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훈 감독과 작업한 <방과후 옥상> 때 아쉬움이 많이 남아서 이번 영화는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결정했다고 했다.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인데.
=찍을 땐 그런 거 생각 안 한다. 개봉할 때 생각하지. (웃음) <방과후 옥상> 때는 저예산에 배급도 어려웠고, 완벽한 세팅이 아니었다. 완벽한 세팅에서 하게 되면 어떤 영화가 나올까 궁금했다. 이 감독님의 단편을 보면 짠한 게 있다. 그런 걸 이번에 해보고 싶었고 <방과후 옥상> 때보다 업그레이드될 거란 확신이 있었다.
-막상 해보니까 어떤가. 잘 맞는지.
=아닌 것 같다. (웃음) 유머의 코드는 비슷한데 멜로 코드는 좀 다르다. 나는 누르는 걸 좋아하는데 감독님은 많이 분출하는 걸 좋아하시더라. 사실,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이후에 반성을 많이 했다. 내 재주에 내가 넘어갔구나…. 그 표현이 딱 맞을 것 같다. 내가 너무 나를 과신했구나, 하던 찰나에 이런 (진지함이 있는) 작품이 들어왔다. 정말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웃음)
-‘내 재주에 내가 넘어갔다’는 표현을 좀더 설명해달라.
=보이지 않나, 솔직히. 연기에 두서도 없고. (웃음) 그땐 백윤식 선배님한테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대배우에게 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게 오히려 내 시야를 좁게 했다. 그리고 그전에 개봉한 <방과후 옥상> <가족의 탄생>에서 한 연기들도 잘했다고 해주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고…. (웃음) 사리 판단이 잘 안 됐던 거다.
-신한솔 감독과 하는 <가루지기>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싸움의 기술> 때 같이 할 뻔했는데 못했다. ‘변강쇠’에 대한 고정관념을 상당히 배신하는 작품이 될 거다. 이번 영화의 선택과 연장선이라고도 본다. <애정결핍이…>와 다르게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중점을 뒀던 것이 과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상황에 묻어가면서도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클로즈업에서 아주 미묘한 변화의 표정이라든지 그런 디테일한 연기를 해본 지가 오래됐더라. 그걸 내가 다시 할 수 있을까. 내가 리얼리티에 근접해 있어도 연기가 될까, 그런 걸 많이 자문했다.
-그럼 이번 영화를 통한 자평은.
=여전히 모자란 것 같다.
-시나리오에 없는 아이디어를 현장에서 많이 내는 편이다. 짐작이지만, 그렇게 드러나는 게 10개라면 실제로 본인이 생각하는 건 1천개는 될 것 같다.
=그래서 전작에 안 쓰였던 것들은 그 다음 영화에 쓴다. 전작에서 썼는데 안 먹힌 게 있으면 그것도 다음 영화에 또 쓴다. 나는 될 때까지 한다. 내가 이걸 기필코 살리고야 말리라. (웃음) <애정결핍이…> 때 안 먹힌 게 하나 있어서 그것도 이번에 썼다. 그런 디테일이 이번에 많이 산 것 같아서 좋다. <광식이 동생 광태> 하면서 주혁이 형한테 많이 배웠는데 그 사람의 연기는 평범해 보이지만 굉장히 디테일하다. 호흡 하나까지도.
-이번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구창이 아니/하니의 비밀을 알고 나서 속상한 마음에 그 집을 찾아갔을 때다. 문을 평소처럼 두드리다 격해지는 모습을 멀리서 뒷모습으로 잡았는데 찡했다.
=그 장면 찍으면서 눈물이 안 멈춰서 혼났다. 그리고 아니가 “사람들이 날 없는 사람 취급해”라고 말할 때에도 나는 울면 안 되는 장면인데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하더니 멈추질 않았다. 이렇게까지 감정을 깊게 접근해본 게 처음이라서 조절이 안 되더라. 그런 멜로가 이 영화의 큰 부분인 걸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고, 내가 하는 멜로가 왜 이런 거 있잖나, ‘풉∼’ 이게 안 되게 하려고 많이 애썼다. 이제 출발인 것 같다. 육상경기할 때 ‘탕’ 하는 출발신호 듣고 뛰었는데 10m쯤 가서 파울 판정난 그런 느낌이다. 마라톤이겠지, 100m 달리기가 아니라. 그럼 얼마나 더 진빠지겠나. 근데 심정이 그렇다. 아직 출발도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