다 찢기면서도 결국은 범인을 잡았다. 그러고선 무대인사를 하는데, 감독님이 “드디어 우리 영화가 완성됐습니다!” 하니까 관객이 환호하더라. 무대인사를 딱 마치고선 병원에 가는데 뿌듯하더라. (잠시 침묵) 내가 아주 만화를 그렸구나, 만화를.
-찍으면서 짓눌렸을 텐데 어떻게 풀었나. 술을 많이 마셨나.
=거의 안 마셨다. 회식은 딱 두번 했다. 스케줄도 그렇고, 막 몰아쳐야 하는 분위기에서 흐트러지고 싶지 않았다.
-그럼 촬영 끝나고 뭐했나.
=집에 간다. 들어가서 멍청히 있었다. 아니면 줄넘기를 하든지.
-살을 빼려고 그런 건가.
=그런 것도 있었다. 아들이 유괴되고서 점점 야위어지는 것을 보여주려 했으니까. 양수리 세트장에서 찍을 때가 제일 힘들었다. 그 며칠 사이에 몸의 변화를 보여주려니까 하루에 작은 감자 한알 먹고 버텼다. 나는 배우로서 있는 그대로 관객에게 디미는 건 염치없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나 혼자만큼은 눈썹 몇개라도 뽑았다, 이렇게라도. 그러니까 배우가 고달픈 거 같다. 한몸으로 나오는 재료라서 그게 제일 답답하다. 어쩔 수 없이 내가 튀어나오고 익숙한 나의 표정과 익숙한 말투가….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배우가 변화를 하려고 하면 쇼를 한다는 느낌 때문에 진정성이 없어진다는 생각 또한 못 버리겠다. 딜레마다.
-배우 하는 게 점점 힘들어지나.
=그래서 진짜 힘들어하면서 괴로워하면서, 막 위염까지 걸려가면서, 자학을 하면서 하는 거다. 그런데 올해 1월1일에 생각했다. 앞으로는 자학도 좀 즐겁게 했으면 좋겠다, 라고. 그러면 또 다른 게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 자학을 하면 원색적으로 돼버리는데, 좀 달리 해보자는 거지. 어쩌면 머리를 쓰자는 생각일 수도 있어. 약게, 조절을 하면서. 계산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뭔가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건가.
=변화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요새는 미용실도 다닌다. 이 몸도 유지할 거다. 관리도 받고. <그놈 목소리>가 설경구한테 자극을 많이 줬다. 진표 형이 옆에서 계속 주의를 준다. “네가 이따위로 하고 다니는데, 옷도 후줄근하게 입고, 펑퍼짐하게. 그러지 마라. 넌 배우 아니냐”고. 그렇다고 멋 부리라는 얘기는 아니고. <오아시스> 끝나고 <광복절특사> 할 때는 그냥 내버려뒀더니 순식간에 80kg가 넘어갔다고.
-나이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변한다는 게 거창한 게 아니고, 이를테면 이런 거다. 코디들이 옷을 가져왔을 때, 덜 미안한 건 있다. 옛날에는 무슨 옷을 입어도 다 퍼져서…. 이제 돌아보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래선지 지금은 굉장히 달라 보인다. 무슨 인간개조 프로젝트에라도 참여한 것 같다.
=이런 것도 있다. 옛날 같으면 남들과 어울려 다니는 걸 되게 싫어했는데, 지금도 낯설긴 한데 지금은 억지로라도 간다.
-혹시 이젠 자신을 조금 사랑하게 됐달까. 그런 거 아닌가.
=아, 안 그래도 지난 연말 내가 어느 인터뷰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 나도 모르게, “이제부터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고. “이제부턴 나를 좀 신경쓰고 챙기기로 했다”고. 그리고 그래야 할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 혼자 생각하는 거다. 이제 설경구 2기가 시작됐다, 라고. 왜냐하면 바닥을 다 쳐봤다는 거다. 이제 더 칠 바닥도 없다, 이런 거다. 그렇다고 진짜로 ‘설경구 2기 선언’ 이따위로 쓰진 말아달라. 그리고 변화, 변신 어쩌고도 하지 마라. 어쩌면 마음이 외로운 것일 수도 있다. 이창동 감독님이 그러더라. “너 새끼 외롭지?” 그래서 “뭐가 외로워요. 테니스도 치고, 축구도 하고, 헬스클럽도 두 군데 다니고” 했더니 그러시더라. “외로우니까 그러지, 이 새끼야.” 맞다, 외로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럼 어떤가. 그게 달라지는 동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잖나.
=그래, 그럼 어떤가. 발전적인 방향이면 됐지.
-그러면 마음도 편해질 거 아닌가.
=바로 그게 그 말이다. 자학도 즐겁게, 편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