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혼란이 왔다. 너무 쉽다. 너무 단순하다. 천사표 여자가 아픈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고 병을 고친 그 남자는 결국 그 여자를 배신하고 떠난다.
사랑은 그렇게 씁쓸하고 경박하며 부질없는 것이다.
그게 다인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단순히 그게 다인가?
비현실적이다 싶을 만큼 착한 여자의 캐릭터에 극단적인 선악구도에 약초 캐는 날 하필이면 비가 오는 손쉬운 설정하며…. 전형적이며 통속적인 멜로의 문법을 당혹스러울 만큼 노골적으로 차용한 이유가 뭘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허진호 감독이. 감독 자신의 최고 장점인 탁월한 심리묘사와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대사의 힘만으로 황정민과 임수정이라는 두 거목의 발군의 연기력만으로 그 당혹스러움이, 그 진부함이 커버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뭔가 더 있을 것 같았다. 감독조차도 ‘통속적인 멜로’를 하고 싶었다고 배수의 진을 쳤지만, 관객이 찾아내주길 바라는 뭔가가 분명히 더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느꼈던 완전히 상반된 두개의 감정이 설명되지 않았다.
처음엔 사랑의 씁쓸함에 가슴이 시고 영수의 비정함에 울화가 치밀고 겨우 저 따위밖에 안 되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은희의 순진함에 눈가가 뜨겁다가 어느 한 순간 영수의 어쩔 수 없음이 이해되고, 영수가 가엾고, 어쩌면 은희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위안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영수는 요양원에서 룸메이트의 자살을 경험했었다. 그에게 죽음이란 ‘먼 훗날 언젠가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너무나 가까이 있어 눈만 뜨면 맞닥뜨리는 댓돌 위에 놓인 자신의 신발과도 같은 것이었다.
폐에서 고름을 빼내는 은희의 고통스런 신음 소리가, 하찮은 비만 맞아도 사선(死線)을 넘어야 하는 은희의 가냘픔이 끊임없이 그 사실을 주지시켜주었다. 영수가 은희를 떠났던 건 사랑이 식어서도 아니고, 마음이 변해서도 아니고, 가난한 은희의 지지리 궁상이 지겨웠던 것도 아니고, 옛 연인의 화려함과 부(富)가 그리웠던 것도 아니고, 다만 모든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당연한 본성,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은희를 떠난 영수가 옛 연인과 즐겼을 행복(몇 주였는지 몇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을 과감히 생략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힘겹게 돌아가 안긴 옛 연인에게 영수가 무심하게 내뱉는 대사가 “너는 사는 게 재밌니?”라는 시니컬한 대사가 아니었을까….
은희는 영수와 동거를 시작하며 ‘당신과 결혼을 하자는 게 아니다. 함께 살며 당신의 병을 고쳐주고 싶다…. 내가 죽을 때 내 옆에 있어 달라’는 얘기를 했었다. 영수는 은희로 하여금 자신의 병을 고치게 했고, 은희의 죽음을 지켜주었다. 어쨌든 은희의 소원은 다 이뤄진 셈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안쓰러워하고 가슴 아파하고 시비를 걸고 공감할 수 없다 윽박질러도 소박한 은희만은 느꼈을 은희만의 소박한 행복… 영화 <행복>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그게 아니었을까….
허진호 감독은 씁쓸한 ‘사랑’ 얘기를 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가엾고 약한 ‘사람’ 의 얘기를 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본 사람 누구든 붙들고 얘기를 좀 해봐야겠다.
<행복>이라는 이 영화.
그 쓴맛 때문에 잘 입에 대지 않았던 에스프레소 두잔을 연거푸 마시게 하며 꽤 오랜 시간 마음을 뒤숭숭하게 하는 참 오묘한 영화다.