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놉시스
1942년 경성에 위치한 안생병원. 당시 최고의 서양식 병원인 이곳에 다양한 인물들의 사연과 사건이 포개진다. 정남(진구)은 원장 병원 딸과 정략결혼을 하기로 되어 있는 의대 실습생. 그가 따르는 의사 수인(이동규)은 어린 시절 사고로 다리를 절지만 실력은 최고다. 도쿄에서 유학 중이던 엘리트 의사 부부 인영(김보경)과 동원(김태규)은 귀국해 이 병원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던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 9살 소녀가 병원으로 실려오고, 시대와 단절돼 있는 듯했던 병원에는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진다.
응급실
1.9.4.2. 갑자기 거꾸로 움직이기 시작한 시곗바늘이 수만 바퀴를 돌아 자정을 가리켰다. 조금씩 짙은 갈색으로 변해가던 벽지 빛깔은 어느새 오래된 나무의 결로 바뀌었고, 흔들거리며 소란을 피우던 하얀 매트리스는 둔탁한 목재 침대가 되어 있다. 공포소설 <기담>을 읽다 잠든 어제. 사라진 기억 너머 내가 도착한 곳은 1942년 경성에 위치한 안생병원. 안(安)자가 새겨진 침대에 내가 누워 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급하게 실려온 환자들이 비명을 지른다. 그렇다면 이곳은 소설 속 ‘기담’의 세계? 무섭다. 꿈일까 생시일까. 일단은 움직여보자. 마치 누군가가 방금 밟고 지나간 것처럼 발에 닿는 마루의 촉감이 따뜻하다. 삐걱 소리가 묘하게 울린다. 應急室. 응.급.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팻말에 쓰여 있다. 역시 짙은 갈색의 팻말. 깊게 팬 한자. 응급실 안에는 8개씩 두줄로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한발을 내딛자 이상한 느낌의 액체가 밟힌다. 마루에 검게 고인 그것. 아무래도 피다. 옆에 누운 소녀의 옷가지에서 흘렀나왔다. 많은 의사들이 모여 있는 걸 보니 증세가 심각한가보다. 엑스레이 파일을 든 의사도 보인다. 당시에도 엑스레이가 있었다. 같은 걸 명칭만 달리 판독기라 부른다고 한다. 덜컥덜컥. 흔들린다. 소녀가 발작을 시작하는 것 같다. 드르르륵. 가위, 집게, 산소호흡기. 각종 의료기구가 놓인 드레싱카가 들어온다. 의사들의 움직임이 가빠졌다. 65년 전이라 그런 걸까. 공포소설 속이라 그런 걸까. 드레싱카의 모양새가 심상찮다. 옅은 핏자국이 남아 있는 듯한 하얀 색감이 왠지 꺼림칙하다.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 상단부에 손을 씻는 대야도 함께 얹혀 있다. 산소마스크는 심지어 놋쇠로 되어 있다. 숨통을 틔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조여올 것만 같다. 게다가 산소통은 이제는 거의 사라진 동네 뒤편의 가스통처럼 거대하다. 찌리릭. 깜빡였다. 얕은 갓을 단 천장의 빛들이 자꾸만 깜빡인다. 무겁게 떨어진 누런 커튼이 밖의 빛은 이미 차단하고 난 뒤다. 정전이 될 것 같다. “비켜주세요.” 또 한명의 환자가 들어온다. 이번엔 일본 병사다. 핏빛이 더욱 짙다. 드레싱카와 침대의 바퀴 소리도 더 요란하다. 정신을 잃기 전에 이곳을 나가야겠다.
시체실
어둡다. 발을 디딜 때마다 소리를 내는 마루의 느낌이 오싹하다. 온통 칠흑같은 어둠이 병원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천장에 매달린 작은 빛들은 깜빡거리기를 계속한다. 어디에선가 흐느끼는 소리도 들려온다. 지하쪽인 것 같다. 일단은 무시하고 지나치는 게 상책일 것 같다. 안내데스크쪽에는 매독 예방 포스터가 붙어 있다. 이 무렵 일부 일본인들은 경성에 매독이 퍼지는 걸 보고 드디어 조선도 선진화되었다고 말했다니, 꺼림칙하지만 시대의 변화가 느껴진다. 길이 갈라진다. 복도가 Y자로 나뉜다. 어디로 가야 할까. 왠지 선택의 시험을 받는 느낌이다. 뭔가 소리가 들린다. 수증기가 올라오는 듯한 스산한 소리. 사진실, 엑스광선실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보았다. 복도가 좁아졌다. 붉고 검은 벽돌이 채워낸 병원 내벽이 복도를 지나는 나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는 것 같다. 명동성당에서 보던 방식의 벽돌이다. 시체실이라 써 있는 팻말이 보인다. 수증기 소리가 한층 세졌다. 누군가 있다. 침대 위 시체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의학 실습생이다. 언뜻 보이는 시체.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인이다. 덜커덩 턱. 하마터면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창 오른편에 무언가가 갑자기 열린다. 목재로 된 뚜껑. 관처럼 생긴 상자가 튀어나온다. 시체 보관함이다. 실습 학생도 놀란 것 같다. 몸체는 강철이지만 뚜껑은 나무다. 견고해 보이는 모양새가 TV에서 보던 조선시대 감옥의 문양 같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누는 구획이 가로 세로 3m의 평면을 정확하게 9개로 가르고 있다. 갑자기 튀어나온 하나의 보관함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마룻바닥과 하얀 타일의 벽이 묘하게 서늘한 기운을 자아낸다. 가운데 놓인 곡선 다리의 이동식 침대는 매우 이질적이다. 스테인리스가 아닌, 직선이 아닌 병원의 침대는 낯설어서 공포스럽다. 어두운 바닥 색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달팽이가 조금씩 모습을 보이며 벽쪽으로 이동한다. 그 벽을 따라 누군가의 작은 사무실이 차려져 있다. 시체실에서의 밤샘을 달래기 위한 공간일까. 책상과 수납장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고, 작게 빛나는 책상 위 전구가 시체실의 온기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해부실
삐거덕. 꺾인 복도 끝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반쯤 보인다. 음산하단 느낌과 동시에 뭔가 빨아들이는 힘. 나도 모르게 그쪽을 향해 있다. 폭이 넓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가는 계단이 큼지막하다. 뒤를 돌아보니 시체실쪽 복도가 아주 희미하게 비친다. 병원의 자궁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엄습한 어둠과 차가운 기운이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높은 천장과 텅 빈 타일의 바닥은 그야말로 ‘기담’의 공간이다. 금속 수도관이 거미줄처럼 놓인 곳엔 바닥과 같은 타일을 깔아둔 세척대가 놓여 있다. 이곳은 해부실이다. 해부를 하기 전 시체를 닦기 위해 수도가 설치되어 있다.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가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 바닥에는 물이 흥건히 고여 있다. 하긴 당시에는 수술을 할 때 바닥에 물을 뿌렸다고 했다. 그래서 물 위로 피가 선연하게 흘렀다고. 그 뒤로 해부대가 보인다. 차가운 돌의 느낌이다. 양쪽 벽에는 수납장에 가지런히 약품들이 정돈돼 있다. 바닥에는 깨진 병조각이 보이기도 한다. 앗, 누군가가 들어온다. 곧 부검이 있을 모양이다. 일본 군인의 군홧발 소리도 들려온다. 어딘가에 숨어야 할 것 같아 고개를 돌린 곳에 작은 작은 테라스 같은 공간이 보인다. 아마도 부검을 할 때 견학하는 학생들이 서 있던 곳 같다.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내려다보는 해부실의 느낌은 더욱 스산하다. 티격태격하는 소리와 고함이 섞이며 몇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중 한 사람의 손. 거기에 나비 모양의 핀이 날카로운 날을 반짝인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고함이 높아진다. 군홧발이 점점 깊은 진동을 낸다. 뒷문으로 몸을 돌렸다.
영안실
1층 복도에서 들리던 흐느낌이 좀더 크게, 자세하게 들려온다. 지하라 더 어두워진 복도를 따라 소리를 쫓아가봤다. 양옆으로 늘어선 방문의 손잡이들이 이상하게 눈에 밟힌다. 손때가 많이 탄 놋 손잡이. 마음속에서 문을 여는 덜커덩 소리가 환청처럼 진동한다. 다시 발을 떼었다. 삐걱거리는 마루 한쪽이 음침한 빛으로 환하다. 영안실로 들어가는 입구다. 한 계단을 올라 이어진 영안실 바닥은 다다미로 정돈되어 있다. 일제시대 병원이니 다다미 영안실이 이상할 것도 없다. 향내와 하얀 국화 내음이 지독하게 섞여 있다. 정면에 놓인 영정 사진은 어쩐지 어디서 봤던 사람 같다. 뚜렷한 이목구비. 잠시 끊어졌던 흐느낌이 다시 시작됐다.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자다. 손에는 누군가의 사진을 들고 있는 것 같다. 합장을 하는 여승도 보인다. 죽음이 발하는 장소라서 그런 걸까. 흐느낌도, 지독한 향내도, 묘한 합장도 어쩐지 어딘가 정해진 길을 향해 가고 있는 느낌이다. 빛을 등 뒤로 걸음을 내딛는데 반대편 해부실쪽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역시 무슨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왠지 영안실을 빠져나온 내 발걸음은 더이상 피와 고성의 그곳을 향해 있지 않았다. 뎅~. 뎅~. 열두번의 괘종 소리가 울렸다. 이상한 시계다. 자정을 지나 다시 자정으로 돌아왔다. 침대 하단부에 깊게 새겨져 있던 ‘안’(安)자도 사라졌다. ‘기담’은 꿈일까, 생시일까. 발가락 사이에 굳은 핏자국이 안생병원의 마루 색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