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맥클레인이 돌아왔다. <다이하드3> 이후 무려 12년 만에 <다이하드4.0>을 통해 돌아온 이 미국적인 영웅은 여전히 호쾌한 액션과 삐딱한 태도로 액션영화 팬들을 자극하고 있다. 사실, <다이하드4.0>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사람들이 보인 첫 반응은 환영보다는 안쓰럽다는 쪽에 가까웠다. 정말이지 50대를 맞아 헉헉거리며 슬로 모션에 가까운 액션을 할 존 맥클레인을 생각하면 차라리 3편까지의 추억이나 즐겁게 간직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침내 공개된 <다이하드4.0>은 ‘다이하드’ 정신을 훼손하지 않을뿐더러 이를 21세기에 맞게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이하드2>와 <다이하드3>보다도 1편에 가깝다는 반응을 얻는 중인 <다이하드4.0>의 매력과 <다이하드>의 세계를 정리해본다.
여전히 부서지며, 깨지고, 두들겨 맞고, 떨어진다. 가장 최근 시리즈가 나온 지 12년, 시리즈 첫 작품이 발표된 지 19년 만에 <다이하드>와 존 맥클레인, 그리고 브루스 윌리스가 돌아왔다. <다이하드4.0>은 언제부턴가 여름 극장가의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 속편 블록버스터들과 차원이 약간 다르다. <스파이더 맨> <캐리비안의 해적> <판타스틱4> <해리 포터> 등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리즈들이 2000년대 들어 개발된 ‘신상품’이라면 <다이하드>는 1980년대부터 시작된 전통의 프랜차이즈다. 물론 <슈퍼맨> <배트맨>처럼 80년대 이후로 살아남은 시리즈가 있긴 하지만 주연배우가 한번 이상 교체됐다는 점에서 여전히 브루스 윌리스가 맥클레인으로 출연하는 <다이하드>와는 차이가 있다. 실베스터 스탤론이 버티고 있는 <록키>가 있지 않냐고? 하지만 <록키 발보아>의 록키가 중년을 넘긴 복서의 비애를 보여준다는 점을 고려하면 뻔뻔하게도 슈퍼히어로급 액션을 펼치는 <다이하드>의 존 맥클레인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다이하드4.0>이 반가운 진짜 이유는 전설에 가까운 영웅이 귀환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가 1988년 <다이하드> 1편을 통해 전달해줬던 쾌감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도 존 맥클레인은 언제나 그랬듯 상대가 되지 않는 거대한 적에게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고, 하염없이 얻어터지면서도 굴하지 않으며, 잠시 틈이라도 생기면 자신의 처지에 대해 툴툴거린다. 오로지 자신의 몸뚱이 하나에 의지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을 돌파하는 그의 ‘다이하드 정신’은 50대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결코 미지근해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이전보다 더 정교하고 악랄하며 훨씬 큰 규모의 테러와 맞장을 뜬다.
이번에 맥클레인이 상대해야 하는 새로운 적은 사이버 테러리스트다. 뉴욕 경찰로 일하고 있는 그는 딸 루시가 다니고 있는 뉴저지주립대학을 찾았다가 뉴저지에 살고 있는 해커 매튜 패럴(저스틴 롱)을 데리고 워싱턴 D.C의 FBI 본부로 호송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패럴의 집을 찾은 맥클레인은 테러리스트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테러리스트들에게 속아 미국 국가안보 시스템 일부를 해킹했던 패럴은 이제 증거인멸을 원하는 그들의 표적이 된 것이다. 패럴과 함께 간신히 탈출한 맥클레인은 워싱턴으로 향하지만, 테러리스트들은 이미 미국의 통신과 교통 체계를 장악한 채 패럴을 살해하려 한다. 맥클레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주요 네트워크를 장악한 사이버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을 완전히 마비시키려 한다. 빌딩, 공항, 그리고 뉴욕의 학교와 연방준비은행(FRB)을 지켜야 했던 맥클레인은 이제 미국 전체를 지켜내기 위해 온몸을 내던져야 하는 것이다.
‘다이하드 정신’은 결코 미지근해지지 않았다
분명 <다이하드4.0>은 시리즈 숫자에 비례해 물량 규모가 증가하는 시리즈영화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패럴의 집에서 펼쳐지는 숨막히는 총격 액션부터 터널 안과 밖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액션, 그리고 예고편에도 등장하는 전투기와 트레일러의 액션에 이르기까지, <다이하드4.0>의 액션신은 이전 시리즈에 비해 확실히 커졌다. 규모가 커진 만큼 그 허술한 구석 또한 넓어지게 마련이지만, 오히려 이 영화는 복고적인 아날로그 노선을 취함으로써 누수를 최소화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자네는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형사야”라는 대사는 맥클레인의 노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화려한 컴퓨터그래픽으로 가득한 <언더월드> 1, 2편을 만들었던 렌 와이즈먼 감독은 “만약 너무 많은 CG가 들어 있으면 <다이하드> 시리즈처럼 보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액션장면을 최대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들어내려 했다. 자동차를 날려 터널 바깥의 헬리콥터를 터뜨리는 장면은 숱한 연습과 시행착오 끝에 단 한번의 테이크로 만들어낸 완전 아날로그 액션신이며, F-35 전투기도 실제 사이즈의 절반 크기의 모델을 촬영에 투입해 100% CG 화면의 이물감을 없애려 했다. 실제로 이러한 아날로그 전략은 성공적이다. 영화의 액션신들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액션영화 황금기 시절의 카메라 앵글과 스턴트 기술로 승부하는 정통적인 느낌을 되살려주며, 맥클레인이 겪어야 하는 수난 또한 생생하게 파고든다.
<다이하드4.0>의 복고 노선은 <다이하드> 1편의 장점을 부활시키려 한 데서도 드러난다. <다이하드>가 처음 등장했던 1988년 15살이었던 렌 와이즈먼 감독은 8mm카메라를 가지고 집 뒷마당을 배경으로 자신만의 <다이하드>를 찍었을 정도로 이 영화의 광팬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1편을 이 영화를 통해 구현하고 싶어했고, 이것은 “1편에 비해 2, 3편은 덜 훌륭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브루스 윌리스의 생각과도 맞아떨어졌다. <다이하드4.0>이 오리지널 버전에 가까워진 가장 커다란 측면은 맥클레인의 캐릭터다. 영화평론가 에릭 룬데가드는 “1편의 존 맥클레인은 미국영화의 대표적인 영웅 캐릭터 셋을 섞어놓았다”면서 그것은 <하이눈>의 보안관 윌 케인(게리 쿠퍼), <카사블랑카>의 릭 블레인(험프리 보가트), 그리고 <록키> 시리즈의 록키 발보아라고 말한다. 맥클레인은 윌 케인처럼 그 어떤 주민도 돕지 않는 가운데 악당들과 맞서야 하는 외로운 영웅이며, 릭 블레인처럼 영웅심에서 사건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사적인 감정에서 참여하며, 록키 발보아처럼 때리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얻어맞는 캐릭터라는 것. 하지만 맥클레인은 <다이하드2>에서 릭 블레인의 캐릭터를 털어냈고(그는 공항에서 수상쩍은 행동을 하는 군인을 쫓다가 거대한 사건에 휘말린다), <다이하드3>에서는 윌 케인의 외투마저 벗어던진다(그와 함께 뉴욕 경찰이 조직적으로 사건에 맞선다). <다이하드4.0>이 1편을 부활시키고자 했던 면은 맥클레인에게 릭 블레인과 윌 케인(파트너 격인 패럴은 육체를 쓰는 데 젬병이다) 캐릭터를 다시 입혀준다는 점이다. 물론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영웅 타령’은 맥클레인에게서 릭 블레인의 외투를 홀딱 벗겨내기도 한다. 맥클레인이 “영웅이 돼봐야 좋은 게 하나도 없다. 총에 맞으면 상관은 토닥거리면서 뻔한 연설을 늘어놓을 뿐이고, 이혼도 당하고, 아내는 성을 바꾸고, 애들하고는 남처럼 서먹해지고 매일 혼자 밥을 먹게 된다”고 말하자 패럴은 “그럼 왜 그런 일을 하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데 아무도 안 하니까”라고 엄숙하게 말한다.
아날로그 전략으로 1편의 쾌감을 다시 살리다
어쨌거나 <다이하드>가 가진 매력의 대부분은 존 맥클레인이라는 캐릭터에서 비롯된다. 그는 릭 블레인처럼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 잘못된 상황’에 빠져들어 윌 케인처럼 ‘도꼬다이’로 적들에게 맞서게 되지만, 록키 발보아처럼 타고난 맷집으로 버텨가며 상대를 제압하고야 만다. 하지만 맥클레인이 전무후무한 액션 캐릭터가 된 데는 룬데가드가 간과한 ‘말빨’ 또는 유머라는 요소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액션영화라는 장르에 스크루볼코미디를 접목하기라도 하려는 듯, 엄숙하기 짝이 없는 적들 앞에서 느물거리며 흰소리를 해대거나 적들의 무전기를 입수해(대개 그가 해치운 적의 시체에서 얻은 것이지만) 우두머리에게 농담을 던진다.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평을 일삼곤 한다. 4편에서 패럴을 호송하면서 험난한 일을 겪던 그는 잠시 틈이 생기자마자 “내 팔자도 기구해요. 잊을 만하면 꼭 한번씩 테러범들과 엮여서 이 생고생을 해요!”라며 툴툴거린다.이 같은 존 맥클레인 캐릭터는 <블루문 특급>의 느물거리면서 유쾌하고 나름 영민한 구석도 있는 애디슨의 모습과 브루스 윌리스 자신에서 비롯됐다. 애초 <다이하드> 1편 시나리오에는 매클레인이 구사하는 농담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지만, 윌리스는 촬영 때마다 수많은 농담을 애드리브로 처리했다. 결국 2편부터는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개그를 넣게 됐다. “나는 <다이하드> 1편을 찍을 때 뭘 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그저 본능에 의지했을 뿐이다. 존 맥클레인 연기는 대부분 뉴저지에서 자란 내 삶으로부터 나왔다. 32살의 유머, 32살의 권위에 대한 반항심 같은 것 말이다.”(브루스 윌리스)
흥미로운 점은 쿨하기 짝이 없는 맥클레인 캐릭터의 근원인 브루스 윌리스가 상당한 보수주의자라는 사실이다. 군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할리우드 배우 중 드물게 2003년 이라크전을 지지한 인물이고, 밥 돌을 제외한 모든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밀어주기도 했다(밥 돌은 그의 부인이었던 데미 무어의 <스트립티즈>를 비난했다). 한때 그는 오사마 빈 라덴 등 테러리스트를 잡아오면 100만달러를 제공하겠다고 발언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총기 소지 합법화의 맹렬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사실, ‘브루스 윌리스≒존 맥클레인’이라는 등식을 꺼내지 않더라도 맥클레인이 처음부터 마초맨으로 비쳐졌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편에서 나카토미 빌딩을 찾아갔을 때 그는 아내 홀리가 자신의 성(姓)인 ‘맥클레인’이 아니라 처녀 시절 성인 ‘제나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분개한다. 따지고 보면 이들 부부의 사이가 벌어진 것 또한 홀리가 자신의 일을 찾아 LA로 가는 것을 맥클레인이 반대하면서 시작됐다. 또 앞서 말한 ‘영웅’ 운운하는 장면이나 패럴에게 ‘꼰대’처럼 구는 모습도 거슬리는 점이긴 하다. 그러나 액션영웅 중 페미니스트나 진보주의자가 드물다는 점을 고려하면 맥클레인은 그나마 나은 경우인지도 모른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코만도나 실베스터 스탤론의 람보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하드보디’와 달리 맥클레인은 최소한 테러리스트를 소탕하러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또는 북한으로 잠입하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존 맥클레인의 유머는 계속될 것이다
최근 브루스 윌리스는 한 TV토크쇼에서 <다이하드> 5편의 제작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럴 법도 한 것이 6월27일 미국에서 개봉한 <다이하드4.0>은 많은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개봉 주말 동안 3300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기록하며 순조로운 흥행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이하드> 시리즈 중 가장 좋은 주말 스코어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R등급을 받았던 기존 3편과 달리 <다이하드> 팬들과 브루스 윌리스의 반발을 무릅쓰고 결국 받아낸 PG-13등급의 영향도 있을 터.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것은 존 맥클레인 그 자체다. 12년 동안의 기다림을 참아온 성인 팬들이야 두말할 나위 없지만, 흥에 겨워 “이피카이예이”(Yipee-Ki-Yay: 맥클레인이 악당들을 해치우면서 외치는 소리로 ‘이피카이예이 머더퍼커’란 대사는 4편에서 모두 나온다)를 외치면서 21세기에 도착한 이 80년대 카우보이가 젊은 관객에게서도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은 이 초스피드의 디지털 시대가 아날로그적인 야성 또한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